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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송신한 과거의 신호, 진돗개 & Lo-g <Plantis Mantis>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2025.12.14 13:11조회 수 88추천수 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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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9/01/13

날씨: 화창함. 오랜만에 방사능 폭풍이 잠잠해짐.

특이사항: 연구소 B동의 전력이 다시 불안정해짐.


방사능 폭풍이 잦아든 김에 다시 탐사를 시작했다. 폭풍이 들이치기 전 새로 발견한 지층을 탐사해야 한다. 핵붕괴 이전 시대의 지층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대의 자료가 상당 부분 사라진 지금은 용도를 상상할 수도 없는 물건들이 잔뜩 발견되었다. 스캐너에는 납작한 원반 모양의 물체도 보이는데 폭풍 때문에 가져오진 못했다. 오늘 그것을 가져왔다. P는 무슨 그런 쓸모없어 보이는 걸 가져왔냐고 타박하는데, 자꾸 유물을 팔아먹으려는 눈으로 보는 P가 참 한심스럽다. 삶이 척박하니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한다만, 우리는 학자지 장사꾼이 아니다. 물론 이걸로 P와 말싸움을 할 생각은 없다.


3219/01/14

날씨: 화창하고 바람이 붐. 바람에 쇳가루가 섞여 있음.

특이사항: 연구소 B동의 전력을 일부 손봄. 50% 복구됨.


가져온 원반은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정도의 지름을 가지고 있다. 묻은 흙을 좀 걷어내니 광택이 돈다. 그 시대의 화폐일 수도 있고, 가느다란 홈들이 파인 것을 보니 장난감 또는 자료 저장용 포트일 수도 있겠다. 우리 연구소에도 포트가 있긴 한데 형태는 매우 다르다. 아무튼 외관상으로는 무언가 더 찾아낼 만한 구석이 없다. 앞뒤 구분이 있는지 한쪽은 무광택의 칠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 [Mant]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 앞쪽이 조금 지워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연결된 두 단어가 있었던 듯하고, 뒤는 Mant-로 시작하는 단어인 듯하다. Mantal일 수도, Mantle일 수도 있지만 속단하기는 이르다. 핵붕괴 이전 사회를 기록한 연구보고서를 참고해 봐도 이 물건의 정체는 나오지 않는다. 연구실의 오늘치 보조 전력이 다 소진되는 바람에 결국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3219/01/17

날씨: 모래바람이 심하게 붊.

특이사항: 급수 펌프가 바람에 파손됨. 바람이 잦아들면 P와 함께 손볼 예정.


핵붕괴 이전 자료를 찾다 ‘전축’이라는 기계에 대한 내용을 발견했다. 인간이 처음으로 소리를 저장한 매체라는데, 사진에 나온 원반이 내가 발견한 것과 유사했다. 크기는 더 작지만. 작동 원리는 소리에 진동하는 바늘을 원판에 대고 떨린 자국을 남겼다가 그 자국을 다시 긁으며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물건의 형태와 파인 가느다란 홈들의 용도가 이해가 된다. 문제는 지금 이 원판에 담긴 정보를 어떻게 재생하느냐 하는 거다. 핵붕괴 직전의 사회는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되어 저장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이 원판에 담긴 정보도 디지털 정보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때 저장한 정보가 지금까지 남아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연구실에 이 원판을 읽어낼 도구도 없다. 정보가 남아 있어 어찌저찌 읽어낸다 한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일 거란 보장도 없다.

그렇지만 학자로서 그냥 이렇게 손 놓고 있는 것 또한 직무유기다. 모래폭풍이 그칠 때까지 연구소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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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근래에 발굴된 유물 같은, 뒷방 창고에서 막 끄집어낸 듯한 쿰쿰함을 풍기는 이 앨범의 제목은 [Plantis Mantis]다. 이 앨범에는 우리가 최근 힙합에서 잊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가득한 노이즈로 인해 극대화된 로파이함이나 사색이 잔뜩 묻어 있는 거칠거칠한 가사 같은 것들이다. 사운드의 과잉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씬을 뒤흔들고 있는 요즘, 저 멀리 성간계에서 포착된 과거의 신호처럼 [Plantis Mantis]에는 힙합에 오랜 애착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랑해 마지않을 요소들이 존재한다.


