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2
"대중음악의 발명"으로부터 아직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많은 이들이 이제 '새로움'은 멸종해버렸다고 말한다. 이는 제이 딜라의 <Donuts>를 처음 들었을 때 몸소 느꼈던 상반된 감정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샘플들을 이어붙여 완전한 박동감으로 탈바꿈시키는 솜씨에 감탄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한 줌의 의문이 뒤따랐다. '타인의 아이디어를 통해 뼈대를 갖추는, 즉 샘플링이 음악의 미래인가?' 그간 나는 새로움의 멸종에 대한 수많은 장탄식을 마주쳤다. 도대체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존과 레논, 아방가르드와 프로그레시브, 디스코와 펑크, 신시사이저와 턴테이블, 비요크와 케이트 부시, 힙합과 인디 록, OFWGKTA와 브레인피더에 이르기까지, 새로움은 멸종해버렸다고 말하는 이들이 새로움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대상이 예외 없이 과거 속에 존재하는 아이러니. 위에 열거된 대상들이 정말 그토록 충실하게 새로움을 나타내는가? 내 생각에 위 대상들은 단지 새롭다거나 또는 단순한 캐치프레이즈로 요약할 수 없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다. Nourished by Time으로 알려진 프로듀서이자 싱어송라이터 마커스 브라운 역시 마찬가지다. 스키플 밴드 쿼리멘이 비틀스로 발전했듯이, 그의 음악에는 하우스, 뉴 잭 스윙, 뉴 웨이브, 일렉트로니카, 컨템퍼러리 알앤비 등 과거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깊게 배어 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 과거의 틀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모방이나 참조처럼 여겨지지 않는 데다, 오히려 그 형식의 미래를 듣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쉽게도 <Erotic Probiotic 2>나 작년 <Catching Chickens>를 그토록 인상적으로 만들었던 핵심 요소들이 <The Passionate Ones>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EP 단위 프로젝트에서는 좀처럼 경험하지 못했던 충만함이었다. 3년 동안 마커스의 음악을 팔로우하며 그의 비전과 테크닉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이번에는 어떤 거장과 장르 그리고 악기를 참고했는지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나는 한 명의 팬이 됐다.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OPN은 마커스의 음악에 대해 "아서 러셀과 다프트 펑크가 만든 딥 알앤비."라는 평을 남겼다) 반면 이번 앨범에서는 그 기분 좋은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선공개된 싱글에서는 여전히 독특한 카리스마와 재치가 번뜩이지만 앨범에는 몇몇 특색 없는 필러들이 자리해 러닝타임 사이사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친숙하지만 외면받았던 과거의 잔재들을 가져와 그의 포스트모던한 감각과 결합시키는 능력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It's Time의 셔플 드럼은 빈티지 레코드 숍의 먼지 쌓인 가판대 위에서 바로 뽑아낸 것처럼 들리고, Max Potential에서 다람쥐의 비명처럼 피치 업된 보컬은 그 주인공인 라비 시프레와의 듀엣을 상상하다가 탄생했다. "그는 이 곡을 믿어줬어요. 흑인 아티스트가 또 다른 흑인 아티스트를 지지해 준 거죠."
