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
그 돈으로 만든 섬에 갇힌 건 아마도
너와 나
/ 다시 섬 中
현재 우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시스템이 우릴 옥죄더라도, 그대로 그 속에서.
큰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우린 꽤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을 돈을 좇으며 살게 될 것이다. 돈은 단순한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목적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돈 얘기는 필연적이다.
힙합씬은 쇼미더머니 전후로 크게 달라졌다. 물론 난 그 전엔 힙합을 듣지 않았고, 어렸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한다. 정정하자면, 달라졌다고들 한다. 어느 예술이든 먹고 살기 힘든 것은 비슷하지만 힙합은 유독 ‘돈 안 되는 장르’ 였던 듯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힙합 트랙이 음원 사이트 상위권에 오르고, 길을 지나다녀도,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심심찮게 들리는 장르가 됐다. (여담이지만, 내가 다니는 미용실엔 힙합 매니아가 없지만 힙합 곡만 나온다.) 그렇게 돈을 벌어 “Flex"를 외치며 돈 자랑을 하는 아티스트가 있는 반면, 반대쪽엔 아직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아티스트들이 있다.
팬 입장에서 바라본 QM은 쇼미더머니를 나갈까, 매번 고민하면서도 결국 앨범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래퍼인 듯 하다. 본인은 신념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어디선가는 신념이 바뀌지 않은 래퍼로 그를 꼽는 것처럼. 2년 만에 [돈숨]이라는 정규 앨범을 들고 왔다. 제목만 들어도 돈 얘기다.
*
01. 은
비트 드랍 이후 쏟아져 나오는 랩 이전에, 가사장엔 없는 가사가 있다.
아빠의 조금 이른 퇴직이 가져다 준 건
엄마의 알바몬 아이디와 동생의 4대 보험
내 눈칫밥은 과연 누굴 배부르게 한 건지
얘기해보려 해 이제부터 내 모험
[HANNAH]의 1번 트랙 ‘애꾸’의 도입부이자 훅 부분이다. 전작을 들은 사람이라면 반가울 것이다. 그리고 전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로 결말 부분을 시작한다. 이것을 노렸을진 알 수 없지만, 이번 앨범의 첫 마디가 폐부를 찌른다.
할머니 장례식 10년 만에 네 가족 앉는 식탁
아버지는 말하셨지 나는 이제 고아
조심스럽긴 하지만, 한나와 돈숨 그 사이 ‘엄마’까지 잃으신 아버지에게 청자로서 연민을 느낀다. 이 곡의 작사가이자 아버지의 아들인 홍준용은 더한 연민을 느낀 것 같다. HANNAH를 낼 때완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가족을 향한 사랑만은 여전하다던 QM의 말이 떠오른다.
나 빼고 모두 북극 사나 다들 보는 얼음
영세 래퍼들은 부자 래퍼들을 까고
진짜 소릴 듣지 나는 이제 안 해 영세
깨끗이 내 독 땜에 색 변한 은 체인
왕들은 독살을 방지하기 위해 은수저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은수저에 독이 닿으면 색이 변하기 때문이다. QM은 자신의 속에 쌓인 한을 독이라고 말한다. 이 트랙의 제목이 ‘은’인 이유다.
02. 뒷자리 (ft. 넉살)
비트부터 강렬하다. 학창 시절 학예회에서 지휘자를 맡았던 과거에 현재 모습을 비유하며, 본인이 1등,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랩 잘하는 곡’이다. 전작의 단점으로 주로 꼽히던 ‘지루한 랩’을 완전히 부정하는 퍼포먼스다.
또 다른 단점으로 지목된 심심한 훅도 이 앨범 내내 찾아볼 수 없다. ‘훅잡이’까진 아니어도, 곡의 감흥을 감소시키진 않는다. 이 트랙에서도 마찬가지. 단순하면서도 분위기를 살리는 훅 이후 넉살 특유의 하이톤이 잘 어울린다. 부끄럽지만 넉살 벌스의 가사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은 헉피의 Everest가 떠올랐는데, 맞을까? 가사는 잘 이해 못해도 랩을 잘했다는 말은 확실하게 할 수 있다. 정말 랩 잘하는 곡이었다.
03. 36.5 (ft. 화지)
피처링진이 공개됐을 때, 이 곡을 보고 아파트 10층에서 만세를 외칠 뻔 했다. 화지의 음악도 좋아할뿐더러, QM와 화지의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나 뿐만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꺼낸 말이다. 화지가 VMC에 합류한 이후 난 QM 3집에 화지가 참여하는 달콤한 꿈을 꿨다. 근데 이 꿈이 현실이 됐다.
