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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2013년 5월 31일 발매된 <절충 (折衝) 3 : 불한당들의 진입과 전투 Part. 1>과 2013년 6월 14일 발매된 <절충 (折衝) 3 : 불한당들의 진입과 전투 Part. 2>를 동시에 리뷰하는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돌이켜보면 한국 힙합에서 주기적으로 컴필레이션 앨범이 흥했던 시절이 있었다. 2000년대에는 초기 한국 힙합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던 PC 통신을 토대로 <대한민국> 컴필레이션 연작들이 인기를 모았고, 오프라인에서 한국 힙합을 주도하였던 마스터 플랜 역시 해마다 컴필레이션을 내놓았다. 이후 신의의지, 소울 컴퍼니 등의 레이블이 성장하며 이들도 제각기 자신들만의 단체 앨범을 발매하였다. 스나이퍼 사운드의 <One Nation> 이후로 한동안 잠잠했던 한국 힙합의 컴필레이션 프로젝트들은 2010년대의 격변을 거치며 다시금 절호조를 맞게 된다. 소울 컴퍼니 등의 과거의 레이블들이 사장되고 그 자리를 하이라이트 레코즈, 일리네어 레코즈, 저스트 뮤직이 채워가며 발매된 주옥같은 컴필레이션들 - <HI-LIFE>, <Orca-Tape>, <11 : 11> , <파급효과 (Ripple Effect)> - 은 그 자체로도 사운드와 주제에서의 혁신으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당시 거대 자본이 힙합 씬에 침투하며 생긴 하입을 일리네어와 저스트 뮤직이 영리하게 이용하며 덩달아 이들의 컴필레이션까지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순간은 2010년대 한국 힙합 붐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의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격변기의 한복판에서, 지난날의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가리온과 DJ 스킵을 중심으로 결성된 불한당 크루는 그 라인업 만으로도 한국 힙합의 올드팬들을 열광시키기 충분했다. 무브먼트 출신의 숙장인 션이슬로우, 한동안 씬을 떠났다가 다시 막 돌아올 채비를 하던 피타입이 뜻을 함께하였고, 이들이 또다시 주변의 베테랑들을 끌어들였다. 노이즈 맙으로서 왕성히 활동하던 마이노스와 라임어택 같은 현역 MC들은 물론, 대팔, 부산 로컬 씬의 두사람 - 팀명은 '두사람'이나 3인조 그룹이다. - 등 업종 변경, 혹은 생업 문제로 인해 잦은 활약이 어려웠던 이들까지 규합된 데다, 킵루츠, 아티샨 비츠, 패시네이팅, 더 지 등 검증된 프로듀서 OG들, 아트워크 디자이너 제이 케이와 공연 기획가 에이제이까지 합류한 불한당의 진용은 자못 장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옵티컬 아이즈 XL과 넋업샨까지 추가로 공개되며 크루의 최종적인 편성이 완성되게 된다. 플레이어들 각각을 따져봐도 그 커리어와 영향력이 상당했던 사람들의 집합체였으니, '한국 힙합의 과거와 현재를 증명하는 이들'이라는 힙합엘이 인터뷰의 소개 문구는 결코 과장이라 할 수 없었다.
불한당은 2000년대의 여러 컴필레이션 프로젝트 중에서도 레코드 숍 AT431, 레이블 한량사를 거쳐 이어졌던 <절충 (折衝) Project>에 주목하였다. 마침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DJ 스킵과 MC 메타가 불한당 결성에 있어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만큼 이들에게는 명분 또한 충분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절충 (折衝) 3 : 불한당들의 진입과 전투>(이하 <절충 3>) 역시 전작들의 언더그라운드 지향적이고 또 동시에 추상적인 기조를 이어간다. 다만, 전작들에서는 이러한 기조가 DJ 스킵을 필두로 DJ 주스, DJ 손 등의 저명한 DJ들, 혹은 더 지, 크리티컬 피와 같은 아날로그적인 프로듀서들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났다면, 본 앨범은 이를 소프트웨어-하드웨어 양면으로 세분화하여 파고든 모양새이다.
