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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셜스타는 소울 컴퍼니 안에서도 제일 화려하고 다채로운 결을 지닌 래퍼였다. 특유의 차분하고 유려한 랩은 물론 탁월한 멜로디 구축 능력까지 확보한 덕분에 그는 서던 힙합, 오토튠 등 당대의 트렌드도 능숙히 수용해 내며 안정적인 커리어를 영위해냈다. 잠시 러브 송으로 대표되는 대중 지향적 방향으로 키를 돌린 적도 있었지만, 경험이 쌓이며 팝적인 취향과 작가주의를 영리하게 융화시키는 방법에 도통하게 되었다. 특히 <Maze Garden>에서의 크루셜스타는 혼란과 불안 너머의 희망을 예의 서정적인 결로 풀어내며 리스너들의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HERON>은 위의 모든 특징을 크루셜스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 탁월히 발휘해낸 작품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방향까지 두루 관통해낸 끝에, 크루셜스타는 자신이 지닌 다방면의 재능과 짙은 서사성까지 빼어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앨범의 크레딧을 보다 보면 크게 두 측면에서 놀라게 된다. 첫째는 앨범의 60%가량이 타입 비트로 되어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로 인해 언뜻 어설프게 비칠 수도 있는 구성이었음에도 프로덕션의 배치가 높은 수준의 유기성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특히 전반부의 다채로운 구성에 힘입어 앨범은 상당한 수준의 흡입력을 갖추게 되었다. 웨스트사이드 건(Westside Gunn)의 실험성("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To. Hayao Miyazaki)")부터 래리 준(Larry Jun)과 커렌시(Curren$y)로 대표되는 서부-남부의 끈적함("차고 딸린 집", "DROPTOP")에 이르기까지, 북미 언더그라운드 씬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엮어내는 솜씨는 역시 원숙함의 그것이다. 그 사이로 가가멜, SEIN 등 기존에 크루셜스타와 작업한 경험이 있는 프로듀서들이 재지한 결을 채워내며 앨범의 사운드적 유기성을 만족시킨다. 이 재지한 흐름은 앨범 후반부의 일관성으로도 그대로 이어진다. "368-11"과 "초인"은 단정한 재즈 샘플 운용에 힘입어 프레디 카소의 커리어에서 가장 스탠더드한 곡으로 완성되었고, 이외에도 피아노와 금관악기, 색소폰과 스트링의 향연이 이어지며 크루셜스타가 천명해 내는 참된 자신으로의 여정을 따스히 끌어안는다. 다양성에서 일관성으로 향하는 앨범의 구성을 지탱하는 것은 역시 크루셜스타의 탁월함과 다재다능함이다. 트랩("인생 2회차인 것처럼")과 익스페리멘탈 힙합("HERON") 위에서의 고도의 타이트함부터 붐뱁 프로덕션 위에서의 유려한 그루브, "난파선"과 "Guardian Angel" 등에서 드러나는 은은한 보컬에 이르기까지, 그의 원숙한 퍼포먼스는 앨범이 보여주는 일련의 흐름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세심하게 짜인 프로덕션적 다양성 하에서 정돈된 퍼포먼스가 하드웨어의 기둥이 되었다면, 앨범의 소프트웨어는 자아와 소신에 대한 깊은 탐구의 여정으로 나아간다.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초심으로 떠난 여정이 앨범 내내 계속된다. 물론 순탄하기만 한 여정은 아니다. 견고한 의지로 헤쳐내려 하여도, '왜가리'로 대표되는 내면의 메신저에 귀를 기울여 보아도 자동차니 시계니 하는 세속적 번뇌에는 어쩔 수 없이 흔들리게 된다. 이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옛 형제들과의 여전히 끈끈한 유대이다. 지난날의 겉치레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고, 가족과 연인에 대한 진한 사랑이다. 이런 굳건한 마음과 감정이 있기에 크루셜스타는 자신있게 소싯적의 초심과 낭만을, 또한 세간의 시선에 눈치 보지 않는 소신있는 태도를 말할 수 있다. 그가 초인으로서 우리에게 전하는 지혜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들이나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와 같은 고전들의 레퍼런스로, 또한 여러 사회 이슈와 크루셜스타의 눈으로 본 한국 힙합의 현실과 같은 대내외적인 상황을 거쳐 깊이와 무르익음을 드러내게 된다. 