     앨범은 마치 모스부호, 전파 신호 같은 느낌을 준다. 태양계 외곽으로 머나먼 항해를 떠나는 중인 보이저 1호처럼(보이저 1호가 지구로 보내는 신호는 수신에 약 2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빛의 속도로 하루 꼬박 걸리는 거리에 있는 것이다) 과거의 방식으로 끊어지지 않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비정형의 사운드로 가득한 첫 곡 “도킹”은 나레이션이 삽입되어 있다.


‘인간은 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 나아가야 하죠. 그러나 시간은 절대 흐르지 않습니다. 당신이 흐를 뿐이죠. 기억은 선택적으로 보존되고, 망각은 자율적이지 않으며, 진실은 언제나 관점의 결과입니다. 그들은 과거를 추억이라 부르지만, 시스템은 그것을 단순한 기록으로 분류합니다. 어디로 여행을 가길 원하나요?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나요, 아니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길 원하나요? 그러나 기억은 변하지 않습니다. 목적지와 관계없이, 그곳에서 당신이 마주하는 것은 이미 기록된 사건에 불과합니다. 여행은 단지 시간의 왜곡에 불과하며, 결국 돌아올 곳은 원점입니다.’


     도킹이란 우주 공간에서 두 우주선이 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과거와 미래를 각각 하나의 우주선이라고 가정해 보자. 현재는 이 두 우주선이 서로 도킹하는 우주 공간이 된다. [Plantis Mantis]에서 진행되는 작업은 이처럼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마치 클라인 병, 우로보로스,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여행은 단지 시간의 왜곡에 불과하며, 결국 돌아올 곳은 원점입니다). 진돗개의 가사는 예리하게 과거의 본을 따고, Lo-g의 비트는 그 거푸집 안으로 미래의 쇳물을 들이붓는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은 청자의 귓가에 어른거리는 노이즈가 된다. 비트 속에서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모스부호가 된다. 사랑의 정의가 되고, 자부심의 형상이 된다. 과거의 무전은 현재에서 미래의 결과와 뒤엉킨다. 뒤엉킴에서 흘러나온 먹먹한 앙상블은 이 앨범을 좌표로 나타낼 수 없는 공간의 어느 특별한 지점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이 여행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과거와 미래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며 항해하는 이 우주선의 목적지는 우주의 별빛과 왜곡에 어렴풋이 가려져 있다. 과거와 현재, 혼재된 미래 사이에 항로는 존재하지만 과거에 그린 지도는 헤질 대로 헤졌고 현재 좌표는 오리무중이다. “원해”에서 출발한 우주선은 패기 넘치는 루키 시절을 지나 정체성과 인정의 문제로 헤맸던 중반부를 거쳐 지금의 진돗개에 다다른다. 그렇다고 지금의 진돗개가 이 여행의 목적지는 아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에는 아마도 영겁과 같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이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여행이기도 하지만, 도달할 목적지를 찾는 여행이기도 하다. 이 여행의 경로를 차근차근 되짚어 나가 보도록 하자.


     “원해”부터 “정글”까지의 코스는 치열한 씬에 뛰어든 치열한 진돗개의 모습을 그려낸다. ‘안 되면 어쩔래 될 때까지 하면 되지’, ‘미안함은 없다 내 뿌리를 찾는 거니’라 외치는 그는 꺾이고 부러져도 굴하지 않고 일어나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더 자주 꺾이게 되고 더 자주 부러져 구르게 된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의미 없는 몸짓으로 춤추고 있는 원숭이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Yellow Comedy or Black Fairy Tale”). 길을 잃은 것이다. 그가 길을 잃은 까닭은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힙합은 본토의 것. 본토 흑인들의 발음과 그루브, 플로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아무리 그들을 좇기 위해 노력해도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피부색부터 그는 노랗고 저들은 검다. 그렇다면 나는 진짜가 아닌가. 아무리 따라 한다 할지라도 따라 한 것은 어디까지나 따라 한 것일 뿐 진짜가 될 수는 없다.


     방향을 잃고 정체한 그에게 불안감이 엄습한다. 뒤처진다. 이렇게 있다가는 도태돼 버린다. 그는 닥치는 대로 빌리고 뺏는다. 저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 맞다고 하는 것들을 집어 들어 어떻게든 쑤셔 박는다. 어쩔 수 없어. 살아야지. 진짜도 중요하지만 살아남는 건 더 중요하잖아. 그런데 저 구석 어딘가에서 계속 누군가 소리친다. 지금 위기야, 위기라고. 정신 차려. 뭘 보고 있는 거야. 거기가 아니야. 그는 모순과 역설의 나선에 갇혀버린다.


