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음악 애호가, 뮤직 너드, 리스너 혹은 힙스터 따위의 명찰을 단 이들에게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행동 양식이 있다. 이들은 광활한―스스로 일구어낸―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며 수없이 많은 음악을 듣는다. 각자 올라탄 배와 항해하는 방식, 길잡이로 삼는 지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 따위는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제 발로 거칠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누군가는 레코드 가게들을 탐방하며 수십, 수백 장의 LP나 CD를 사 모은다. 누군가는 적게는 수십, 많게는 천만여 명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를 떠돌며 막대한 양의 앨범을 위시리스트에 쌓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각종 웹진, 평론지, 서적, 심지어 아마추어 평론가들의 글까지 가리지 않고 탐독해 나간다. 적지 않은 수가 세 방식을 모두 수행할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가 자신을 “진짜”로 만들어주리라 믿는다.
그런 뮤직 너드들에게 샘플링은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음악에 대한 깊은 애착, 디깅에 대한 강박적일 정도의 집착 그리고 사랑하는 음악에 새로이 숨을 불어넣겠다는 고루한 열망을 키울 텃밭으로 작용한다. 상상해 보라, 산처럼 쌓인 LP나 음원 파일 속에서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씨앗을 발견하는 광경, 정성스레 심고 키운 씨앗이 나의 품 안에서 싹트는 광경을! 고로 샘플링은 감상자의 수행이 창작자의 방법론으로 고스란히 전이된 개념이고, 그렇기에 수십 년 동안 많은 이들이 샘플링의 숲을 구석구석 탐험했다. 수없이 많이 심어진 샘플링 음악의 씨앗 중에서도 The Avalanches의 『Since I Left You』는 유달리 독자적이고 확고한 입지를 확보해, 발매 후 25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그 자체로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단 한 장의 앨범으로 The Avalanches는 16년 간의 공백기를 견뎌냈고, 발매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도 샘플 수사관들이 그 안에 담긴 DNA를 쫓아 아카이브 속으로 투신하고 있다. 『Since I Left You』라는 하나의 파도가 어느새 수많은 이들을 인도하는 거대한 해류가 된 것이다.
이제는 『Since I Left You』를 다루는 데 있어 필수적인 관문이 된 Robbie Chater의 인터뷰를 다시 가져와 보자면, 본작은 무려 3,500개라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의 샘플이 사용되었다―실질적으로 900개의 트랙에서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느 쪽이든 18트랙, 3,690초짜리 앨범에 쓰였다고는 믿기 어려운 숫자이다. 놀랍다 못해 경외심이 느껴지는 샘플의 양은 그 자체로도 The Avalanches의 빛나는 창작력을 체감하게 하고, 그 양뿐 아니라 샘플을 다루고 정제하고 혼합하는 방식 역시 그들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열정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음악 그 자체에 온 마음을 다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 작용한다. 그렇게 빚어낸 『Since I Left You』는 당연하게도 매 순간순간이 눈을 뗄 수 없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으로 가득 차 있다.
확실히 The Avalanches는 갖가지 샘플들을 자유로이 저글링하는 데 탁월하다. 두터운 베이스라인과 주술적으로 울려 퍼지는 보컬 샘플, 마구 존재감을 뿜어내는 이색적인 기타와 신시사이저로 구성된 하우스 「Radio」는 주체할 수 없는 흥겨움을 불러일으킨다. 곧바로 이어지는 「Two Hearts In ¾ Time」은 단순한 허밍과 청아한 피아노, 뮤지컬 대사 토막 따위를 모아 짙은 서정성을 불어넣는다. 보컬 샘플의 애수를 한껏 극대화하는 「Tonight May Have To Last Me All My Life」나 고전적 소울과 미래적인 효과음을 조합하는 「A Different Feeling」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외의 트랙들도 저마다의 색으로 반짝인다. 이토록 유려한 콜라주는 보기 드문, 아니 이전에 없던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The Avalanches는 샘플을 고르는 데 있어 “하나의 리듬 아래 어우러질 수 있는가?”라는 단 하나의 원칙 이외의 모든 권위와 관습 따위를 무시한 듯하다. 이들은 Ghostface Killah의 스쳐 가는 가사 한 마디를 하나의 트랙으로 늘리거나, De La Soul과 세서미 스트리트, 무명의 프랑스 힙합 크루가 선보인 프리스타일을 동일 선상에 나열하고, 훗날 Daft Punk로 화하기 이전 Thomas Bangalter의 습작에 새 생명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들 앞에서 출신지, 시대, 인종, 역사적 영향력 따위는 의미를 잃고, 단지 리듬의 일부가 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Frontier Psychiatrist」는 본작 내에서도 가장 주목할 가치가 있다. 코미디언 듀오 Frank and Shuster의 동명의 스케치를 축으로 하여 전위 예술가 Laurie Anderson의 인터뷰에 각종 영화, 코미디, 구연동화와 다채로운 효과음들이 연출하는 초현실주의 연극을 보아라. 각기 다른 출신의 섞이지 못할 것만 같은 샘플들이 The Avalanches의 창의적이고 섬세하며 장난기와 애정이 어린 손길에 의해 한 몸을 이룬다. 이는 정말이지 환희로 가득 찬 순간이고, 어떤 것이든 대중음악으로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고결한 선언이다.
