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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에 앞서 부끄러운 사실을 하나 말하고 넘어가겠다. 나는 블루스에 대해 잘 모른다. 락과 알앤비의 모태가 되었고, 19세기~20세기 초 미국 흑인들의 삶과 즐거움, 애환을 블루스 노트와 12마디의 구조, 매기고 받는 노동요의 형식을 이용해 담아낸 데에서 시작되었다는 아주 기초적인 사항이 내가 블루스에 대해 아는 거의 전부다. 미국의, 그것도 특정한 민족 집단의 고유성이 짙은 장르이고 문화인 만큼 그 경계의 밖에 위치한 이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음 또한 부정하기 어렵고, 나 역시도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영화 <씨너스: 죄인들>을 보기 전에는 블루스에 대한 관심이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기꺼이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의 <블루스브라더빅쇼>를 리뷰할 수 있는 것은 이 앨범이 보여준 견고한 장르미에 기반한 보편성의 미학이 그 진입장벽도, 시간과 공간, 장르의 경계마저도 너끈히 넘을 수 있다는 것만큼은 뚜렷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앨범의 원안이 <Playing with my friends>였던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블루스브라더빅쇼>에는 최항석의 벗들이 함께하는 행복감으로 충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들 벗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앨범의 음악적 방향성에 대해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미국을 오가며 현지 뮤지션들과도 자주 소통해온 최항석인 만큼, 이들의 도움이 크레딧의 곳곳에서 물씬하다. 장르의 원산지인 미시시피 델타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클락스데일부터, 미시시피강과 철도의 힘으로 미국의 남북을 잇는 교통 허브인 멤피스에 이르는, 그야말로 블루스의 고향과 확장 지점에 위치한 뮤지션들의 도움이 <블루스브라더빅쇼>가 지닌 농염함과 익살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효주의 그루비한 피아노 위에서 집안 대대로 미시시피를 토대로 활동해 온 블루스 베테랑인 Lucious Spiller와 더불어 기타와 보컬을 주고받는 "No more Worry Blues", 베테랑 오르간 연주자 락한의 연주와 함께 멤피스 기반의 악단 The Norman Jackson Band의 세션들과 호흡하며 행복에 대해 정겹게 환담하는 "Our Happiness"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행복감은 최항석의 구수한 보컬을 중심으로 단단히 응축된다. 물론, 남부를 벗어나더라도 아티스트들 간의 유대는 한결같다. 스페인 출신의 맨해튼 기반 블루스 퍼슨인 Felix Slim이 선사하는 어쿠스틱 기타와 블루스하프 연주가 최항석의 일렉 기타와 소통하는 그림은 앨범에서도 가장 미니멀하면서도, 동시에 단연코 가장 블루스다운 순간의 하나였다. 한쪽이 연주하거나 노래 부르면, 다른 쪽에서도 응답이 돌아와야 하는 화합과 대화의 장르가 바로 블루스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때때로 장르와 직업의 한계마저 넘나든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 건 아닌' 언더그라운드의 멋쟁이들이 한데 모인 "한국대중음악상"에서 VMC의 딥플로우와 ABTB, 게이트플라워즈의 박근홍은 사이키델릭한 시카고 블루스 위에 합류하여 견고한 기본기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한 채 각자의 긍지를 주고받는다. 힙합과 하드 락이라는, 판이하게 다른 이들의 지향은 최항석의 목소리와 밴드의 끈적한 연주를 축으로 너무도 매끄럽게 섞인다. 더 나아가 "Starlight"에서는 <FOUNDER>를 통해 고전적인 흑인 음악으로의 확장을 모색하던 TK(a.k.a. Van Luther)의 도움을 받아 블루스와 로큰롤의 터프함을 토대로 가스펠의 부드러움을 향해 나아간, 스택스 레코즈(Stax Records) 식의 서던 소울로 자신들의 방향성을 확장하기도 한다. 원래 메탈 씬에서 활약하던 기타리스트인 도미닉 준이 "Starlight"에서 만큼은 피아노와 신시사이저 건반 뒤에서 유연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넘실거리며 서정을 쌓아내면 그 위로 최항석의 러프함과 호란의 재지한 매끄러움이 더해지며 앨범에서 유독 환상적인 부분을 자아낸다.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앨범 후반부의 가스펠 넘버인 "인생은 아름다워"일 듯싶다. 원래 블루스와 가스펠은 비슷한 뿌리를 공유하나, 원체 본능적인 부분이 강했던 블루스에 대해 흑인 기독교 커뮤니티에서는 어느 정도 금기시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로버트 존슨에게 재능을 준 주체가 신도, 천사도 아니고 악마였겠는가. 그럼에도, 전문 CCM 가수인 이기리와 같이 부른 "인생은 아름다워"의 경쾌함은 인간적인 부분으로 뭉쳐진 앨범의 마지막을 신실함으로 무리 없이 받아낸다. 장르 고유의 다정함이 신실함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순간이다.
