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을 만난 블루노트
올해로 창사 75주년을 맞이한 블루노트(Blue Note Records)는 다양한 기념 앨범을 발매하며 음악 팬들과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클래식 재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레이블이지만, 최고의 재즈 레이블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수많은 재즈 레이블이 있었고 개중에는 인디 레이블이었던 블루노트와는 달리 상당한 재력을 바탕으로 스타들의 앨범을 쏟아낸 메이저 레이블도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인식 속에 블루노트가 재즈사의 중심부에 자리하는 까닭은 이 레이블이 지닌 상징성에 있다. 그리고 그 상징성은 블루노트를 거쳐 간 수많은 명인과 그들이 만들어낸 고르게 수준 높았던 명반들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록과 소울이 대중음악을 잠식했던 60년대에 블루노트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69년에는 타 레이블에 인수되는 신세가 되었고, 1979년에는 EMI에 넘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EMI에서 블루노트가 받은 대우는 꽤 좋았다. 재즈, 클래식, 뉴에이지 등을 다루는 레이블들을 산하에 두고 총괄하는 레이블 그룹으로 그 지위가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EMI 아래에서 블루노트는 기존 명반들의 재발매는 물론,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이어갔다(최근에는 유니버설(Universal Music Group)이 블루노트를 인수했다).
이를 두고 상업성의 점철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상업성의 반대편에는 신선함도 공존했다. 대중화의 과정에서 블루노트가 만들어낸 가장 큰 신선함은 단연 힙합의 수용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 주류 음악으로 떠오르던 힙합의 상승세와 블루노트의 상업적 행보가 맞물리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힙합 곡에 샘플로 사용된 재즈 곡을 모아 발표한 믹스테입은 블루노트가 샘플로서의 재즈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 이뿐이 아니다. 블루노트의 뮤지션이 직접 샘플링을 하여 재즈힙합을 시도하기도, 전문 힙합 뮤지션들과 합작도 하면서 재즈 음악이 가진 가능성을 극대화했다. 힙합 뮤지션의 재즈 샘플링을 넘어 재즈 레이블이 직접 나서서 시도한 합작으로 재즈힙합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힙합 프로듀서들의 재즈 믹스테입
♬ Pete Rock - [Diggin' On Blue]
힙합의 인기가 한창이었던 1999년, 도시바 EMI 재팬(Toshiba EMI Japan)은 블루노트 레이블을 통해 두 장의 믹스테입을 발표했다.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강호 D.I.T.C.의 프로듀서 로드 피네스(Lord Finesse)와 전설적인 프로듀서 피트 락(Pete Rock)이 그 시작을 맡았다. 이들은 [Diggin' On Blue]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각각 앨범을 발표했다. 진 해리스(Gene Harris), 허비 행콕(Herbie Hancock), 루 도널드슨(Lou Donaldson) 등등, 블루노트 소속의 소울재즈 뮤지션들의 곡을 두 프로듀서들이 골라서 제작한 믹스테입이었다. 재즈힙합에 대한 관심도가 굉장한 일본에서 이런 앨범이 공식적으로 발매된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힙합 트랙이나 공연에서 접하게 되는 DJ들의 샤웃아웃이 그대로 녹음된 것은 이 앨범들이 일반적인 편집 앨범들로부터 차별화되는 매력 중 하나다. 로드 피네스가 [Diggin' On Blue]의 수록곡을 추려 [The Art Of Diggin': Blue Note State Of Mind]라는 제목으로 재발매하고, 비즈 마키(Biz Markie)도 [Diggin' On Blue]를 발표한 것으로 보아, 앞섰던 두 앨범은 일본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에 일본 DJ 무로(Muro)도 [Incredible]이라는 제목의 믹스테입을 두 장 발표했다.
