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개미.
QM에 대한 기억은 전무하다. 동국대학교에 출품한 문예창작시 한 편. 딩고 프리스타일의 영상. 랩 네임의 유래. 저스디스와의 비프. 킬링벌스에서 일침으로 뱉은 블랙핑크 구절. 피처링 명단 속 비비와 화지. 이현준의 피처링을 듣고자 찾아간 <HANNAH>의 트랙 “중앙차선”과 “보석집”.
그 기억은 동시에 꽤 산포적이다. 건강 이야기로 우스꽝스럽게 놀려대는 어느 댓글. 과거 사진과의 괴리를 담은 영상. 즐겨하는 비디오게임 장비의 가격. 쇼미더머니에서의 활약상. 나무위키 문서. 그 외 잡다한 몇 종류의 펀치라인들과 찰나의 스파크들까지.
본인이 바라지 않았겠지만 그를 1분짜리 쇼츠처럼 소비해왔다. 아니. 소비라는 단어조차 실례일 수 있겠다. 스치듯 접하고 스치듯 잊는. QM이 래퍼란 사실은 딱히 안중에 없었다. 그의 리릭시즘, 삶에 대한 가치관, 라이프스타일, 주제의식, 겨냥하는 목표와 아티스트로서의 종착지, 그 외 기타 등등. 곁다리 정보가 많은들 별 의미가 없었다. 정작 내실은 촉촉한 살코기 따위 없이 질퍽한 양념으로 범벅인, 쉽사리 기억에서 휘발했을 시시콜콜한 군것질거리들 뿐이었다.
그의 신보 소식이 아니었다면. 소수 인원을 토크 콘서트에 초청하겠다는 소식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개미>의 재생 버튼을 누르는 일, 이 리뷰가 탄생하는 일 모두 탄생조차 하지 않았겠다. 그러니 이 글은 일차적으로 QM의 앨범 <개미>의 리뷰를 표방하지만, 입체적으로는 <개미>의 발매로 성사된 QM의 첫 감상을 녹여낸 글이다. 때문에 이 서문은 배경지식과 애정이 다수 생략된 본글을 부디 귀엽게 봐주십사 방패로 깔고 가는 머리말이 되겠다.
#1. 미물.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감상하는 인구의 유동. 무리의 덩치, 대화 소재, 걸음걸이, 제각기 주파수를 내는 또각임. 모두 무작위적이다. 그 발디딤들 아래 개미 한 마리가 스키드 마크에 짓이겨질 때, 걸음을 옮겨달라는 이야기는 개미와 함께 밟혀버리는 오지랖 취급이 된다.
개미만큼 흔한 메타포를 찾긴 어렵다. 그래서인가. 초두 효과와 최신 효과의 상반성이 그렇듯 QM에게 처음 놀라움을 느낀 지점이다. ‘HANNAH’의 의미, ‘돈숨’의 의미, 가재미와 보행사의 의미를 검색하던 참이었기에 충분한 의외성이었다. 갈래가 많지만 주로 약자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그 곤충. 밟으면 꿈틀대는 지렁이의 베스트 프렌드. 증권거래소의 그래프에 감정의 등락을 위탁한 개미떼. 여러 방식으로 탈바꿈될지언정 개미는 예나 지금이나 아이코닉한 상징성을 지닌 심볼이었다. 그 익숙함 덕에 진입 전부터 앨범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꿰뚫어볼 수 있을 듯한 관성에 휩쓸렸다.
QM의 각본은 <Was>. <HANNAH>, <돈숨>으로 이어져 <개미>로 연장된다- 직접 감상하진 않았지만, 인스타그램의 소식들을 읽으며 <개미>가 그의 전작들과 이루는 짙은 연결성을 얕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때문에 돈을 부르짖는 어느 개인의 이야기로 유추할 때 <개미>의 화자는 기승전결의 말미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되었다. 트랙 초반엔 잠시 “금”과 “Bust Down” 등으로 돈에 대한 이야기를 던지지만, 신물이 나듯 환멸감을 느끼는 태도에 이어 QM이 주의를 돌리는 흐름에 따라 돈이란 주제는 금세 조타를 빼앗긴다. 대신 QM은 시점을 옮겨다니며 과거로 가기도(“개미굴”), 지금을 보기도(“개미”, “나이롱”), 다짐을 하기도 한다(“Slow horses”).
