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ler, The Creator - CHROMAKOPIA
우리는 The Creator가 빠진 타일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는 2년을 주기로 그의 발을 옮겼다. 마치 우리가 언제 약속이나 한 듯이. 그만이 느끼는 일종의 징크스가 있는 것일까, 타일러는 2011년 첫 정규 앨범 Goblin을 이후로 정확히 2년마다 새로운 레코드를 꽂아 넣은 덕에 그의 스탠드는 일종의 바둑판식으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또 하나의 집착적 패턴으로는 모든 앨범 10번 트랙의 제목을 앞 슬래시로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타일러식 선 긋기 관행은 흔해빠진 시각적 구성에서의 대칭 포인트를 위한 장치가 아닌 실제적으로 앨범 구조를 유의미하게 뒤튼다. 케케묵은 작위적 디테일과 컨셉이 10년이 넘는 아득한 세월 동안 지켜지면, 우리는 홀수와 슬래시를 넘어 그의 사소한 모든 움직임을 예술적이거나 창발적인 행동으로 연계시키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면 근 13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이 집착적인 습관이 본작 CHROMAKOPIA에서 전부 소거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 또한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만의 새로운 연출론의 시작일까, 아니면 이 모든 사소한 슬래시들이 일종의 가시가 되어 그의 창의력을 억제하고 있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이 짓거리가 전부 다 귀찮아진 것뿐일까.
웃음이 많고 괴짜 기질이 다분하며 어쩔 땐 광기스럽기까지 한 예술가 중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는 유독 특별한 점이 있다. 마치 21세기의 빈센트 반 고흐가 떠오르는 그의 반전 가득한 진중함은 힙합보단 얼터너티브 알앤비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타일러는 꾸준히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내면의 소리를 대중에게 노출시켜왔고, 변화무쌍한 감정적 사랑과 상처를 재치있게 엮어내기도 했다. 텍스트와 익살스러움의 반전에 지지 않을 만큼 타일러의 사운드 또한 몹시 급진적으로 움직인다. Flower Boy는 부드럽지만 요란했으며, IGOR는 요란했지만 부드러웠다. 본작의 초반 세 트랙에서 전부 튀어나와버리는 특유의 양가적인 분위기의 신스와 코러스는 칸예의 한껏 성스러운 코러스처럼 어느새 타일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퍼렐이 연상되던 소리의 조각들과 바리톤의 래핑은 미약한 드럼으로 이뤄진 비트마저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꽉 찬 포만감을 안겨준다. 그렇기에 그를 규정짓는 단어 The Creator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본작은 으레 그렇듯 Flower Boy 에라 이전의 입문자라면 타일러의 세계관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Tyler, The Creator는 여전히 살아있는 역설이지만, Tyler의 옴니버스는 이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정규 6집 앨범 CALL ME IF YOU GET LOST는 그의 어떤 앨범보다도 더 빽빽한 랩으로 채워져있다. IGOR가 기발한 기악 편성과 피처링, 1분 1초마다 달라지는 비정형의 분위기로 충격을 주었던 것과 비교하면, 사운드적 특징들을 공유함에도 느닷없이 힙합 정통주의자가 되어 나타난 그의 모습이 우리가 누구의 팬인지를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CALL ME IF YOU GET LOST와 CHROMAKOPIA의 사이에는 이런 타일러식 급발진이 존재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신스와 무거운 베이스가 전작의 역동성을 연상시키는 "Thought I Was Dead"나 레트로퓨처리즘스러운 "Balloon", 타일러의 뉴 사이키델릭을 기대하게 했던 Ngozi Family를 샘플링한 "NOID" 등 그의 음악적 다양성과 실험적인 리듬은 타일러식 프로덕션에 힘입어 언제나 그랬듯 독창적인 사운드스케이프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옴니버스에서 숱하게 다뤄졌던 클리셰들을 깨부술 장치로는 미력해, 자칫하면 타성에 젖어 2년 주기로 맞춰둔 타이머가 종소리를 울리자 기계처럼 만들어낸 앨범인건가 오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기고백적이거나 감정적 성장을 다룬 진정성 있는 주제가 이러한 문제를 커버 쳐줄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럼 이제 한 가지 문제만이 남았다. 본작 CHROMAKOPIA는 안 좋은 앨범일까.
