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젊은 거장들의 시대 (1)
흔히 힙합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골든 에라(Gold Era)'의 영웅들의 대다수는 뉴 밀레니엄의 도래와 함께 자리를 잃어갔고 신인 뮤지션들은 빠르게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에미넴(Eminem), 자 룰(Ja Rule), 넬리(Nelly), 피프티 센트(50 Cent) 등이 2000년대 초 힙합씬의 주연들이었다. 멀티 플래티넘 앨범들이 쏟아졌고, 그들은 힙합을 너머 팝씬을 대변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그러나 힙합이 이러한 슈퍼스타들로만 대표될 수는 없는 법이다. 상대적으로 대중들의 시선을 받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뚜렷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씬에서는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던 이들이 메인스트림 씬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시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2006년이다. 이때부터 빠르게 성장하여 이제는 힙합 씬에서 없어선 안될 존재로 성장한 젊은 거장들. 오늘은 그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제는 팝 스타! 릴 웨인(Lil Wayne)의 등장
90년대부터 아이돌 힙합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해온 릴 웨인의 등장을 2006년이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독립적인 뮤지션으로서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확립한 시기는 2006년 전후로 보는 것이 맞을 듯싶다. 물론, 그전까지도 대다수의 랩퍼들과 차별화되었던 그의 캐릭터는 흥미로웠다. 작은 키에 길에 늘어뜨린 머리, 특이한 보이스 톤까지. 그러나 과거 핫 보이즈(Hot Boys) 시절의 후광과 캐릭터 구축만으로는 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기에는 랩 자체의 부족함이 있었고, 릴 웨인은 자신의 위치를 한 단계 더 도약할 기회를 필요로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교체하는 것이 아닌 진화를 택했다. 그는 자신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던 보이스 톤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임팩트 있고 자유롭고 다양한 플로우를 구사하는 방법을 빠르게 익혀나갔다. 그 결과 정규작 [Tha Carter II]으로 자신의 캐릭터 완성에 큰 획을 그었고, 이듬해에는 자신의 소속사 사장이자 의부인 버드맨(Birdman)과 함께 발표한 콜라보 앨범 [Like Father, Like Son]으로 대중들에게도 자극이 될 만큼의 성장을 이루게 된다. 본작은 릴 웨인의 슈퍼스타로의 발전 가능성을 한층 더 극대화한 작품이었는데, "Stuntin' Like My Daddy"와 같은 남부 전형의 클럽튠을 전방에 배치하여 대중들의 취향을 공략하면서도, 남부 힙합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분위기의 음악을 앨범에 담아내면서 자신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펼쳐내기까지 한다. 본 작품을 자양분 삼아 발표한 후속작이 힙합 역사에 남을 명반 [Tha Carter III]인데 어떤 부연설명이 더 필요할까.

닥터 드레(Dr. Dre) 사단에서 독립한 서부의 자존심
대부분의 신인 아티스트들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을 꺾어가면서까지 데뷔하려 노력하는 것과 대비되게 게임(The Game)은 시작부터 당찼다. 자신의 상사이자 그가 속했던 그룹 지유닛(G-Unit)의 리더 피프티 센트와의 비프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임의 강한 자존심은 데뷔 앨범 [The Documentary]의 성공의 기반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당대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에 성공했던 피프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피프티와 관계를 맺어온 닥터 드레 사단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게임은 기존에 받았던 지원 없이 차기작 작업에 몰두해야 했다. 이때 게임은 어릴 적 영웅이자 음악 멘토였던 닥터 드레를 잃으면서 극도의 절망감과 좌절감을 경험했고 심지어 자살까지 고려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어쨌든 그는 자신을 억압하는 내면의 감정들을 잘 극복해내고, 독립적으로 소포모어 앨범을 작업하게 된다. 이때 그의 차기작을 향한 '소포모어 징크스'에 대한 우려는, 전작에 참여했던 거물들의 서포트의 부재가 더해지며 더욱 커졌다. 그러나 그가 발표한 2집 앨범 [Doctor's Advocate]는 모든 예상을 뒤집는 것이었다. 90년대 웨스트 코스트 랩퍼들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갱스터 랩'을 강하게 표출했던 데뷔 앨범의 에센스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세련된 측면까지 강화한 그의 새 앨범은 그의 데뷔 앨범이 단순히 힙합 거물들의 네임벨류에 기인한 후광만은 아님을 증명해 보인 웨스트코스트 클래식이었다.

