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ka de Casier - Lifetime
2025.05.08—Independent Jeep Music—Downtempo
https://www.youtube.com/watch?v=i36-wzw2g7k
*풀버전은 w/HOM Vol. 23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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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드 카지에르(Erika de Casier)의 4번째 정규 앨범 <Lifetime>에 관한 본격적인 담론을 나누기 전, 우리는 2020년대에 들어 젊은 세대들에 의해 설파되기 시작한 'Y2K 에라'가 무엇인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Britney Spears, Aaliyah, Janet Jackson, Destiny's Child를 비롯한 젊은 디바들이 로우 라이즈 진을 입고, 미니멀한 드럼 머신 위에서 리버브가 잔뜩 걸린 R&B를 노래하던 2000년대 초반의 그 시절을 우리는 Y2K라고 부른다. 디지털 문화의 급부상으로 전 세계에서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던 이때의 음악에서 사랑과 슬픔이라는 감정은 보다 연극적이고 꾸며진 채로 표현되었고, 이가 유례없던 팬데믹이라는 대재앙을 경험한 현 세대에 의해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대에 등장하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은 이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본인들의 음악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이가 과연 본인들의 의사로 이루어진 일인지는 과연 잘 모르겠으나 말이다. PinkPantheress는 정글(Jungle)과 UK 개러지(UK Garage) 등의 장르들을 통해 2000년대 초반 클럽 음악들을 본인만의 색으로 재해석하였고, Charli XCX는 <BRAT>이라는 팝 음악의 새로운 청사진을 통해 2000년대 인터넷 문화를 노골적으로 참조하였으며, 국내의 NewJeans 역시 Y2K 댄스 팝과 2000년대 MTV 스타일의 비디오들을 선보이며 완전한 Y2K 컨셉을 구현했다.
에리카 드 카지에르는 본인의 음악 경력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Y2K를 향해 끝없는 찬사를 보내오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앞선 문단에서 언급한 아티스트들과 에리카의 차이점이 있는데, 여타 아티스트들은 Y2K라는 하나의 시대를 본인만의 음악과 색깔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고—에리카는 이때의 감정 표현 방식과 사운드를 현대적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리카는 본인의 음악에서 반복적으로 리버브가 번져 흐릿해진 보컬, 공기를 한껏 머금고 있는 신시사이저, 최소한의 드럼 머신을 선보였고—그녀는 이러한 음악적 요소들 위에서 여러 감정들을 그저 암시하고 흘려보내는 식으로 전달하였다. 에리카는 그 누구보다 감정을 절제한 음악을 선보이며, Y2K의 미학을 정교하게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Lifetime>은 그녀의 이러한 방향성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Janet Jackson의 <Janet.>, Madonna의 <Ray of Light>, Sade의 <Love Deluxe>가 미학적으로 가리키는 삼각점을 중심축으로 삼아 앰비언트풍의 신스와 드럼, 그리고 고전적인 다이얼톤 샘플링들을 조화롭게 엮어 이루어진 <Lifetime>은 에리카 본인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Y2K 세계관이 구축되었다. 나아가 과도한 피처링 의존도로 그녀 고유의 색을 탁해지게 만들었던 전작 <Still>과 달리 본작은 오롯이 그녀의 힘만으로 제작되었고, 또한 본인의 레이블을 통해 자율적으로 발표되었으니 어떠한가.
본작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바로 앨범에 전반적으로 차용된 페이드인 기법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Lifetime>에서 그녀는 Y2K의 향수를 당시 사운드를 구성했던 핵심 요소들—느릿하고 공간감 있는 비트, 적절히 딜레이 걸린 신스 패드, 잔향이 길게 남는 보컬 처리—을 최소한의 장치로 끌어와, 2020년대의 사운드 미학과 결합해 재배열시키는 방식으로 구현해 내었다. 이 때문에 앨범의 모든 트랙들이 마치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오는 것처럼 천천히 소리의 스펙트럼과 디테일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법으로 가장 크게 수혜를 본 트랙으론 "Miss"를 꼽을 수 있겠는데, 본 트랙에서 사용된 흐릿한 리버브 보컬과 90년대의 낯익은 붐뱁 스타일 킥과 스네어 박자는 페이드인 기법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무겁고 부담스럽게 세공되었을 것이다.
"Moan"과 "Delusional"은 분명 Janet Jackson과 Cypress Hill을 향한 명백한 오마주이다. 전자의 경우 Janet의 유명한 명곡 "Throb"을 연상케 하는 리듬 구조와 관능적인 숨소리가 트랙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고, 후자는 "Insane in the Brain"의 브레이크 샘플을 따와 변형한 드럼 패턴 위에 정교한 멜로디 라인을 얹는다. 트랙 간의 질감 변화 역시 매우 탁월하다. “Two Thieves”는 초반에는 TLC 식 R&B 스타일로 곡을 전개하다 후반에 트립 합(Trip Hop)과 인더스트리얼(Industrial)이 뒤섞인 방식으로 질감을 점점 갈아붙인다. 이 순간에서 필자는 Massive Attack과 Portishead의 음악을 떠올렸었는데, 이는 <Lifetime>이 단순 Y2K 감성을 훌륭히 구현해낸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운드를 탐구한 결과물이라는 증거이다.
그러나 단적으로 평하자면 <Lifetime>은 지나치게 심심하다는 것이 그 흠이다. 앨범의 톤이 굉장히 매끈하고 조용한 탓에, 에리카 특유의 정제된 우아함이 어느 순간 '안전함'과 '무난함'으로 치환되고 만다는 것이다. 특히 에리카의 보컬은 기교 없이 담백하고 속삭이듯 읊조리는 방식이라, 앨범 전체를 단번에 듣기엔 다소 단조롭다고 느껴지곤 한다. 트랙 간의 사운드 톤도 유사하고, 사운드는 세밀하게 디자인되어 있으나 극적인 연출이 전무한 탓에 한순간에 곡의 개성이 뭉개져버리기도 하니 말이다. 가령 “Twice”나 “Dreams” 같은 트랙은 잘 만든 R&B 트랙이라고는 할 수 있겠으나, 과연 이가 <Lifetime>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는 의문이 들곤 한다.
그래도, 이 슴슴함 역시 에리카의 음악과 <Lifetime>의 고유의 미덕이자 일부분이 아닐까. <Lifetime>에서 그녀는 리스너들이 감정적으로 커다란 반응을 보여주길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우리의 순간을 빛바랜 노란색으로 채운 뒤에, 훗날 어느 순간에 문득 떠오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에리카가 본인의 음악을 통해 이루어내고자 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Lifetime>은 에리카가 Y2K라는 시대의 감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원하는 동시에, 감정의 밀도를 낮춘 채 청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음반이다. 피할 수 없는, 피하려고 하지도 않은 여러 단점들 속에서 그녀는 2000년대 초반의 미묘한 감정들—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외로움, 꾸며진 사랑, 정제된 낭만—을 오늘날의 언어로 다시 기술한 것이다.
6.7 / 10
맘에드네요
시종일관 비슷한 분위기로 밀고가는게, 저도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다가왔네요. 물론 너무나 잘 형성한 분위기이기에 이 앨범을 좋아하는 것도 상당히 이해가 가긴 합니다만.. 큰 흐름에서 감정의 고저를 조금만 더 이끌어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블로그에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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