당연하게도 이야기의 주제는 화자의 위치가 변하며 자연스레 옮겨가는 법이다. 빈지노가 더 이상 청춘을 노래하지 않고, 하온이 더 이상 명상을 전도하지 않듯, QM도 돈에 목을 매던 시절을 떠나 과하게 집착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그의 벌이는 이제 부족하지 않다. 발매한 앨범은 품절과 입고를 반복한다. 그를 초청하는 공연과 인터뷰가 있다. 감히 백 단위의 현찰에 코웃음을 친다. 그의 목소리를 쫓고 귀를 가져다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치 평생 개미굴을 전전하던 개미가 광활한 세상에 압도당하듯. 끝끝내 물질적 풍요에 이르지만 사회 관계와의 갈등과 심리적 불안정 상태에 놓이며 물질주의를 상실하는 과정. 이러한 서사의 전개는 그리 놀라운 선택이 아니다. 도리어 뻔하다고 생각될만큼 보편적이다. 결핍의 해소가 낳는 새로운 결핍. 무한한 욕구 충족을 갈망하는 악순환.
<개미>에 드러난 개미의 의미는 미리 짚었듯 흔하디 흔한 메타포의 일종이다. QM의 은유는 익히 쓰이는 규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없이 작고 나약한 미물의 위치. 하지만 이로는 조금 부족하다. 처음 앨범을 감상한 후 ‘개미’가 가진 의미는 그리 직선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당위적인 의문스러움이 생겨났다. 이게 진짜 QM이 생각하는 개미의 모습인가?
#2. 페로몬.
개미의 삶은 어떠한가. 상상력의 부족은 10초를 이겨내지 못한다. 육체 노동의 무게감 따위 와닿지 않는다. 누군가의 밑창에 잠들어 흙으로 사그라드는 무의미함에 무감각하다. 내 몫은 누가 덜어줄지도 모르는데.
페로몬. 개미 등의 곤충에게서 나타나는 대화 수단의 일종. 그러나 주로 외설적 의미에 집중되어 자체적인 개념의 의미가 뒤틀려진 단어. 개미라는 단어에서 페로몬이 쉽게 연상되듯 두 단어의 상관관계는 꽤 널리 알려진 보편 상식이기에, 과연 ‘개미’만큼이나 흔히 다뤄진 ‘페로몬’이 앨범에서 어떠한 도구로 활용될지는 귀추가 주목되는 지점이었다. 이를 주제로 한 단락을 얻어냈음은 괄목할만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겠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앨범을 요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지 않나 싶다. 인간들에게 통용되지 않더라도 개미를 들여다보는 앨범의 의미에 맞게, 개미를 메타포로 삼은 앨범에서 QM이 페로몬이란 단어의 기능에 시사한 바는 상상 외로 꽤 강력하다.
본 앨범에서 ‘페로몬’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한 순간은 정확히 두 번이다. 하나는 “나이롱”의 가사 중 “칼 들고 다니는 페로몬 마비된 새끼들 위험해 손 모아 가리네 목뒤”, 다른 하나는 “Just do it”의 가사 중 “개미 페로몬 쫓듯 집 돌아오던 사내”. 첫 인용의 ‘마비’란 단어는 개미들의 무분별한 교미를 끊어놓기 위한 방제 작용을 연상시킨다. 수컷과 암컷이 페로몬을 매개로 만나지 못하도록 도처에 유사한 성분의 물질들을 풀어놓아 개미들을 교란시키는 행위를 의미하며, 목적은 조절 불가한 개미의 번식을 막기 위함이다. 페로몬을 쫓는다는 표현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헨젤과 그레텔이 조약돌 혹은 빵 쪼가리를 떨어뜨렸듯, 되돌아갈 때를 위해 떠나는 길에 묻힌 흔적들을 되밟는 이미지가 쉽게 연상된다. 돌아보니 나로선 참 놀랍고 인상적인 순간이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추하고 지저분한 모습들로 도배를 칠해놓았지만, 가장 극치에 다다를 법한 단어의 순간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까.
