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유는 제가 한국에 사는 동양인이기 때문입니다.
GKMC TPAB가 고평가를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정치적 메시지를 잘 버무렸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두 앨범들을 100% 즐기면서 듣는 것은 여러분이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이 아닌이상 불가능합니다.
머리로 이해하면서 듣는 것과 가슴으로 공감하면서 듣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까요.
반면 MBDTF는 앨범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칸예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앨범에서 우리는 칸예의 조증에 가까운 자신감 넘치는 모습부터 우울증으로 인한 약한 모습까지 모두 보면서 그에게 공감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은 국가와 인종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경험입니다.
앤서니 판타노는 음악 외적인 정보를 배제하고 오직 음악에서 주는 정보만을 활용한다는 기조로 비평을 하지만,
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개인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고, 모든 예술은 개인의 경험과 신념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봉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언급하면서 한 말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동양인인 저로서는 MBDTF가 GKMC TPAB보다 뛰어난 앨범입니다.
그럴 수 있긴 한데 켄드릭 앨범에서 텍스트나 컨텍스트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그게 정말 그 앨범들에서 가장 절대적으로 중요한가 싶어요 게으른 평일지 몰라도 켄드릭의 걸작들은 진짜 듣기만 해도 즐겁거든요 형식미라는 불분명한 개념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가사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뮤지션들에 대해 감상의 모든 근거를 가사에 돌리는 경우를 많이 봐서 괜히 딴지 걸어봤습니다 그냥 가장 눈에 잘 보이는 무언가를 급하게 갖다 붙인 걸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아닐 수도 있고요 아니라면 괜히 딴지 건 제가 죄송한 일이 되겠지요
전 글에서 저 앨범들의 사운드적인 평가를 일부러 배제했습니다
글의 취지는 음악 외적인 부분이 감상에 영향을 미친다이기 때문입니다
MBDTF의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전위적인 샘플링을 좋아하지만, 재즈와 소울 등 흑인 음악 장르들을 기반으로 한 GKMC TPAB의 사운드도 많이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가사가 없는 전자음악이나 연주곡 등이 아닌 이상 가사와 맥락을 모른채로 음악을 즐기는 것은 반밖에 곡을 느끼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음악 외적인 부분이 당연히 감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건 뭐 감상관에 따라 다른 건데 저는 가사가 있는 음악도 텍스트가 제 감상에 끼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더군요
저는 충분히 느꼈습니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만연한 인종차별 이슈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고, 심지어 한국 내에서도 그런 이슈들로 화제가 되었거든요.
그리고 이 앨범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꼭 흑인, 인종차별만의 얘기가 아닌 우리 인간 모두에게 전하는 내용 같았습니다. "자아성찰"을 필두로 한 켄드릭 라마의 여러 깨달음과 반론이 앨범안에 들어 있어, 저는 어느 힙합 앨범보다 좋게 들은것 같아요.
물론 동양인으로서 다른 국가에서 느끼는 인종차별에 대입해서 느낄 순 있지만 제가 글에 썼듯이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이 아닌 이상 이를 전부 느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과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200년 이상 이어지는 뿌리깊은 문제입니다 극단적으로 미국의 모든 인종들이 서로 차별하지 않고 서로를 똑같이 대한다고 해도 사회구조적으로 특정 인종이 특정 인종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져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외국인인 우리가 느낀다고 한다면 조심스럽지만 전 그것은 기만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전 오히려 켄드릭의 최근작인 MMTBS가 더 잘 느껴지더라고요 제일 개인적인 앨범이라 그런 걸까요
Factos 👀👍 개인적으로 공감합니다 으하하
적어도 이 정도의 개인적 감상을 함께 얘기해줘야지 주장에 소구력이 생기고 건전한 감상 교류가 가능한데, 막무가내 식의 소신발언은 그냥 싸움을 위한 떡밥 말곤 어떤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글에 적힌 이유가 개인적으로는 gkmc가 tpab보다 손이 더 많이 가는 이유기도 합니다
tpab가 gkmc보다 더 개쩌는 앨범이라는 평에는 공감하지만, gkmc는 켄드릭 개인의 일대기를 담은 앨범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것과 비슷한 감상이여서 쉽게 와닿지만, tpab는 그 이야기의 깊이가 아무래도 흑인사회와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제 3자의 입장에서는 gkmc보다 덜 와닿는다고 생각합니다
전 반대로 tpab에 더 손이 갑니다
Mortal man 이 한 곡 때문인데요
흑인 커뮤니티를 위해서 메시지를 뱉는 켄드릭이지만, 자기가 무슨 일이 터져도(지금의 말로는 캔슬되어도) 자기 곁에 남아줄 거냐는 가사들은 심금을 울리더군요
그 곡은 정말 띵곡이죠 ㅋㅋ
투팍과 얘기를 하는 부분은 정말 미쳤습니다
전 mbdtf가 더 좋다는 입장은 아닌데 비슷한 이유로 gkmc>tpab이라고 느낍니다
gkmc는 켄드릭이라는 개인의 이야기를 듣는거다보니 그냥 책이나 영화 보듯이 생각하면 되는데 tpab은 뭐 흑인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우린 그 단어를 어떻게 대해야 하고 이런 상징적인 의미들이 실제 후드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 어떤 감상으로 다가올지는 영 감이 안 오더라고요
글에는 좀 너무간 것 같아서 적진 않았지만
저는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이더라도 후드가 아닌 상류층 집안에서 자란 흑인이라면 gkmc tpab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저소득층 흑인들이 후드를 탈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제일 큰데, 흑인 커뮤니티가 아닌 상류층 백인들과 어울리는 흑인이 과연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켄드릭 앨범 관련 글에서 가장 공감되네여 저도 칸예 앨범이든 켄드릭 앨범이든 다 좋긴 한데 우리가 흑인이 아닌 이상 tpab의 진가를 완전히 느낄 수 없다 생각함다
일단 예술은 만들어질 때에도 감상될 때에도 분명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어떤 측면에서는 Dark Fantasy가 good kid나 Butterfly보다 뛰어나다는 데에도 동의합니다. Dark Fantasy를 이 둘보다 높게 평가하시는 건 당연히 글쓴이님의 자유 의견이고 존중합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Butterfly를 조금 더 높게 평가하고 싶네요.)
