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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rive.google.com/file/d/1EMs8a6X_ZN3R7_J42e6ei7hcFAkxBzcN/view?usp=drivesdk
침잠해본 적이 있는가?
개인의 역사, 그것은 한 사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이야기이다. 사람이 살아온 길은 그의 행동, 말, 성격, 생각 그 모든 것을 말해준다. 역사란 크게 두 가지 형태를 지닌다. 남길 수 있는 역사와 남길 수 없는 역사다. 개인의 역사에서 남길 수 없는 역사란, 결점, 부끄러운 과거, 추악한 생각, 그릇된 행동이나 말, 약점 등 누구나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그럴싸한 표면 그 뒤에 존재하는 짙고 깊은 호수는 그 누구도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사적이면서 연약한 공간이다. 그리고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있을 수많은 잔해들은 주인이 인양하지 않는다면 밖에서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2015년의 모두를 자신의 호수 속으로 끌어들였고, 지금의 씬에는 아직도 그가 적신 물기가 남아있다. 아마도 힙합을 넘어 대한민국 음악 역사에서 클래식을 꼽아보자면 절대 빼놓을 수 없을, 영원히 마르지 않을 이 앨범은 이센스의 <The Anecdote>다.
이 앨범의 대중음악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수없이 논했고, 앞으로 더 많이 논하더라도 빛 바랠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러한 내용들에 대해서 함구할 예정이다. 곡의 장르, 사용된 소스의 질감, 유려하게 박아놓은 라임, 믹싱의 퀄리티 따위 것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이미 충분히 많이 파헤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가야 할 항로의 방향은 어디일까. 새로 조정한 나침반은 '그와 우리의 역사'라는 신기루를 가리킬 것이다.
‘꽤나 개인적인 서사가 어떻게 대중의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서사가 있으므로 똑같은 경험을 한 경우는 극히 드물 텐데, 매우 사적인 어떤 작품들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예술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비슷한 경험에서부터 공감이 비롯된다면 몇몇에게 공감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여겨진다. 그러나 그 범위가 ‘대중’이라 일컬어질 정도까지 확장된다면 분명 이는 공통의 경험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란 과연 무엇인가. 맹점은 ‘공감은 경험에서 온다’라는 명제에 있었다. 공감은 경험에서만 오지 않는다. 공감은 경험을 포함한 상상에서 온다. 물론 직접 경험은 공감을 강화한다. 그러나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감상자는 예술 작품을 접하며 감각적으로 집중하게 되고, 그러면서 창작자가 제공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상상력으로 기워내어 자신만의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새로운 간접 경험은 곧 공감의 감정을 자아내고 거기서 청자는 더 깊은 몰입을 체험하게 된다. 몰입과 공감의 반복적인 순환은 감상자의 정서를 증폭시키고 그 사이에서 개인의 서사는 대중성이라는 큰 힘을 얻게 된다. 즉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의 상상력에서 촉발한 몰입이 개인의 서사에 대중성을 부여한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The Anecdote>는 청자를 몰입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완벽에 가까운 형태를 가지고 있다.
<The Anecdote>의 이야기는 ‘인간 강민호’라고 하는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나선형의 경로를 그리며 빨려 들어간다. 이센스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멈춘 장면들이 점점이 이어지며 청자를 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함께 침잠하도록 만든다. 사실 이 앨범에 스토리텔링 수준의 서사적 유기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이 앨범이 제목과도 맞닿아있다시피 그의 개인적 일화들을 갈무리해놓은 구성이기 때문이다. 앨범의 이야기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념이 뒤죽박죽 얽혀있다. 중학교 시절 장래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던 순간(“주사위”)에서 출발한 앨범은 중간중간 몇 가지 고까운 생각들을 거쳐가며 가사를 쓰고 있는 현재(“Writer’s Block”), 생애 처음으로 맛본 영광의 순간(“Next Level”) 그리고 1996년의 그 날(“The Anecdote”)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Back In Time”)까지 이어진다. 이런 구성은 마치 이센스가 바로 앞에 앉아 자분자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은 감흥을 준다. 정해진 순서 없이 떠오르는 대로 내뱉는 이야기들은 미묘한 인력으로 우리를 점점 끌어당긴다. 이야기는 점점 깊어지고 점점 진해진다. 그렇게 이센스가 들려주던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청자는 그의 호숫가 앞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종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우리는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The Anecdote”. 가라앉은 호수 밑바닥에서 우리는 인간 강민호의 기원을 마주한다. 어딘가 심사가 뒤틀렸지만 그래도 지나치리만큼 솔직한 한 인간의 과거와 생각들을 두서없이 듣던 우리는, 그가 이런 인간으로 자라게 된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갑작스레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둥 떨어지는 건반과 함께 ‘1996년 아버지를 잃은 아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곡은 심해와도 같은 온도와 압력으로 우리를 가둬버린다. 그렇게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두 눈을 뜬 채로 그의 오래된 슬픔을 지켜봐야만 한다. 아버지의 죽음, 그로 인한 그리움과 아픔, 가족이 겪은 상처와 상실감은 그가 느끼고 기억하는 형태 그대로 청자에게 흘러 들어온다. 이미지와 소리, 냄새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의 역사는 청자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점차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역사가 되어간다. 소중한 것을 잃었던 경험, 상처를 들키기 싫어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힌 경험, 상처를 극복한 것처럼 의연하게 굴었던 경험 등 이센스의 내면에서 우리는 자신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본다. <The Anecdote>라는 앨범의 고유한 가치는 개인의 서사가 듣는 모든 이의 서사로 전환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온다. 아마도 앞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을, 쌓이고 쌓인 슬픔을 태워 만들어낸 빛나는 가치 말이다.
개인의 역사, 그것은 한 사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인간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넓으면서도 깊은, 체온을 지닌 이야기이다. 이센스와 함께 그의 내면에 침잠해본 우리는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하나 가지게 된 셈이다. 남길 수 없는 역사는 외면해야 하는 역사가 아니다. 모두에게 알릴 역사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 한 명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역사다. 자신마저도 그 역사를 외면하고 잊어버린다면 그 깊은 호수는 밑바닥에서부터 썩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부패는 곧 호수의 바깥으로 퍼져 나갈 것이고 머지않아 결국엔 병을 만들게 된다. <The Anecdote>가 지닌 가치란, 그 밑바닥에 다른 이를 함께 끌고 들어감으로써 그의 역사를 발견하도록 해주고, 역사에서 눈 돌리지 않도록,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과정이다. 고통의 공유를 통한 치유, 이것이 <The Anecdote>를 듣는 행위의 의의이자 당신이 <The Anecdote>를 들어야 할 이유이다.
처음으로 리뷰를 정독해서 읽었는데 절대 후회는 안할 것 같습니다 이지리스닝으로만 듣던 애넥도트의 진면모를 알 수 있는 글인거 같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정성껏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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