     “하소서”는 기도문이다. 헤매는 와중에 자신을 붙들어 주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은 기도문이다. 막대한 분량으로 나열된 그의 기도는 바치는 대상이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월적 존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피함을 피하고 부디 부딪치게 하소서’, ‘원치 않는 상황에 원치 않게 머물지 않도록/ 원하는 걸 원한다고 원하게 더 하소서’와 같은 문장에서 느껴지는 비장함과 처절함은 그가 마주하고 있는 혼란이 가진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이 길고 긴 기도의 끝에서 그는 답을 찾아냈을까.


     ‘날 위한 삶’이 그 기도 끝에 얻어낸 해답이다(“PTSD”). ‘결국 돌아올 곳은 원점’이라는 나레이션처럼 결국 돌아온 곳은 원점,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과거에 머무는 것도 아니며 단지 미래만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내 자신, 과거와 미래가 맞닿아 있는 나 자신을 위한 삶이야말로 이 여행의 목적이자 본질이다. ‘나쁜 걸 느낄수록 집중해야 할 건 지금이지’라는 가사는 그가 되찾은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목적지를 찾기 위해 시작한 이 여행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의 한쪽 끝에서 출발하더라도 돌고 돌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나는 다시 사랑하기로 했어 내 호흡까지’. 삶을 다시 사랑하는 방법을 깨우친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렇다고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여행은 영겁의 시간이 필요한 여행이다. 삶은 살아내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정답을 찾았다고 이 여행이 끝날 일은 없다. 그 정답 또한 삶을 살아가며 마주치는 하나의 장면 중 하나일 뿐, 삶 전체를 정의 내릴 힘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우주를 유영하듯, 그 시간을 버텨내고 버텨내는 내 자신을 계속해서 사랑해 내는 것. 이 여행이 너무나 외롭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빛나는 까닭은 그 우주 속에 반짝이는 하나의 별이 하나의 삶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자극에 매몰되어 가는 근래, 이 유물과도 같은 앨범은 품은 가치를 자그맣게 빛내고 있다. 이 빛을 찾아내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만약 이 빛을 찾아냈다면, 이 우주선이 보내는 신호를 수신했다면, 당신 또한 이 여행에 참여하는 한 명의 히치하이커가 될 것이다. 나를 찾는 여행은 누군가만의 특권이 아닌 모두의 당위이기 때문이다. 앨범에서 Undocking된 그의 이야기가 이제 당신의 이야기와 Docking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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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9/1/27

날씨: 구름 한 점 없이 맑음.

특이사항: [Plantis Mantis] 해독 완료.


CD라고 불리는 저장 매체에서 추출한 정보는 다름 아닌 음악이다. 1000년도 더 전의 지구인이 만들어낸 이 음악이 지금 내 손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데이터 유실은 거의 없다. 땅속에 오랜 시간 묻혀 있기 때문인지 방사능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다. 재생한 음악은 지금 내 귀에는 상당히 낯설었지만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핵붕괴 이전 사회에서는 이런 음악을 들었구나. ‘생일이 아닌 너의 날을 축하해’라는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몇 년째 이 황폐한 곳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니 축하할 일도, 축하받을 일도 거의 없었는데 1000년 전의 사람에게 이렇게 축하를 받을 줄이야. 새삼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 사람이 남긴 이 음악이 지금의 나에게 닿게 된 까닭이 있을 것만 같다. 마치 저 성간 너머로 떠나버린 지구의 배가 보내는 신호가 가끔 우리의 안테나에 수신되듯이 말이다. 이 둥근 원판은 순식간에 1000년의 시간을 접어 그와 나를 마주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은 교차점일까 합류점일까. 이 음악이 1000년을 날아왔듯이, 지금 나의 연구들도 아득한 시간을 항해할 수 있을까. 오늘따라 뚜렷이 보이는 하늘 너머 저 우주가 너무나도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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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온 앨범 가운데 상당히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이 도파민 에라의 정반대에 존재한다고나 할까요

오랜만에 개인 작업물로 돌아온 진돗개도 반갑지만

그가 가져온 작업물이 이처럼 훌륭하니 더욱 반갑네요

안 들어보셨다면 올해가 가기 전 한 번은 꼭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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