<개미>는 분명 불쾌할만큼 적나라한 가사 표현들과 그 여파를 극대화시키는 음악적 맥시멀리즘 장치들로 한가득인 앨범이다. 성욕, 식욕, 물욕. 몸소 읊기로 욕구를 억누르거나 외부에 표출 혹은 혼자 삭혀내는 흔적들. 빗물이 고인 아스팔트를 걸으며 신발을 적시게 되듯, 질겁하게 만드는 불쾌감을 피하려 까치발을 딛어도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지뢰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하지만 그런 비꼬인 자극은 결코 페로몬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개미>의 페로몬은 본래 의미 그대로 언어 그 자체다. 사회에 만연한 메타포를 거스르는 정의다. 왜곡된 유흥과 향락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그러나 분명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은, 공감할 수 없는 요소에 창의적인 환상을 덧씌운 결과물. 마치 귀가 잘린 개미들에게도 지능이 있다면 성대의 떨림으로 소통하는 인간들에게 왜곡된 환상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은 비유. 짧은 찰나지만 앨범에 등장한 ‘페로몬’이란 단어의 쓰임새를 살피며 의미를 정의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개미>를 한 단어로 은유하자면 그 정답은 ‘페로몬’이 아닐까. 화자가 세상의 요건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단서. 받아들이는 자극이자 동시에 뱉어내는 감정과 사고의 토사물. 페로몬으로부터 얽히고설킨 본질과 괴리들은 매순간 숨겨진 이면을 내포하는 <개미>의 요소들을 대표한다.
개미의 페로몬은 누군가의 욕망을 해소하는 수단이 아닌, 그저 덧없이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소리의 다른 형태일 뿐. 페로몬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닿을 수 없는 특징은 왜곡된다. QM은 그 간극에 속았다. 물론 그간 쌓아온 노력이 완벽한 무의미에 이르진 않는다. 그가 번 돈, 시상식의 수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외적인 관심, 그 외 등등. 그들 역시 무의미하진 않으나 본질적인 그의 이상향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인간들이 흩뿌린 페로몬에 개미들이 무작정 휘둘리듯, <개미>에 드러난 허무함은 잔상을 쫓아 도착한 오아시스가 신기루였을 때 표류하는 허탈감의 산물이 아닐까.
#3. 일.
손톱 위에 얹을만한 크기의 개미. 시선을 밟으며 줄행랑의 자취를 쫓을만하다. 나뭇가지로 길을 막으면 어떻게 움직이는지. 팔다리가 끊어진 뒤엔 어떻게 되는지. 납작해진 후엔 얼마나 오래 숨이 붙어 있는지. 경로와 종착은 그리 중요하진 않다. 그건 개미에게나 중요한 일일뿐.
QM이 선사한 이 28분 가량의 영화는 지독한 혐오와 위선의 역겨움을 휘황찬란하고 곱상하게 빚어냈다. 이는 직접 의도한 바로 느껴진다. 고개를 빳빳히 처들고 휘몰아치게 뱉어대는 가사의 랩은 직접 언급하듯 불태운 연기를 피워낸다. 마치 그을린 건더기가 둥둥 떠다니는 기름내를 풍겨대는 듯하다. 단지 처음 느낀 거부감은 QM과의 첫만남부터 그의 주위에 휘몰아치는 폭풍이 과하게 느껴질 뿐이다. QM의 서사를 짚어왔다면 감상이 달라졌을까? 예열 과정 없이 곧장 삼켜낸 발암물질은 거북함과 구토감을 일으킨다. 매체로 본 그의 껍데기와 느끼는 괴리감이 이유일까. 안과 속이 뒤집힌 성게 같다.
<개미>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초반부의 세 트랙은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목숨 부지하며 건재히 살아남은 이유를 증명하고, 카코포니의 전환 전후로는 눌어붙은 프라이팬을 긁어낸 듯 시커멓게 썩어버린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다시 두 트랙 동안 생애에 쌓아온 방증들로 QM의 목소리 아래에 놓인 홍준용을 꿰뚫어본다. 목구멍에서 피맛이 끓는 20분 조금 넘는 시간이다. 과장 좀 보태서 폐소공포증을 앓을 듯한, 급히 먹어 체한 듯 속이 콱 막히는 순도 백 프로의 숨가쁜 성찰. 만약 그 무게감에 질식했다면 진정 앨범의 리뷰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강력함.
묵은 기름의 화독내가 불어닥치는 한겨울의 찬바람에 번지는 <개미>의 향기. 숨가쁘게 질주한 앨범은 9번 트랙 “개미”에 이르러서야 목도리에 졸리던 목을 느슨히 놓아줄 수 있게 되었다. 막바지에 이르는 셀프 타이틀 트랙 “개미”에 이르며 QM의 이야기는 가사의 주제처럼 비로소 주어진 ‘삶’에 다가온다. 그리고 연이은 “Slow horses”의 가라앉음을 통해 메시지의 종지부를 찍는다. 마치 일전의 모든 과정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미러볼 같은 별 장식을 꽂아넣기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앨범 외적인 단서들 중에선 <개미>의 티저 영상 그리고 앨범 커버에서 만나는 개미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머리 – 가슴 – 배로 이어지는 삼중구조. 클로즈업한 눈과 주둥아리의 이질적 자태. 웃는 얼굴을 그려넣어 미화시킨 일러스트에 너무 익숙해졌다. 그런 개미의 진짜 모습을 너무 깊이 들여다본 것일까. 마지막의 두 트랙으로 숨통을 트기 전까지, 폭발적인 묘사에 일차적으로 느낀 감정은 분명히 거부감이었다.