주접 그만 떨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36.5는 모두 알다시피 사람의 정상체온이다. 이전엔 큰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숫자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숫자가 간절하다.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가장 의미심장한 제목으로 와닿은 곡이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시간 조급해 않지 노른자의 길
천천히 기다려 yeah I sing for the moment
흐름은 타게 돼있어 시대가 날 부를 때
위와 같이 1절에선 조급해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HANNAH] 시절의 QM이다.
언제나 듣기 좋은 (훅잡이) 화지의 훅이 지나면, 평화로웠던 비트가 변주된다.
분리수거하는 금요일
정말 별 거 아닌 가사다. 별 거 아닌 가사인데도 큰일이 곧 벌어질 것이라는 불길함이 엄습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 앨범에서 프로듀서가 가장 빛난 순간이다. (물론, QM의 장기인 감정전달도 돋보인다.) 그리고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엄마가 3일째 39도 지금 빨리 병원 와
아찔하다. 사자후 이후에 싸늘하게 변한 비트와 감정이 폭발하는 랩, 디테일하게 상황을 그려내는 가사의 조화는 청자들의 가슴까지 졸인다.
전염병 때문이라는 말에 음성판정 받은 엄마
진단서를 내밀어 소리쳐봐도 반응 없는 여긴
공연장이 아니지, 공연장이 아니지
mic 없인 아무것도 아닌 난 말라가며 기다리지
과연 생사를 다투는 병원에서도 유명세가 영향을 미칠까? 사실 난 잘 모르겠다.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허나 이곳에서의 QM은, 래퍼 QM이 아닌 직업란에 ‘무직’을 적는 아들 홍준용이다. 쓰디 쓴 무력감을 느끼고, 숨겨뒀던 열등감이 고개를 내민다. 더 이상 자신의 가사대로는 살지 못하겠다. 그리고 현재의 QM이 됐다.
V1) 내 follower 적어도 옆에 붙어 blue check
V2) 아이디 옆에 파란 멍 들고 내 글이 기사화
V1) 열 낼 필요 뭐 있어, 누가 나를 욕해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의 온도 36.5
V2) 열 낼 필요가 있어, 누가 나를 욕하면
다 사람이 하는 일의 온도 36.5
1절과 2절의 대비를 통해 복선을 깔고, 변화를 강조하는 연출력은 괜히 이 사람이 영화를 공부하려 했던 사람이 아니구나 싶다. 좋은 가사라는 말엔 범위가 너무 넓지만, 이 사람은 분명 그 어딘가의 경지에 올랐다고 확신했다. 물론 팬심이 담긴 말이다.
04. Island Phobia (ft. Tiger JK)
이 앨범을 관통하는 모티프를 꼽자면, ‘돈’, ‘섬’, ‘항해’이다. 그 중 하나, 섬 테마가 시작되는 곡이다. 섬 혐오자. 그 섬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QM에겐 떠나고 싶은 곳이다. 굳이 따로 발췌하진 않겠지만, 1절을 들으며 다른 래퍼들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가 몇 줄 나온다. 좋은 뉘앙스는 아니지만, 자신도 뜨기 위해 따라해 볼까 잠깐 고민한 듯해서 그 가사들을 디스라고 칭하고 싶진 않다... (사실 이 말에 자신이 없다. 내 오독일까?)
월에 따박따박 박히는 직업
원해 내 희망 동사무소 9급 직원
누가 동사무소 9급 직원을 꿈 꿀까. 무직인 사람도 아니고, 이미 정규 앨범을 두 장이나 내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인정받는 음악가가 하는 말이다.
내 벌거벗은 임금님은 stay rockin' CHANNEL
QM, 로스, JK의 목소리가 합쳐진 훅이다. 나도 이해를 못했던 구절이었는데, 라방에서 무려 세 번을 말해준 해석을 여기다 적자면...
임금 = 성공 꿈 미래 목표 등, 착하게 살래서 착하게 살았더니 샤넬을 입은 모습을 봤고, 성공은 돈인 것을 깨달았으니 이제 나도 걸치겠다. 라는데,
똑같은 설명을 세 번 듣고 방금 또 들었으나 아직도 알 듯 말 듯 하다. 죄송합니다.