소프트웨어적인 부분, 즉 '실험성'에서 유독 과감한 부분이 엿보인다. 마칭 드럼과 보이스 샘플, 베이스 등 최소한의 구성으로 원시적인 강렬함을 선사하는 '진입과 전투'는 아티산 비츠가 사탄(Saatan) 시절에 추구하던 날카로움과 어두움의 2010년대 식 리뉴얼이라 해도 좋을 것이며, 이전의 <절충 (折衝) Project>의 훵키함을 책임지던 더 지로 하여금 전작 수록곡의 후속곡인 "하몽 (Part. 2)"에 덥스텝을 가져오게 한 부분 역시 MC 메타다운 과감한 시도라 할 수 있다. 특히, 앨범 프로덕션을 절반 가까이 책임진 킵루츠가 이러한 실험성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가령, "Beam"에서의 전자적이고 팝적인 터치에는 그 간 은지원을 비롯한 주류 아티스트들과도 자주 교류해온 경험치가 묻어난다. 이러한 경향을 보다 락에 가까운 형태로 어레인지 한 뒤 유연한 변주를 곁들이면 "혀를 파지"와 같은 킬링 트랙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본 앨범에서 킵루츠의 음악적 도전이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은 단연 "불한당가"이다. 국악에서 따온 드럼 룹과 판소리 <적벽가>에서 가져온 샘플링, 후반의 변주에 가미되는 극적인 피아노와 블루지한 기타 솔로까지 자칫 난해해 뵈는 조합을 가장 역동적인 형태로 재조합하는 솜씨는 가히 웅혼하다 할 것이다. 8분이 넘어가는 대규모 단체곡을 동일한 붐뱁 룹에 기반한 변주를 거쳐 끌고 가는 옵티컬 아이즈 XL이 그 사이에서 단 한 곡만으로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물론, 이들의 전작들에서 떠오르는, 고전적인 작법도 앨범에 분명하다. 킵루츠가 피타입을 위해 소울 샘플과 뚜렷한 정박의 이스트 코스트 넘버 "불한당's oblige"를 선사하였고, 아티샨 비츠도 화끈하고 유쾌한 붐뱁("Real Talk")부터 깔끔하고 부드러운 네오 소울("해넘이")까지 샘플링을 토대로 두루 오가는 솜씨가 지난날에서 조금도 틀어짐이 없다. 패시네이팅(舊 MC 성천)의 재지한 프로덕션까지 더해지니 앨범의 사운드적인 벡터는 자연스레 현재로부터 과거를 향하게 된다. 옛 적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리를 그러모아 만들어낸 결과물인 만큼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나, 이를 구현함에 있어 실험적 소프트웨어와 고전적 하드웨어를 택한다는 과감한 선택지는 노장들의 숙련미에 힘입어 당당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옛 적의 아날로그함은, 이들이 비롯된 시절에서 온, 결코 부정할 수 없고 그리 해서도 안될 흔적이라는 필자만의 해석을 조심스레 적어본다.
전술한 실험성과 더불어, 후반부에 더해지는 과거 지향성까지 이를 아우르는 플레이어들의 퍼포먼스는 앨범의 올드스쿨한 하드웨어를 더욱 확고히 한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앨범을 종횡하며 빼어난 타격감과 워드 플레이를 새겨내는 노이즈 맙의 두 명이다. 라임어택이 "혀를 파지"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슬램부터 마이노스 특유의 워드 플레이, 그리고 "Real Talk"에서의 랩 티키타카에 이르기까지 이 둘은 앨범 내내 붙어 다니며 한창 물오른 역량을 과시한다. 크루 결성을 주도한 가리온 역시 이에 질세라 유연함과 심플함을 오가며 곡의 감정적인 부분을 채워나간다. MC 메타가 앨범에서 비장미가 요구되는 순간마다 등장해서 거친 톤과 곧은 랩을 때려박고, 나찰이 특유의 매끄러움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포용하며 앨범의 분위기를 잡는다. 노이즈 맙이 윙어, 가리온이 센터백 역할을 한다면, 피타입이 한 동안의 공백이 무색해질 정도로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타이트한 라이밍을 선보이며 스트라이커 역할을 꿰찬다. 이후로도 길이 회자되는 "불한당가"의 숨가쁜 텅 트위스팅 부터 "불한당's oblige"의 각오와 독기 서린 정교한 랩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절충 3>의 피타입은 그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또 동시에 건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넋업샨과 션이슬로우의 깔끔함부터 오랜만이라 더욱 반가웠던 윔피와 대팔, 앨범의 멜로우한 부분을 채워내는 소울 플라워의 채영과 샛별까지, 오래 단련된 장인들이기에 드러낼 수 있는 각자의 견고한 개성이 하나 둘 더해지며 결코 대체될 수 없을 <절충 3>만의 '고전적 실험성'의 맥락을 형성하는 모습은 2013년 한국 언더그라운드를 논함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을 한 장면이었다.
이들이 앨범에서 드러낸 관록은 이후의 활동들을 통해 가늘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A Tribe Called Next> 프로젝트를 통해 언더그라운드에서 더 성장시키고픈 이들을 지원하는가 하면 - 이 중 저스디스와 넉살은 현재 대성하여 거물이 되었다. - 여러 앨범과 콘서트에서의 잦은 교류를 통하여 자신들만의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상호 지원과 협업은 한국 힙합의 숙장들의 생명력과 동력을 한층 증폭시키는 동력이 되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한국 언더 힙합의 뿌리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언더그라운드와 작가주의 고전미에 토대를 둔 <절충 3>의 탈세대적인 실험,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이들의 고요하지만 단단한 행보는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질문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미학을 어떻게 장르 트렌드에 수용하여야 할까?' '어떻게 과거의 미학을 토대로 현재의 견고함을 갖춰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절충 3>에서의 노장들의 결연한 모습은 이 질문의 답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풀이로 기억될 것이다.
Best Track: 혀를 파지, 불한당가, 해넘이
https://drive.google.com/file/d/1I-HMcEUaOTxiT4cA81FIeR79PFlhagpJ/view
본 리뷰는 HOM#22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언더그라운드의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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