그의 커리어는 곧 꾸준함 그 자체다.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개최하며 대외적인 매체 활동까지 일부 겸임하는 성실한 행실. 게으른 예술가들이 만연한 상황에서 딱히 아티스트로서 지적할 건덕지가 없다. 그런 나에게 QM이란 악의적으로 편집하거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조롱 섞인 어투로 깎아낸 모습이 더 익숙했다. 타자의 시선으로 관망할 때, 그는 아무리 보아도 개미가 아닌 것 같다. 그저 직접 만들어낸 허상의 구렁텅이인 개미지목에 잠식되는 동안, 자신이 개미라고 느끼도록 억지로 강요하고 세뇌시켰을 뿐.
#4. 자격.
개미의 역할은 차별적이다. 일개미, 수개미, 여왕개미의 일생일대가 제각기로 나뉘듯. 하지만 이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명명되지 않은 계층은 간혹 더 잔혹하게 들리곤 한다. 암묵적이기에 더욱 갈피를 잡기 어려운 법.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 누구도 티를 내지 않는다.
청취한 적도 없는 전작 <돈숨>이 제목부터 엿볼 수 있는 노골적인 지향점을 드러냈다면, <개미>의 메시지는 좀 더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다. 컨셔스는 필히 가난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따위의 의견처럼 골머리가 출타한 사고회로에 갇힌 적은 없으나, 흔히 애용되는 돈이란 공통분모 대신 주제를 고민과 각성의 영역으로 이끌어가면 화자의 주제에 쉽사리 다가가 공감하기 어렵다. 초중반에 배치된 절반 이상의 트랙들이 감정선을 소용돌이치듯, 그 혼란스러움은 QM의 과도기를 여실히 드러낸다.
“금”, “입에총”, “Bust down”으로 이어지는 티스푼식 떠보기를 향한 노골적 반박, 그리고 증명 이후 자격을 얻고서 뱉는 조소의 서사. “나이롱”과 “개미굴”에서 치부를 까 드러내고 타인에게 호소하는 경멸의 시선. 이 절반 가량의 트랙들은 부정할 수 없는 강렬한 순간이다. 그 안에서 녹아나오는 감정은 무엇인가? 단연코 허무함 이외의 선택지가 없다.
<개미>의 QM은 틀림 없는 정신 갈등에 봉착해있다. 앨범의 단서를 미루어 짐작해보기로 그가 믿어온 목적지를 부정당하는 과정으로 생각된다. 흔해 빠진 일침들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돈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진 않는다.” 허울 좋은 소리로 여겨지는 가진 자들의 여유 내지 견제. 꼭대기를 쳐다보는 자들에게 꼭대기를 부정하는 기만질.
그래서 구멍난 공간, 특정하자면 통장의 여백을 채우면 해결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감히 예견하건데 실패의 이유는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는 공짜로 얻은 적이 없으니. 누군가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돈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잃어온 것들이 있으니. QM은 새어나오는 항아리를 틀어막기 위해 마음의 벽에 구멍을 내어 벽돌을 꺼내고 빈 자리에 기흉을 채워넣었다.
돈을 향한 집착은 보통 두 갈래로 나뉜다. 탄생부터 주어진 결핍이거나, 그 결핍이 모종의 사건으로 찰나의 순간에 탄생했거나. 부모님의 지갑에 손을 대거나 남의 자전거를 훔쳐 달아났던 비교적 흔해빠진 일화들을 읊으며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하듯, QM의 사례는 전자로 보인다. 그가 가사를 쓰고 마이크를 쥘 때까지 오랜 시간 이어진 결여감은 무엇으로 연결될까. 꾸준히 철썩이는 바닷바람에 수중 바위의 허리가 깎여나가듯 오랜 시간 개미가 갉아먹으며 깊어진 감정의 골이다. 그 골이 마천루로 뒤집히는 모습에 분노를 토하는 결과물은 꽤 합리적이다.