내 몸 실을 카누와 유행하는 나침반
부자 되거나 죽기 뿐 흐름에 내 몸 떠밀어
결국 섬을 떠나기 위해 배를 띄우고, 항해하게 된다. 항해 서사의 포문을 여는 대목.
이 가사들은 다음 곡 ‘카누’에서 다시 등장한다.
마지막은 Tiger JK의 벌스인데, 파파고의 힘을 빌려봤지만 이것도 모르겠다. 내 독해력이 이 정도로 안 좋은 줄은 몰랐다. 다만 마지막 줄,
잘나가는 말꼬리에 매달려 가네요
but QM, 말 위에 고삐 잡은 general, One!
유행을 좇는 남들과 다르게 QM은 본인의 길을 개척한다는 샤라웃.
시체로 발견된 이들 난 다를 거야 너희들과
라는 큐엠의 가사를 뒷받침 해주는 가사다. 고집쟁이2 피처링도 그렇고, 호랑이 형님께서 참 좋아하는 래퍼인 듯. 부럽다
05. 카누 (ft. BIBI)
정말 열심히 이 앨범을 영업하고 다녔는데, 앨범 통째로 들어준 사람들이 고른 베스트 트랙들 중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은 곡. 나도 마찬가지다. 프레디 카소 특유의 무드와, 비비의 음색이 정말 잘 어울린다. 물론 곡 주인도 랩을 정말 잘했다.
스물 한 살 때쯤이지
반포 근처를 걷는데 apart 단지 안의 소리
첨벙이는 물결 애들이 타고 있던 건 카누지
그게 처음 카누 본 기억 big size 자쿠지
QM의 곡을 듣다 보면 자신의 경험을 따오는 가사를 많이 볼 수 있는데, 나한텐 이 앨범에서 가장 인상깊은 간접 경험 부분이었다.
유행하는 나침반 어따 뒀더라 난 무슨 짓을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어, 윌슨
살든가 죽든가 결국엔 -나게 저어야 해 노
팔든가 아님 굶든가 결국엔 -나게 저어야 해 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직전 트랙에서 시작된 항해 서사를 그대로 가져왔다.
카누에 몸을 실을 때 챙겼던 나침반을 잃어버리고, 영화 <캐스트 어웨이> 속 너무 유명한 윌슨을 등장시키며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 정신을 차리는 모습. 난 윌슨 부분에서 진짜로 소리 질렀다.
(캐스트 어웨이 속 윌슨)
봐 3만원 있는 사람 마신 소주는 불쌍해
반면 3억 있는 사람 마신 소주는 겸손해
돈이 사람 만든단 말 부정해왔는데
돈 없고 나이 든 몽상가를 보면 왜 철없게
주변에서 가사 거리를 찾는다는 사람답게, 통찰력이 참 대단한 래퍼.
같은 걸 봐도 다른 관점에서 지켜보는 것 같다.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말란 말 멋지게 늘어놨지만
너희가 내 걸 들어줘야 벌잖아
씁쓸한 현실. 음악으로 증명한 뮤지션이 음악으로 돈 벌기가 힘들다.
진실이 가진 유일한 단점은 기다림
가끔 내 편이길 바라네 내 손목의 시간이
진실이 퍼지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컨셔스 래퍼를 자칭하며 그간 사회문제에 화두를 던졌던 래퍼이기에 더 응원하게 되는 부분.
06. 돈숨
앨범 제목을 만든 트랙. 생소한 게 당연한 ‘돈숨’이란 단어의 뜻을 알게 되는 곡이다.
숨만 쉬어도 돈 나가 100만, 100만은 큰데 왜 1억은 꽤나
작게만 느껴져 주택청약 우리 모두 알지 이건 집 못 사
본인의 얘기이자 이 곡을 들을 청자들의 이야기. 정말 한국적인 컨셔스 랩.
100명의 삶엔 100개의 사연 비교하는 삶 불행하단 말
나도 잘 알아 근데 너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벌어먹다 살다 갈 거야 내 신념은 싸구려
다 팔아버려 영혼까지 핑계도 많으셔
36.5에서 말한 열을 내는 부분이 이런 부분이구나 싶다. QM은 이전에 남탓하는 가사들을 잘 쓰지 않았고, 신념을 팔았다는 가사까지 쓰면서 분명히 변했다고 말한다.
“형, 애 하나 키우는데 얼마 들어요?”
“한... 2억?”
중간에 삽입된 나레이션. 결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HANNAH라는 딸을 키우는 일 또한 마찬가지.