베테랑으로서의 여유와 탄력, 그리고 그간의 작업물에도 깊이 밴 서정성과 문학성이 한 줄기로 흐르고 있기에 상술된 높은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전에도 보컬과의 합에서 좋은 평을 얻었던 크루셜스타인 만큼 본작에도 보컬 게스트의 비중이 상당한 편이다. 정인, 트웰브 등 경험이 충만한 이름들부터 말리타부, Jade, JEMINN 등 조금 낮선 이름들까지, <HERON>의 여러 보컬들은 앨범이 요구하는 감정적, 서사적 흐름을 청각적으로 설득해 내는데 무엇보다 충실하다. "마음병"의 아날로그한 사운드와 가족애를 부드럽게 파고드는 정인의 음색이라거나, 섬세한 톤으로 도입부터 앨범이 지향하는 초심에 집중력을 부여하는 Jade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앨범의 보컬들이 <HERON>의 감정적인 부분에 유기성을 부여해 주는 역할이라면, 그 유기성 위로 더해지는 진정성을 채워주는 것은 MC들의 몫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게스트들과의 호흡이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에 데뷔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회한에 젖는 언오피셜보이, 오랜만에 기름기를 싹 걷은 담백한 퍼포먼스로 당당함을 빛내는 스윙스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리스너들에게 있어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368-11"일 것 같다. 매드클라운부터 화나, 라임어택과 마이노스, 그리고 키비와 더 콰이엇, DJ 웨건에 이르는 소울 컴퍼니의 옛 동료들이 갑자기 등장하여 말하는 지난날과 지금의 이야기는 추억들을 거름삼아 미래로 나아가려는 아련함과 결심이 느껴져 회고를 넘어서는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정석에 가까운 라파엘과 부현석부터 변칙과 실험성의 하이엔드에 위치한 공공구에 이르는 언더그라운드 MC들을 두루 포용해내었다는 지점은 크루셜스타라는 아티스트가 지닌 그릇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두루 오가는 여러 협업들이 앨범의 자아성찰적인 서사와도 일맥상통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HERON>이 지닌 의외의 오락적인 부분을 증폭시킨다.
<HERON>에는 크루셜스타의 영리함이 두루 배어있다. 콜라주하듯 비트들을 수집하여 모은 앨범의 구조는 믹스테이프의 자유도를 지향하나, 이를 뚜렷한 주제의식과 서사,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채워줄 게스트들을 통해 '정규 앨범'이라는 형식에 걸맞은 형태로 엮어냈다. 자칫 잘못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치는 악수가 될 수 있음에도 조용히 쌓인 크루셜스타의 구력은 그 위험을 절묘히 넘어서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이러한 쟈유분방한 듯 일관적인 여정의 끝에 도달하는 지혜가 중요하다. 사람이라서 세속적인 무언가에, 혹은 외부의 압박에 밀려 흔들리고 처지더라도, 치열한 성찰과 유대, 사랑을 통해 스스로에게 도달하는 여정의 끝에 우리는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방향으로 깊이 내려가는 이 여정을 지켜보는 한국 힙합의 일원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여기에서 용기를 얻고 꿈에 대한 동력을 가지게 된다. 숱한 방황을 거쳐 나답게, 우리답게 살아가겠노라는 다짐 덕분일까, 형식을 넘어서는 감동이 절절히 와닿았던 작품이었다. 더군다나 형식적으로도 상당한 재미를 갖추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있겠는가.
Best Track : 인생 2회차인 것처럼 (feat. twlv), 368-11, 2009 (feat. unofficialboyy)
https://drive.google.com/file/d/18DhKYARQZC5MjdVwITBypcynvH4Tdq94
본 리뷰는 HOM#18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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