“널 떠난 후, 나는 아주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어!” (“Since I left you, I found the world so new!”) 「Since I Left You」가 재생되는 내내 반복되는 이 단순하고 짧은 가사는 그 자체로 『Since I Left You』를 한 줄로 요약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트로 자체가 앨범 전체를 소개하는 일종의 안내서이자 앨범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드럼, 음성, 여러 효과음 등의 샘플들이 자연스레 정렬되어 리듬을 만들고, 나른한 플루트와 산뜻한 현악기, 부드러운 허밍이 합세한다. 이윽고 The Main Attraction의 「Everyday」에서 태어난 보컬 샘플이 터져 나오면 우리는 말 그대로 The Avalanches가 일구어낸 세상 속으로 풍덩 빠져들 수밖에 없다. 새의 힘찬 날갯짓을 닮은 인트로처럼, 우리 역시 활기와 모험심을 꽉 쥐고 날아오르는 것이다.
분명 『Since I Left You』는 낙관적이고 희망찬 생명력을 담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본작 안에 스며든 환희를 설명할 수 있을까? 다시 한 줄의 가사로 돌아가 보자. “널 떠난 후, 나는 아주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어!” (“Since I left you, I found the world so new!”) 본작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나아가 본작의 이름이 된 이 문구는 작사가가 고심하여 마음속에서 꺼낸 상념이 아니다. 그저 The Avalanches의 구성원 중 누군가의 손에 잡힌 바이닐 속 가사 한 마디였을 뿐이다. 이토록 우연한 만남은 왜 이렇게 운명처럼 느껴질까? The Avanalches가 발견한, 『Since I Left You』를 듣는 우리가 경험하는 새로운 세상은 대체 어디일까?
소위 음악 애호가, 뮤직 너드, 리스너 혹은 힙스터 따위의 명찰을 단 이들은 음악을 향한 애정 어린 탐구와 강박적인 투신이 자신을 “진짜”로 만들어주리라 믿는다. 그런 이들에게 샘플링은 음악에 대한 애착, 집착, 열망 따위를 공들여 키울 텃밭이 되어준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Since I Left You』에서 하찮고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간절히 새긴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본다. 수백 장의 LP들을 모으고, 병적으로 음악을 탐구하고, 그 안에서 유심히 고른, 혹은 우연히 귀에 꽂힌 샘플들을 모아 직접 독창적인 형상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사랑하는 음악을 계속해서 재생산한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며 만난 낯선 환희, 짜릿한 모험, 막연한 즐거움과 소속이 주는 안정감 등이 단 한 장의 앨범에 응축된다. 그렇게 『Since I Left You』는 음악 그 자체를 향한, 그리고 음악 속에 투신한 “진짜”들을 향한 헌사가 담긴다. 이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 우리의 눈앞에는 어떤 세상이 보이는가?
CD 인증 커밍 순
좋은 글이네요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들어 더 자주 듣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언제나 좋은 앨범이죠
감사합니다
이 앨범은 진짜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참
그렇기에 많은 이들의 꿈결 같은 앨범이 아닌가 싶네요
앨범에 대한 지대한 애정이 정말 잘 드러나는 만큼의 입체적인 글 같아요:) 근래에 리뷰 중에서 정말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애정 하나로 시작한 글인 만큼 그게 잘 느껴졌다니 다행입니다
너무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ㅋㅋㅋ3500개는 진짜 광기다
과장일 수 있다고 쳐도 진짜 아찔한 숫자에요ㅋㅋㅋ
마지막 두 문단이 유독 마음에 듭니다. 어떻게 보면 3500여개의 샘플에서 Since I left you I found the world so new라는 구절을 끌고 온 것도 대단하네요. 참 탁월한 선택인 듯 ㅋㅋ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정말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희열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정말 우연히 잡은 가사가 음악을 온전히 대변할 수 있으니까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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