우리 회사 식구들 사진 내 위치는 저 맨 끝
형들 동생들 아님 못 뛰는 행사 난 계륵
불평한 적 따윈 없지 본능을 숨겨와서
VMC의 유명한 래퍼들이 있지만, 방송을 타지 않은 QM은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열등감을 느끼지만 그렇게라도 돈을 버는 현실에 순응하는 지점.
서른 살 넘어서 동생 회사에서 알바
three job hustle 쪽팔려 나도 새끼야
‘용서받지못한자’에서 수능 잘 보라고 응원해주고, ‘다음에’에서 생일을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 했던 그 동생의 도움을 받아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형. 열등감이 폭발하며 곡이 끝나는데, 이 부분은 36.5와 같이 듣고 나면 잠깐 멈추고 쉬고 싶은 부분. 쓰나미가 휩쓸고 간 기분...
07. 가성비
가격 대비 성능. 처음엔 그저 물건을 고를 때 사용하던 단어가 여기저기 덧붙여지며 별로 좋지 않은 어감을 갖게 됐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연인의 생일선물에 가성비를 따지며 선물을 고민하던 글. 그 사람의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겠지만, 나를 포함해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은 너무 성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우린 단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살지 사랑 믿음 따져 가성비를
이라는 가사가 괜히 더 깊숙이 들어오는 기분.
나와 내 직업은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는 중이야
나는 내게 너그러워
Google me 직업이기엔 부끄러워
비행기 남의 나라 갈 땐 학생
팬데믹의 영향으로 공연을 하지 못하는 래퍼들은 사실상 실직 상태다. 안그래도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 겸업을 해야 하는데 더더욱 심각해진 상황. 검색을 하면 나오는 준 유명인이지만 직업이라고 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중이다.
(QM은 이런 상황 속 심경을 SNS에 적기도 했다. 36.5 가사 속 기사화된 글이 바로 이것.
참고:
https://newsis.com/view/?id=NISX20200818_0001132479&cID=10401&pID=10400)
나를 못 알아보는 너의 장르는 힙합 fan
술집에 나오는 익숙한 리듬 아마두
따라 부르는 사람들을 귓바퀴로 깔아둬
넘겨 내 질투의 치사량
본인의 회사 식구와 무명 시절 같이 EP를 냈던 프로듀서가 음원 차트 상단을 지키는 동안, 힙합 팬을 자처하는 사람조차 자신을 못 알아보는 상황. 질투가 날 수밖에 없다.
내 팔뚝에 문신이 없는 걸 보니
난 쳐본 적이 없나봐 배수진
널 사랑할 때 사실 따졌나봐 가성비를
근데 어쩌겠어 I have to pay my bills
언제 회사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지 모르니 보이는 곳엔 문신을 하지 않았다.
힙합마저도 가성비를 따져가며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타협한 QM.
넌 날 믿지 Tell me something beautiful
난 널 믿지 I'll tell you some thing awful.
곡 내내 beautiful로 훅을 짰지만, 마지막에 반전을 준다. 이 곡에서 말하는 ‘너’는 힙합인 듯 하다. 가사에서 희망찬 이야기만 하지 않고, 본인의 열등감을 적어내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야기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
08. 만남조건 (ft. jerd)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라는 노래에서 아이디어를 받았다고 한다. 클럽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알아봐줬으면 하다가도 직업을 숨기려고 하는 건 열등감과 자존심 때문. 사실 나에게 크게 감흥이 있거나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확신하는 트랙도 아니어서 쓸 말이 없다. 직전 트랙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꺼냈고, 이후 나오는 트랙과 이어지기 위한 연결고리 기능을 하는 곡인 것 같기도.
09. Chantey Interlude
결혼?
딸 이름을 한나라고 할 거야?
넌 저기 안 나가?
나는 네가 우리 엄마한테 자랑스럽게 얘기할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어.
그냥 평범하게 살면 안 돼?
너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긴 한 거야?
야 홍준용!
랩이 없고, 비트 위에 나레이션이 깔리는 스킷이다. 클럽에서 만난 여성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친구와 마찰이 빚어진다. [HANNAH]를 들은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가사가 있을 것.
내 전여친은 내 직업이 부끄럽대
난 말했지 똑바로 말해
너의 핸드폰 재생목록 중에 절반이 래퍼면서
그냥 솔직히 말해 내가 못 떠서잖아 빨갛게 말라붙었네
저 대화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다음 트랙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10. 닻 (ft. Khundi Panda)
빈손으로 갈 마지막에는 내 옆자리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길 바라고 그게 너이길 바랐지
결국 자취방에서 연인과의 흔적을 지우며 이별을 준비한다. 소란스러운 이별은 싫다던 가사처럼 울고 불고 하진 않지만, 자신이 그리던 행복한 미래가 사라진 아쉬움은 분명히 드러난다.