미국의 게임 개발사 너티 독이 제작한 액션 어드벤처 라스트 오브 어스(LOU)는 몰입도 높은 스토리텔링과 입체적인 주인공, 주인공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부성애와 훌륭한 작품성으로 게임을 일종의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명작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LOU의 스토리는 진부하기 그지없다. 인류를 절벽 끝으로 내몰았던 바이러스, 그 바이러스에 면역인 아이와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한 주인공의 고군분투까지. 요는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이고, 딜레마를 던지는 도덕적 문제의 깊이가 아니라 공감의 깊이이다. 텍스트에서만큼은 진중하고 진솔했던 타일러의 가사는 언제나 그랬듯 직설적이고 몰입적이다. 누구보다 자유롭고 요란했던 타일러의 과거와 발맞춰 지켜보던 우리의 미소 혹은 냉소는 소리만으로는 부족한 공감 능력을 채워준다. 누구보다 자유로움을 갈망했던 타일러의 파라노이드도, 인터넷 게시판에서 갑론을박까지 펼쳐졌던 그의 성 정체성과 창의적 에너지, 자극적이고 익살맞은 과거의 타일러에 대한 고민과 안녕의 "Tomorrow"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타일러의 사랑에 대한 정의의 "Darling, I"도. 끝없이 자문하던 지난날의 질문들이 우리와 공명하며 해결되고 또 남는다. 타일러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우리 모두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예술 문화에서 음악만이 가지는 독특한 장점이 뭘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예술가의 성장 과정과 사소한 변화를 캐치하고 그 흐름에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을 꼽고 싶다. 예술가의 과도기를 함께할 수 있는 문화라니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게 어디 있을까. 나는 빈스 스테이플스의 Big Fish Theory보다 Vince Staples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본작의 평가에 어떠한 객관성도 담보할 수 없다. 그렇게 충분히 나의 책임을 회피시켰기에 당당히 말할 수 있다. CHROMAKOPIA는 훌륭하다. 나는 CALL ME IF YOU GET LOST가 발매된 후 그가 언젠가 지그재그로 달리는 것을 잠시 멈추고 천천히 걸어가는 순간이 오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는데, 타일러는 역시 예상대로 내 예상과는 다른 작품을 보여준다.
과도기의 감수성을 담은 음악을 들을 때면 유난히 작위적인 느낌에 예민해지는 것 같다. 켄드릭 라마의 Mr. Morale & The Big Steppers를 다시 감상할 때마다 느꼈던 그 묘한 불편감은 그 때문일까. 데이비드 보위의 Heroes를 들을 때면 유난히 편했던 것은 그 때문일까. 익스페리멘탈함을 한껏 품은 "St. Chroma"와 "NOID"까지, 타일러는 마치 이 세 개의 트랙에 그의 과거를 두고서 CHROMAKOPIA를 시작하는 듯 하다. 타일러의 정체성이 한 작품을 건너뛰는 걸음마다 느껴졌던 급진성의 "The Creator"가 아니라 "Tyler, The Creator" 그 자체에 있다면, CHROMAKOPIA만큼 타일러스러운 작품이 또 있을까. 다양한 페르소나를 지나오며 한껏 비대해진 성숙한 자아와 그 고민들을 그저 무던한 타일러식 프로덕션으로 절제했다는 것이 인상깊다. CHROMAKOPIA는 타일러의 음악을 우리의 관념과 언어로 포착하고 규정할 수 있는 첫 작품이 될 것 같다. 평생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타일러의 CHROMAKOPIA를 들어보니, 역시 타일러는 존나 살아있는 역설인가 보다.
이제 슬슬 음악도 듣고 여가시간도 보낼 시간이 나려 하자마자 타일러가 새로운 음악을 가지고 와줘서 참 고맙네요. 사실 이번 작품의 가사가 뭔가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바람에 뻘소리가 너무 많아질까봐 아주 짧게 앨범이 좋았다는 감정만 풀어보려고 했는데 오랜 기간 음악을 멀리했더니 갈증이 좀 났나봐요. 주절주절대다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으면 좀 더 들어볼 걸 하는 마음도 듭니다. 뭐 타일러가 성장하는 만큼 저도 조금씩 듣고 하다보면 좋아지겠죠. 다른 분들의 좋은 글을 한동안 지나치기만 해서 참 아쉬웠는데 이제 슬슬 읽어볼 마음에 설레기도 합니다.
Tyler, The Creator - CHRO.. : 네이버블로그
더 크리에이터를 뗀 가장 타일러스러운 작품이라.. 인상깊네요
더 크리에이터를 뗀 가장 타일러스러운 작품이라.. 인상깊네요
들으면 들을수록 더 몰입되는 앨범인 것 같습니다. 들을수록 Take Your Mask Off의 가사인 I hope you find yourself가 떠오르더군요. Tyler Okonma는 이번 앨범을 만들며 자기 자신을 찾았을지 궁금하네요.
타일러 버전의 in rainbows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그동안 그가 지나온 모든 길과 정체성이 집약된 작품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들을 수록 좋아지는 앨범
좋음
글도 너무 잘 읽었습니다
좋은 양질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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