2008년에는 블루노트 본사에서 [Droppin' Science: The Greatest Samples From The Blue Note Lab]라는 제목의 믹스테입을 발표했다. '블루노트 연구소의 위대한 샘플들'이란 앨범 제목은 자신들의 음악이 수많은 힙합 명곡들의 모태가 되었다는 자부심의 발현으로 보인다. 본 작은 프로듀서들의 샤웃아웃이 없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편집 앨범에 가깝고, 앨범 구성도 크게 줄어 10곡이 수록되었다. 이 앨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네이티브 텅즈(The Native Tongues)의 데 라 소울(De La Soul)과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이하 ATCQ)의 대표곡들의 샘플이 앨범의 주축을 이룬다는 점이다. 재즈 샘플링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힙합 그룹이었음을 의식한 앨범 구성이 아닐까 싶다. 닥터 드레(Dr. Dre)의 “The Next Episode”에 샘플링된 데이비드 맥컬럼(David McCallum)의 “The Edge"와 재지팩트(Jazzyfact)의 "A Tribe Called Jazzyfact"에 샘플링된 루 도널드슨의 "It's Your Thing"도 수록되어 친숙하다. 이렇게 대단히 익숙한 힙합 트랙들의 샘플이 수록된 [Droppin' Science]는 유명한 프로듀서·DJ의 네임파워 없이 재즈 앨범 차트 8위에 올랐던 히트 앨범이다.
블루노트가 만드는 재즈힙합
행여나 블루노트가 믹스테입만 제작하는 소극적인 태도로 힙합에 접근했다고 판단한다면, 그건 섣부른 짐작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재즈힙합 그룹 어스쓰리(Us3)와 색소폰 연주자 그레그 오스비(Greg Osby)가 이끌었던 재즈힙합 밴드도 블루노트 소속이었으니 말이다. 프로듀서 제프 윈킨슨(Geoff Winkinson)과 멜 심슨(Mel Simpson)이 이끌었던 어스쓰리는 기존의 블루노트 명곡을 샘플링하여 힙합 비트를 제작했고, 여기에 래퍼들을 초빙하여 랩을 얹었다. 그렇게 발표한 [Hand On The Torch](1993)는 재즈계를 넘어 주류 음악계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의 인기는 이만 못했지만, 블루노트가 공식 출범시킨 재즈힙합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 Greg Osby (Feat. CL Smooth) - Raise (Remix)
그레그 오스비의 재즈힙합 밴드가 낸 앨범은 [3D-Lifestyles](1993)와 [Black Book](1995)이다. 물론, 그보다 앞서 발표했던 1991년 작 [Man-Talk For Modern Vol. X]에서도 힙합에 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타격감 강한 드럼이 곡을 주도하고, 스크래치도 이따금 등장하는 재즈힙합에 상당히 근접한 작품이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힙합을 재즈에 접목한 건 [3D-Lifestyles]부터였다. 밴드 구성도 살펴보면, 연주자는 자신과 피아노 연주자 한 명뿐이었고, 그 나머지 공간은 ATCQ의 알리 샤히드 무하메드(Ali Shaheed Muhammad)의 프로덕션으로 채웠다. 라이브 연주는 최소화하고 DJ와 래퍼를 주축으로 세운 그레그 오스비의 밴드는 초기 재즈힙합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시기 대부분 곡에는 래퍼들이 참여했는데, 그중 “Raise”의 리믹스 버전에는 CL 스무스(CL Smooth)가 참여했다.
♬ Madlib - Shades Of Blue / 제약회사 CF
최고의 재즈힙합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매들립(Madlib)의 [Shades Of Blue: Madlib Invades Blue Note](2003)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앨범은 블루노트가 처음으로 힙합 프로듀서에게 리믹스를 맡긴 작품인데, 매들립은 원곡의 분위기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작업했다.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의 “Song For My Father”와 웨인 쇼터(Wayne Shorter)의 “Footprints” 같이 잘 알려진 곡들은 밴드를 동원해서 다시 녹음했다. 그 과정에서 매들립은 템포를 조절하거나 일렉트릭 오르간을 활용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센스를 발휘했다. 또한, 그는 특정한 프레이즈를 반복하거나 순서를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구성에 새로운 느낌을 부여했다. 드럼에 힘을 주어 힙합의 분위기를 살리는 것을 잊지 않음은 물론이다. 덧붙이자면 [Shades Of Blue]의 타이틀곡 "Slim's Return"은 국내 모 제약회사의 CM송으로도 사용됐다.