왜 우린 유한한 시간으로 영원을 말할까
남과 같이 부러진 약지가
되는 건 한 순간 Thanos, finger snap
이래서 다들 도장을 찍나 봐 다들 계약서에
당연하게도 약지는 약하다. 그런데 우린 약지를 걸고 약속을 한다. 쉽게 부러지는 약지만큼이나 약속은 쉽게 어그러진다. 그리고 이 가사는 카누에서 이미 암시된다.
가장 약한 손가락으로 꺾이지 못할
약속을 하지 꼴에 지키지도 못할
/ 카누 中
이렇게. 다시 한 번 느낀다. 앨범을 통째로 기획하는 능력이 무서울 지경이다.
결혼은 사랑 외에 많은 게 필요하다고, I don't know
돈숨에서도 이미 나왔다. 애 하나 키우는 데 2억은 필요하다.
쿤디판다 벌스는 그냥 사례 하나 더 붙이는 느낌이었다. 개별적으로 크게 감흥이 있진 않았고, 둘의 조합이 좋다는 정도?
닻, 내려 닻
아님 떠나 저 멀리 멀리
‘닻 내리기’는 주체가 어떤 환경으로부터 몸을 떼어내어 다른 환경 속에 몸을 두고 거기에 거주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거주를 하지 못한다면 떠나가야 한다. 섬을 떠나 다른 섬에 정착했다가, 또다시 다른 섬을 찾아, 혹은 육지를 찾아 떠나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11. 다시 섬
[HANNAH]의 ‘HANNAH’, [FOUNDER]의 ‘Blueprint’, [NEVERLAND]의 'Neverland ends', [1Q87]의 ‘추락’. 모두 비슷한 결을 가진 VMC의 앨범들이다. 이 앨범들은 마지막 트랙을 통해 앨범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던진다. 그리고 모두 앞선 트랙에서 풀어낸 고생, 경험들을 발판삼아 더 나은 미래를 그릴 것이라는 희망을 던진다. 그래서일까, 혹은 내가 좋아하는 래퍼가 은퇴할 것이란 가능성을 아예 배제했기 때문일까.
점심에 입에 쑤셔 넣은 풀어서 키운 닭과
잠깐의 휴식, 회사 앞서 담배 피는 날 봐
먼지 덮인 CD는 묻고 왔지 홍대 반지하에
다 밀어냈지 랩 관련된 것들
첫 포스터, 첫 CD, 더는 일 없게
홍대 아스팔트 위에 NAZCA는 없어
인스타 라이브에서 밝힌 바로, 이 곡은 래퍼로서 은퇴하고 회사에 들어가 직장인이 된 결말이라고 한다. 그것을 알고 들으면, 처음 들었을 때 의아했던 가사들이 와닿는다. 곡 전체에 은퇴 후 삶이라는 가사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랩을 했던 과거를 모두 부정하면서.
난 [WAS]에선 ‘100만원’, [HANNAH]에선 ‘HANNAH'를 가장 좋아한다. 처음 들었을 땐 더 자극적인 트랙들이 있지만, 수백 번을 듣다 보면 마음에 와닿은 가사가 가장 많은 곡이 애정이 간다. 곰탕을 끓이고 계속 끓여서 진국이 되듯이. 마지막 트랙에서 앨범을 총정리하기 때문인 것 같다. [돈숨]도 마찬가지다. 유독 마음에 와닿은 가사가 많은 곡이다. 따로 발췌하기 민망할 만큼. 그럼에도 최고로 꼽을 수밖에 없는 가사가 있다.
돈에 진 것 같아 내고 나면 이 앨범을
HANNAH 만큼은 절대로 못 쉬게 할 돈숨
모든 장르 모든 아티스트를 통틀어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이 [HANNAH]다. 그만큼 애정이 깊고, 귀에 익은 앨범이다. 한나가 QM의 딸이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돈에 지더라도, 자신은 고생을 하더라도 자신의 딸에겐 그 짐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 가족의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는 말처럼,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머지를 전부 뒤바뀌더라도 지켜내고 싶은 단 한 가지인 것이다. 딸바보 홍준용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의미로 HANNAH를 레퍼런스했다고 한다. 이 트랙도 결국 HANNAH의 가사와, 앨범에 실었던 부모님의 나레이션을 등장시키며 끝을 낸다. 그런데 마지막.