요사이 장르 음악의 경향은 그 장르의 관습을 따르지 않거나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Nourished by Time의 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결같이 80년대 신스 팝과 90년대 알앤비를 떠올릴 것이다. 청개구리 같은 면모는 가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현대 팝 음악을 지배하는 개인주의와 내향성 그리고 쿨한 태도로부터 거리를 두고, 사랑, 공동체, 사회 불평등에 대한 반발 같은 집단정신을 고양하는 것처럼 보인다. 9 2 5는 볼티모어 클럽 모티프에 통통 튀는 피아노 라인을 덧붙인 댄스 넘버로서 앨범 발매 전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완전무결한 4/4 박자 위에서 마커스는 저임금 고노동에 시달리는 예술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당연하게도 그 예술가는 인생의 그저 그런 시기에 그저 그런 일자리에 종사하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마커스 자신이다. 오래전 블러드 오렌지의 Hands Up을 듣고, 정확히는 공권력에 의해 살상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곡의 신명나는 분위기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도저히 춤추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부추길 음악이 디스코나 댄스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 팝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왠지 모르게 마커스 브라운에게는 염세적인 면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버클리 음대를 나와 이주한 LA에서 마커스가 맞닥뜨린 것은 맥도날드와 스타벅스에서 일하며 제2의 플레이보이 카티와 마이키 매디슨을 꿈꾸는 지망생의 행렬이었다. 고군분투하는 예술가의 도시에서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는 더 이상 개성이 되지 못했다. 마커스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Erotic Probiotic 2>는 대도시 생활을 포기하고 돌아간 부모님 집의 지하실에서 제작됐으며, XL 레코딩스와 음반 계약을 따낸 현재도 그는 룸메이트와 함께 터무니없는 뉴욕의 월세에 노심초사한다. 한데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었을까? 90년대 알앤비와 경쾌한 시카고 하우스를 넘나드는 음악은 현란한 신스 웨이브와 매끄러우면서도 긴장감 어린 기타 연주를 통해 알앤비의 미래처럼 느껴지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가령 BABY BABY에서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보컬 샘플과 신스는 마이애미 베이스의 부산한 하이 햇 패턴과 만나 다시금 우리의 춤추기 본능을 자극한다. 그러나 이 숨 가쁜 템포 위에서 마커스는 독특한 래핑으로 자신의 급진주의를 설파하며 제일 화젯거리가 됐던 라인을 내뱉는다. "팔레스타인을 폭격할 수 있다면, 몬다우민은 말할 것도 없지." 이것은 픽시스와 페이브먼트식의 통찰과 냉소인가, 일시성과 광란에 잠식된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인가? 염세주의자의 신세한탄인가, 쾌락주의자의 송가인가? 이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성이야말로 Nourished by Time을 기억하게 하는 힘일 것이다.
"샘플링이 음악의 미래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것은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상대방의 판권을 사와 입맛대로 개작하는 도식적인 과정과는 무관하다. 다프트 펑크는 시스터 슬레지와 마이클 잭슨을 샘플링하는 대신 나일 로저스와 폴 잭슨을 초청했다. 썬더캣 또한 80년대 요트 록 레코드를 샘플링하는 대신 마이클 맥도날드와 케니 로긴스를 참여시켰다. 이들은 단지 특정 시대 특정 음악이 아니라, 다프트 펑크와 썬더캣을 다프트 펑크와 썬더캣으로 만들어 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 스타일과 흐름, 그 시대상 전체를 자신들의 작품 속에 심어놓았다. 마커스 브라운도 그렇다. <The Passionate Ones>의 콘셉트와 보컬 편곡은 SWV와 조데시 그리고 고전 댄스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런 사운드와 질감들을 가져와 더 독특하게 편곡하고 이리저리 반전시키며 자기만의 균형 감각에 다다른 것이다. 마커스는 솔란지와 프랭크 오션 같은 아티스트들을 이런 접근 방식, 그러니까 포스트 알앤비의 선구자로 손꼽는다. "우리는 늘 포스트 록이나 포스트 펑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흑인 음악에는 '포스트'를 붙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Nourished by Time이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포스트 프랭크 오션일까? 마커스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새 앨범을 좋아하진 않을 거라고 말한다. "모두가 좋아한다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뜻일 거예요. 충분히 밀어붙이지 않은 거죠." 그가 포스트 프랭크 오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는 충분히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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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마커스의 새 앨범을 두고
채널 오렌지는 몰라도 채널 낑깡 정도는 될 거 같다,
라고 한 적이 있는데
정말 딱 그 정도 되는 앨범을 들고 왔네요. ㅎㅎ
디자이너 폴 사어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가는
두 가지의 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을 알아보는 눈'과
'자신이 속한 세상(장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눈.'
이 친구의 그릇이 어느 정도 될는지는 몰라도
Nourished by Time이 두 가지의 눈을 가졌다는 사실만큼은 알 거 같네요.
앞으로 들려줄 음악이 더 기대됩니다.
재밌게 읽어주시길!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가사를 보면서 다시 들으니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더라는,,
감사합니다! 가사도 가사인데 이 사운드에 이 가사가 맞나? 하는 느낌이 재밌더라고요
존과 레논 하하
"포스트 프랭크 오션"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다가 전에 읽었던 국내 소설이 떠올랐는데요, 이상우의 <두 사람이 걸어가>라는 작품이에요. 시간 나시면 한 번 확인해보세요. 흥미로워하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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