<블루스브라더빅쇼>의 가장 큰 매력 가운데 하나는 전업 뮤지션이 아닌 이들과도 멋들어진 화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블루스의 시작점이 전문적인 음악가들이라기보다도 노동자들의 필드 할러에서 비롯된, 생활에 밀착되어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Starlight"에서 몽환적인 피아노 연주를 선사해 준 박관규는 정형외과 교수도 겸업하고 있다. 앨범의 타이틀 격인 흥겨운 점프 블루스 넘버 "블루스브라더빅쇼"가 앨범의 마지막에 36인의 블루스 퍼슨들의 기가 막히는 잼 세션을 거쳐 15분이 넘는 대곡으로 확장되는 부분은 이러한 '아마추어리즘'의 승리가 단연 빛나는 지점이다. 물론 신촌블루스, 김목경, 이경천, 이중산부터 사자밴드, 소울 트레인 등에 이르는 블루스~소울 계 각지의 베테랑이 선사하는 풍성한 퍼포먼스가 우선 눈에 들어오지만, 그 사이에서도 학생과 교수, 사장 등 자신의 본업이 따로 있는 이들의 연주가 유독 정겹다. 진정성 있게 말을 걸고 화답하는, 때로는 언어조차 잊은 대화가 하나로 흐를 적에는 경계도 무너지고 그저 같은 위치의 인간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일상에 대해 말하던 것이 블루스였던 만큼, 이들의 이야기는 여느 이야기보다 보편적이고, 그만큼 인간적이다. 대중적인 코드의 건반과 오르간 뒤에서 울먹대는 기타를 타고 펼쳐지는 이야기는 어느 평범한, 한국의 중년 직장인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것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토끼같은 자식과의 콩트로 이어질 때, 애환은 해학으로 풀리며 짙은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여러 장르를 대표하는, 또한 마이너리그에 위치한 이들이 돈을 넘어서는 명예를 말하고, 어느 구석에는 고백과 사랑, 행복을 말하는 소리가 때로는 거칠게, 또한 따스하게 울려퍼진다. 소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장르도 국경도 직업도 없이 그저 공평한 감정만이 느껴진다. 리뷰의 서두에서 나는 블루스를 잘 모른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9개의 트랙을 지나 수많은 경계를 넘어선 한마당 소통의 장을 마친 지금, 그 고백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블루스브라더빅쇼>는 말한다. 블루스가 특정 지식이나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님을. 그것은 그저 마음을 열고, 옆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함께 웃고 떠들 준비만 되어 있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소통의 언어였다. 기타 소리에 어깨를 들썩일 수 있다면, 그의 신명나는 보컬을 어설프게나마 따라부를 수 있다면, 최항석이 차린 이 거대한 잔치에 어울려 놀 수 있다. 어쩌면 한국 블루스에 처음 발을 들이민 모두에게 늦게나마 인사 올린다. ‘웰컴 투 더 <블루스브라더빅쇼>!’
Best Track: 우리 잘해보자 with Felix Slim, 한국대중음악상 with 딥플로우, 박근홍, 블루스브라더빅쇼 with 36 Blues Men (Deluxe Edit)
본 리뷰는 HOM#26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hausofmatters.com/magazine/hom/#las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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