♬ Robert Glasper Experiment - [Black Radio Recoverd: The Remix EP]
최근에는 힙합과 알앤비를 접목한 [Black Radio](2012)로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가 재즈힙합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재즈힙합으로 그의 영역확장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네오소울과 알앤비에도 상당한 지분을 내준 탓에 그의 앨범을 두고 재즈힙합이라고 부르기는 다소 조심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실제로 그의 앨범 [Black Radio]에는 힙합, 알앤비, 네오소울 아티스트들이 고르게 참여했고, 그 앨범으로 그는 그래미 어워즈의 ‘최고의 알앤비’ 부문을 수상했다. 하지만 [Black Radio Recovered: The Remix EP](2012)는 온전한 재즈힙합 앨범이었다. 지난 작과 마찬가지로 보컬리스트들이 참여했지만, 리믹스 앨범에선 노래보단 랩이 주가 되었고, 피트 락, 나인스 원더(9th Wonder), 퀘스트러브(?uestlove) 등의 거물 힙합 프로듀서들이 리믹스한 덕에 [Black Radio Recovered]는 수준 높은 재즈힙합 앨범으로 완성되었다. 그의 [Black Radio] 시리즈는 그에 앞섰던 블루노트 재즈힙합 앨범의 영광을 잇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들이다.
작년에는 루츠(The Roots)와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의 합작 앨범 [Wise Up Ghost]가 블루노트 레이블을 통해서 발매된 바있다. 재즈힙합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앨범이었지만, 블루노트에서 힙합 그룹의 힙합 앨범을 발표했다는 데 의미를 둘 만하다.
그래픽 디자이너 리드 마일즈(Reid Miles)는 블루노트의 전성기였던 50년대와 60년대에 수많은 명반의 앨범 아트를 제작했다. 그가 제작했던 앨범 커버들이 지닌 듀오톤(일반적으론 푸른색)과 감각적인 사진·텍스트 배열은 블루노트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에 적당히 위치한 블루노트의 레이블 로고는 앨범의 완성도에 대한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이 스타일에는 굉장한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에 리드 마일즈가 블루노트를 떠난 뒤에도 많은 앨범이 이렇게 제작되었다. 블루노트의 음악을 즐겨 샘플링했던 ATCQ는 싱글 앨범 [Jazz (We've Got)]의 커버로 블루노트의 디자인을 차용했다. (실제로 이 곡은 재즈 트럼페터 프레디 허버드(Freddie Hubbard)의 “Suite Sioux”를 샘플링했지만, 아쉽게도 이 곡이 수록된 앨범 [Red Clay]는 블루노트의 앨범은 아니다.) 매들립의 [Shades Of Blue]의 앨범 아트와 ‘푸른빛의 음영’ 정도로 번역되는 앨범 타이틀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즈힙합에 큰 획을 그었던 구루(Guru)의 [Jazzmatazz] 시리즈, 그중에서도 [Jazzmatazz, Vol.2]는 블루노트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다가 썼으며, 심지어는 블루노트의 로고까지도 패러디했다.
블루노트의 디자인을 패러디한 사례는 매우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예론 리드 마일즈의 아트워크에 대한 오마주로 그래픽 디자이너 로건 월터스(Logan Walters)가 만든 우노트(Wu-Note) 앨범 커버가 있다. 우탱 클랜(Wu-Tang Clan)과 그 멤버들의 앨범들을 블루노트 스타일로 새로 제작한 그의 개인 프로젝트다. 그중에서도 르자(RZA)의 [Bobby Digital In Stereo]와 고스트페이스 킬라(Ghostface Killah)의 [Ironman]은 블루노트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즈자(GZA)의 [Liquid Sword]는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Soultrane]을, 우탱 클랜의 [Enter The Wu-Tang: 36 Chambers]는 티나 브룩스(Tina Brooks)의 [True Blue]와 도널드 버드(Donald Byrd)의 [Places And Spaces]의 아트 워크를 모티프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블루노트의 앨범 아트를 패러디한 작품들을 몇 개 소개해보겠다.
존 콜트레인, [Blue Train]
제이라이브(J-Live), [All Of The Above]
앤드류 힐(Andrew Hill), [Judgement!]
애트모스피어(Atmosphere), [Overcast!]
행크 모블리(Hank Mobley), [The Turnaround!]
비트너츠(The Beatnuts), [Intoxicated Demons: The EP]
프레디 허버드, [Hub-Tones]
허클베리 피(Huckleberry P), [gOld]
글 | greenplaty
글 정독하여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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