슈퍼스타로 등극한 애틀란타 삼대장
사실, 2006년에 앞서 이미 준슈퍼스타 이상급의 랩퍼였던 루다크리스(Ludacris)를 포함해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던 영 지지(Young Jeezy)와 T.I.의 커리어가 2006년 들어서 정점을 찍게 될 것임은 예상 가능한 바였다. 이들이 2006년에 각기 발표한 앨범이 모두 앨범 판매량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당시 이들의 상승세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듯하다. 아무튼, 힙합 유행의 흐름을 따져보면,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동부와 서부로 몰려있던 힙합이 2000년대 초중반부터 전국구로 퍼지게 되었고,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남부로 쏠리게 되었는데, 그러한 기류의 중심에는 이 세 남부 젊은 거장들의 영향이 지대했다.
이들 모두 대박을 기록했지만, 특히 T.I.의 [King]은 그가 줄기차게 주장해오던 '남부의 제왕(King of the South)'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할 정도로 대형 히트 앨범이었다. 이들의 공통된 성공 전략은 간단명료했다. 앨범의 근간에는 남부 힙합과 자신들 특유의 아이덴티티를 심어두고 음악은 다양한 방향으로 발산한 것이다. 물론, 이들의 앨범 최전방에는 클럽튠("I Love It"(영 지지), "Money Maker"(루다크리스), "What You Know"(티아이))을 리드싱글로 채택했으며, 동시에 감성적인 수록곡들 또한 싱글로 채택하여 대중친화적 전략도 펼쳤다. 당연히 음악적 성공이 이런 '장르적+대중적' 전략을 채택한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이 또한 대중들과 장르 팬들을 모두 휘어잡을 수 있는 뛰어난 음악적 완성도가 기반이 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이야기다.

두 시카고맨의 힙합씬 강타
미국의 중서부가 힙합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개성 있는 뮤지션들을 꾸준하게 배출해낸 공은 무시할 수 없다. 바우 와우(Bow Wow), 본 석스 앤 하모니(Bone Thugs-N-Harmony), 넬리, 칭이(Chingy), 세인트 루나틱스(St. Lunatics) 등등... 물론, 커먼(Common), 트위스타(Twista)와 같은 힙합 거물들을 낳은 시카고도 예외는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위세도 2000년대 중반의 것에는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2005년도에 데뷔한 칸예 웨스트(Kanye West)는 대박이라고 할 만했다. 랩퍼보다는 프로듀서의 이미지가 훨씬 강했던 칸예 웨스트였지만, 전업 랩퍼 수준의 랩 실력까지 보여준 데뷔 앨범 [The College Dropout]은 굉장히 신선한 바람이었다. 보컬의 피치까지 올려 새로운 생명감을 불어넣는 특유의 칩멍크 샘플링 방법론은 칸예의 음악을 한층 더 흥미롭게 만들어줬다. 그러한 칸예의 아이덴티티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방법론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한층 더 세련되었던 [Late Registration]은 데뷔작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데뷔 초에 느껴졌던 '이제는 랩도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듯, 자신이 만든 비트를 위에서 자유자재로 랩을 쏟아내는 [Late Registration]의 칸예 웨스트는 더 이상 '랩도 하는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칸예의 데뷔 앨범은 [Late Registration]이라는 대작의 시발점이 되는 동시에, 또 다른 시카고 출신 랩퍼의 탄생을 의미했다. 칸예의 "Touch The Sky"에 객원으로 참여했던 루페 피아스코(Lupe Fiasco)의 랩에 강한 인상을 받은 제이지(Jay-Z)는 루페 피아스코의 데뷔 앨범의 총괄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가 되길 자청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표되는 작품이 루페의 데뷔작 [Food & Liquor]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케이트 보드에 대해 그린 "Kick Push"부터, 컨셔스 랩(Conscious Rap) "Hurt Me Soul"까지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진솔하게 풀어낸 앨범 [Food & Liquor]는 각기 수록곡들의 내용도 알찼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라임의 빼곡한 배치라든지 각종 메타포를 활용한 메시지 전달을 품을 가사가 특히 일품이었다. 지금이야, 루페 피아스코를 떠올리면 '최고의 리릭시스트(Lyricist)'라 칭송하지만, 혜성처럼 등장했던 당시에 팬들이 느꼈던 충격과 감동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었다. 상업적/대중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루페 피아스코(Lupe Fiasco)는 '2006년 힙합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글 | greenplaty
칸예와 루페는 충격이였죠
메인스트림 뮤지션들이 아직까지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구요.
반갑네요 2006년
위지 티아이 루다 영지지 ㄷㄷ
이 넷 중에 지금은 위지 정도를 빼면 저 시절의 위상은 아닌듯...
와 지역별로 다시 이렇게보니까 장난아니다 진짜 한사람 한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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