보통이란 단어는 최고의 또 다른
“HANNAH"
과거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은 그대로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QM이 바뀌어야 했다.
/
다행히 이 앨범이 공개되고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CD도 상당히 많이 팔렸다고 한다. 팬의 입장에선 한 시름 놓았다. 내가 그토록 열심히 홍보를 한 보람이 있다. 딩고의 파급력인가 싶어서 씁쓸하기도 하다. 하지만 뭔들 어떠나.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잘 됐으면 좋겠는 게 팬의 마음 아닐까. 그리고 QM은 딩고와 연이 깊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그럼에도 가장 큰 요인은 역시 앨범의 퀄리티다. WAS 시절의 패기와 HANNAH 만큼의 따뜻함은 없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열등감을 비워내며 더 잘 되고 싶은 갈망만 드러낼 뿐이다. 감정 소모는 크지만 찝찝하진 않은 이유다. 게다 WAS의 부담스러운 스킬, HANNAH의 심심함-물론 난 담백해서 좋다- 사이에서 완벽하게 밸런스를 잡았다. 부담스럽지 않고, 가사에 충실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래핑. VMC 프로듀서진과 Don sign.의 비트는 같은 결을 가져가면서도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구성돼 사운드의 퀄리티를 높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3번 4번의 순서를 바꿔 뒷자리-Island Phobia, 36.5-카누로 들었을 때 소리적으로는 잘 이어지는 듯 했다는 점. 그리고 전작보다 이해가 힘들다는 점? 불친절이 꼭 단점은 아니고, 여전히 다른 아티스트들에 비해 불친절한 편은 아니다. 단순히 내 취향은 친절한 쪽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내 독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
언젠가 앨범 리뷰를 적고 싶었는데 이벤트가 있어서 생각나는대로 끄적여봤습니다. HANNAH를 먼저 적었으면 좀 더 정리가 쉬웠을 것 같지만... 미루다 보니 돈숨이 나와버렸네요. 분량은 많고 읽기는 힘들고 영양가도 없는 글이지만 그래도 WAS 콘서트에디션은 받고 싶어서 쓰다 보니 끝이 나긴 하네요. 쓰면서 제 스스로도 정리가 돼서 다음엔 더 정돈된 감상을 느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말도 많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줄 요약: 돈숨 짱
닥추...
저도 리뷰 나름 잘했다고 느꼈는데 이분은 와.........
가사가 깊다...응원합니다
8번트랙 붕뜨는거빼곤 흠잡을데 없는앨범.
들을수록 좋네요
올해3손가락안에 드네요 개인적으로.
이렇게보니 구성이 정말 영화같네요
사운드도 요즘 목말라하는 그런 느낌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앨범 돌리니 더 좋네요. 저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뒷자리의 넉살파트를 넉살이 큐엠을 도와 같이 뒷자리를 향해 가면서 이것저것 경험한 형으로서 충고도 해주고 있는걸로 이해했어요.
큐엠과 같이 넉살도 뒷자리를 향해 가면서 신인들에겐 구라로 잘난척하면서 견제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에겐 너넨 헤세도 모르는 가짜라고 꼽주면서 자리를 차지하려하는데 사실 속으론 뒷자리라는게 너무 힘든자리인걸 알고 있어 명예와 부를 지키려고 아둥바둥하는 현실에 한탄하는것처럼 느껴졌어요.
사람들 시선에 노출되는 앞자리는 언제든 사람들 입맛에 교체될 수 있고 중간은 애매하고 뒷자리는 서로 물어뜯으며 죽어나가는 현실을 말하면서 뒷자리를 고집하며 나아가다 결국에 주변에 남는 사람 없이 외로워지고 혼자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리워지면 아마 그때는 이미 늦은거다라고 큐엠에게 충고하듯 말하는것 같았습니다.
오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군요
좋은 리뷰 글 감사합니다 :)
전부터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마감 기한 맞춰 후다닥 쓰느라 아쉬운 부분이 많은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빼먹은 부분도 꽤 많은데 개인 블로그가 아닌 커뮤니티라 수정하기도 조금 그렇네요
다음에도 좋게 들은 앨범 있으면 조금씩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
다시 섬의 가사가 좀 엥? 했는데
은퇴한 래퍼의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들으면 말이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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