J Dilla와 21장의 앨범들

정말 오랜만에 J Dilla 관련 앨범들을 쭈욱 들었다.

나는 딜라가 힙합이라는 바운더리를 넘어 프린스, 마빈 게이, 아이작 헤이즈, 커티스 메이필드 같은 블랙뮤직의 거장들과 비교돼야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드럼은 늘 창조적이었고 예측할 수 없었으며 아름다웠다. 

딜라가 남긴 음원들은 부틀렉과 컴필까지 합하면 꽤나 방대한데 그중 이번 정주행 때 들으려고 추린 최애 21장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본다. 

딜라의 정수는 역시 비트 테입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로파이 힙합 프로듀서들은 딜라의 비트 메이킹에 빚을 졌다. Instrumental Series라는 타이틀 아래 발매된 이 두 장의 앨범은 그에 대한 확실한 방증이다.

딜라의 커리어에서 The Ummah와 The Soulquarians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둘 다 무시무시한 멤버들이 포진해 있던 프로듀싱 집단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딜라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ATCQ의 4, 5집은 The Ummah의 그윽한 향기가 배어 있는 앨범으로, 특히 5집의 Find a Way는 딜라가 손댄 비트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Common의 두 앨범 또한 Soulquarians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초콜릿 앨범의 훌륭함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일렉트릭 서커스라는 희대의 명작이 지금까지도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 유명한 Fuck The Police가 수록돼 있어서 딜라 팬들의 필수템이 된 앨범. 심지어 이 앨범에는 곰돌이 시절 칸예 웨스트의 비트도 들어있다. 정작 딜라 프로듀싱은 한 트랙뿐이라 프로듀서보다는 엠씨로서의 역량을 느껴볼 수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나중에 이 앨범은 The Diary라는 타이틀로 재편집되어 발매된다.

Madlib과의 콜라보를 통해 나온 걸작 앨범. 발매 당시엔 기대 이하라는 평이 우세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컬트 클래식이 되어 갔다. 이 앨범에서 딜라는 정말 뛰어난 랩 퍼포먼스를 들려준다. 참고로 디럭스 버전에서는 딜라 비트인 The Red가 샘플 클리어 문제 때문에 다른 버전으로 교체되었다. 반드시 오리지널 버전으로 들을 것.

큐팁 솔로 1집의 수록곡 대부분을 딜라가 만들었다. 뛰어난 랩과 최고의 비트가 만난 앨범이지만 대중적으로 히트하지는 못했다. 그도 그런 게, 딜라의 비트는 음악적 경험이 풍부해야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딜라 팬들의 필수템인 90년대 황금 비트 모음집. 딜라는 90년대부터 이미 완성형 프로듀서였다.

딜라의 앨범들 중 가장 유명하면서 입문자에게도 1순위로 추천되곤 하는 두 앨범. 판타스틱 vol 2에는 딜라 커리어 역사상 손꼽히는 아름다운 비트들이 가득한데 역시 음악적 경험이 많지 않다면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 소리의 섬세한 질감 자체가 급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면 다른 음악들도 많이 들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BBE Beat Generation 시리즈로 발매된 앨범들은 죄다 수작 이상인데 그중 Petestrumentals와 일이등을 다투는 명반이 바로 Welcome 2 Detroit 앨범이다. 딜라의 앨범들 중 사운드가 가장 고급지고 풍성하다. 

딜라의 디트로이트 친구들 Frank-N-Dank의 데뷔작이고 딜라가 모든 곡을 만들었다. 근데 지독히 환각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음악이라 딜라의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물론 나는 극호.) 이 앨범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한 딜라 팬이라 할 수 있다. 

딜라의 부틀렉 중 필수템인 리믹스 작업물 모음집. 데라소울, 블랙스타, 파싸이드, 버스터 라임스, 커먼 등등 힙합 트랙들의 리믹스와 함께 마이클 잭슨, 자넷 잭슨, 메이시 그레이, 민트 컨디션, 브랜뉴 헤비스 같은 익숙한 히트곡의 리믹스도 실려 있다. 

이 앨범은 힙합 샘플링이라는 작법이 어떤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준 역사적인 결과물이다. 동시대 프로듀서들을 코찔찔이 꼬맹이들로 만들어 버리는 환상적인 사운드 주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딜라 컬렉션을 만들려는 팬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인 큐디의 앨범. 언더그라운드에서 소량만 찍어내 구하기가 쉽지 않다. 딜라가 프로듀스한 앨범 중 가장 직선적이고 투박하지만 소리의 질감과 드럼의 운용은 여전히 최상급이다.

J-88 aka Slum Village. 딜라를 대표하는 싱글 중 하나인 Look of Love pt. 1이 실려 있는 EP. 슬럼 빌리지 시절의 멋스러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딜라의 솔로 작업물 중에선 유명한 편에 속하는 앨범. 원래는 EP였는데 나중에 확장판의 형식으로 Stones Throw에서 재발매됐다. 이 앨범에서 딜라는 날아다닌다. 본인이 주조한 말도 안 되는 사운드 위에서 최고의 라이밍을 선보이는, 딜라 입문자들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명작.

Jay Love Japan이라는 타이틀과 욱일기 문양의 커버로 발매되어 한국 팬들의 빈축을 샀던 앨범. 욱일기 커버는 후에 디럭스가 발매되며 교체되었다. 물론 타이틀 및 커버와는 무관한 최고의 작업물들이 들어있다. 

사후 앨범들 중 두 장. The Shining은 So Far to Go, Won't Do처럼 눈물샘을 자극하는 명곡들도 있지만 딜라가 죽지 않았다면 후에 어떤 시도를 했을까 짐작할 수 있는 트랙들도 다수 존재한다. 

딜라의 비트를 긁어 모아 Illa J가 Yancey Boys라는 타이틀로 낸 앨범을 나는 언제나 Instrumental 버전으로 듣는다. 날고 기는 엠씨들이 와도 랩이 비트에 묻히는데 Illa J의 랩은 지나치게 평범해서 감상에 짜증만 유발한다. 다시 말하지만 딜라의 정수는 비트 그 자체다. 보컬을 걷어내고 남은 최상급의 비트를 감상할 수 있는 앨범.

"The King of Beats"

딜라 사후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컴필과 부틀렉 중 나의 최애는 이 앨범이다. 극도로 미니멀하게 만들어진 비트들이 70분 동안 흘러나오는데 어느 하나 평범하게 찍히지 않았다. 비트의 본질, 비트 그 자체만을 시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도파민이 흘러 넘치는 과한 음악들로 가득찬 오늘날을 예견이라도 한 듯 딜라의 음악에는 심플하지만 확고한 주제 의식이 집약되어 있다. 

비트란 무엇인가?

딜라가 살아있었다면 또 어떤 혁신을 보여주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