역시 아무래도 부의 축적이 쉽고 간편한 선망의 대상이 됨은 자연스럽다. 넓은 선택의 폭. 결여 없는 풍족함. 돈으로 사는 여유로운 시간. 하지만 주머니의 값어치가 같아도 교양 어린 품격과 경거망동의 차이는 두드러진다. 예시로는 졸부들의 거지 근성 내지 밴댕이 소갈딱지만도 못한 못돼 처먹은 심성. QM을 향한 비유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개미>에서 뿜어낸 열과 갈증은 닮을 수 없는 허상을 겨냥하는 듯하다. 지켜본 누군가를 뛰어넘었음에도 결코 맘 놓고 우월함을 과시할 수 없는 결과. 하지만 죽어야만 시간을 이길 수 있다는 그의 비관론에는 어째 저의가 숨은 듯하다. 나아가는 시간과 가까워지는 종결의 흐름 속 과연 QM이 무기력하게 포기할 것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5. 군집.
결국 그물망을 이루는 조각들 중 하나. 자유로운 삶을 외치고 방문을 뛰쳐나갈 독립 선언 이전까지. 여지 없이 속세에 얽매이고 탈출할 수 없는. 누군가는 굴복했다 말하고, 누군가는 순응했다 말하지만, 과연 진정으로 세상의 기류와 동떨어진 개미가 존재할 수 있을까?
<개미>의 특징과 개미의 특징들을 나열하고 끼워맞춘 끝에, 마침내 기피의 원류지를 찾아내기까지 이르렀다. 유리창 너머로 매스꺼움을 감상하던 중 유리의 일부가 거울로 되어있음을 느끼는 순간. 타인과 자신이 맞물리는 순간에 느낀 혐오. <개미>의 QM이 겨누는 총은 직설적이지만 종종 방아쇠를 거꾸로 달기도 한다. 이는 곧 결점에 혐오하며 같은 이유를 발견한 자신을 자책하기까지 이르고, 덧없이 차오르는 욕구는 물론 그 충동이 역량의 한도를 넘어선 순간 와닿는 상실적 패배감으로 완성된다.
저의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고 나니 그가 자해하는 모습이 단순히 혐오스럽기만 하지는 않다. 식욕과 절제의 알력 때문에 삼킨 음식을 게워내려 목구멍에 손가락을 끼워넣지만, 핏줄이 터지고 다시 태어난 기분을 만끽하듯 그로서 해소되는 감정은 길티 플레져를 연상시킬만큼 짜릿하고 폭발적이다. 오히려 곳곳에 터져나오는 노골적인 거부감은 그러한 조성을 갖추어 다가갔기에 설득력을 얻기까지에 이른다.
분명 개미는 혐오스러운 존재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는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콩고물 떨어지는 곳의 단내를 맡고 너나할 것 없이 꼬이는 벌레. 욕구에 살고 욕구에 죽는 직선적인 존재. 그토록 혐오스러워하던 개미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이 개미가 되어감을 자각하지 못할 때까지. 정말 그가 자신을 이르는 개미란 이렇지 않나. 이족보행을 하고서도 팔과 다리 사이 허리춤에 돋은 두 다리의 거취가 어색한, 사람처럼 걸어보려 해도 여섯 다리를 짚은 걸음걸이를 도통 잊지 못하는, 자가당착의 패배로 나온 자학적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이 앨범에 공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개미가 되고 싶지 않지만, 자각하지도 못한 채 개미가 되어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고민의 연속이라지만 적어도 돈 걱정은 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조언과 가르침들이 제시하는 만능물질주의의 무용론을 이해할만큼 명석하지 않은 상태다. 섣불리 배출하지 않을 뿐 팔짱 끼고 조소하는 스타디움 밖의 구경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동질감을 외면하고 불행 포르노에 배덕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행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기록을 살피니 리뷰를 작성하는 동안 30번 가까이 <개미>를 청취했다. 자칭 힙합 리스너로서 어느 아티스트 개인의 삶을 들여다본 경험이 전무하진 않으나, <개미>만큼 속이 뒤틀리는 경험을 쉽게 만나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배경지식 없이 리뷰랍시고 뱉어놓은 본문의 결함들을 마주하고 나니, 역시 작품의 해석을 위해선 아티스트의 자취를 쫓는 과정이 필수적이겠구나 싶어진다. 다만 <개미> 자체가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 앨범이란 점도 한몫하겠다. 이리 추상적으로 마무리될 이야기는 아니니 이어질 다음 작품에서 해답을 얻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두서 없는 글을 마무리한다. 개미에 대한 단서를 좀 더 찾은 뒤, 이제 <HANNAH>와 <돈숨>을 들으며 길고 길었던 감상을 엎어버릴 준비를 해야겠다.
뜬금없이 웃기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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