다만 "두 앨범들을 100% 즐기면서 듣는 것은 여러분이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는 말에는 온전히 동의하지 않습니다. good kid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겠지만, 제가 딱히 즐겨 듣고 좋아하는 앨범은 아니라서 일단 Butterfly에 관해서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제가 글쓴이님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는 (일부러 배제했다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완성도에 있습니다. 사운드적으로든 가사적으로든 말이에요. 이 앨범이 개쩌는 프로덕션과 개쩌는 리릭시즘을 지녔다는 점은 선호를 떠나서 아실 것 같고, 저는 거기에 더해서 가사, 내용과 사운드, 형식이 완벽하게 합을 이룬다는 부분까지 더하고 싶습니다. 흑인 사회를 되돌아보고 나아가자고 하는 앨범의 내용을 힙합을 중심으로 재즈, 소울, 펑크, 알앤비까지 흑인 음악의 역사를 총망라하는 듯한 사운드 프로덕션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Butterfly는 형식이 내용을 완성하고 내용이 형식을 지지하는 수준의 완성도를 지녔다고 생각해요. Butterfly는 분명 빼어난 만듦새를 통해서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현대 예술의 특수성에서 기인합니다. 오늘날 예술은 감상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거의 온전히 내맡기고 있고, 대중음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제작자와 감상자의 개인의 경험, 상황, 가치관 같은 것들이 예술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겠죠. 이런 관점에서 Butterfly를 바라보면 더욱 거대하고 다양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앨범의 기반은 흑인 사회와 인종 차별에 대한 통찰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앨범은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볼 것," "나를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할 것"이라고 전하는 것 같습니다. 켄드릭이 이 앨범을 통해 제시하는 행동 원리 혹은 신념은 꼭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이 아니더라도 모두에게 적용되고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한국에 사는 흑인도 아닌 우리가 Butterfly가 가진 흑인 사회에 관한 통찰을 100%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Butterfly는 흑인 사회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 마음의 울림을 선사하는 예술 작품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앨범을 바라볼 때 흑인 사회를 넘어서서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고민은 인종, 국적, 세대, 성별, 기타 등등을 떠나서 모든 이들에게 무척이나 즐거운 과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이 말은 예술을 만드는 이들도 명심해야 할 좋은 말이지만, 감상하는 이들 역시 간직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해요. "이 예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 예술이 나로 하여금 어떤 감상을 갖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요.
좋은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긴 글로 의견을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앨범들을 100% 즐기면서 듣는 것은 여러분이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이 아닌 이상 불가능" 은 국적과 인종의 다름, 그리고 언어의 장벽 때문입니다.
오징어 게임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저는 해당 작품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자본주의의 잔혹함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선택하고 있는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드라마에서 나오는 게임들과 극중 인물들의 대사들은 극히 한국적입니다. 특히 조상우의 "하...씨발" 에 담긴 감정은 외국인이라면 한국인만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tpab(저도 tpab에 한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나, 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은 오직 특정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이들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에 해당 앨범을 100% 즐길 수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감상이 의미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나오는 해석과 감상도 중요합니다. 힙합뿐만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모두의 것이니까요.
예술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른 경험을 해주기에 재밌는 것 같아요. 저는 프랭크 오션의 Blonde를 들을 때마다 1월달에 빗자루로 10시간 넘게 제설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과연 미국인들이 저와 같은 감상을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의견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언어의 문제는 저도 일부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본문에서는 딱히 그런 이유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 못했네요. 어쨌든 확실히 언어와 문화권에 차이에서 오는 음 장벽? 한계?가 꼭 Butterfly만이 아니더라도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저는 그걸 넘어보겠다고 영문과를 와서는 장벽 밑에 깔려버린 사람이라 공감이 가네요.
아무쪼록 재밌고 유익한 생각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감상, 다양한 이유,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으니까 예술이 이토록 즐거운 것이겠죠. 앞으로도 좋은 음악 많이 들으시고 좋은 감상 남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정성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글이 한국에서 평생 산 동양인이면 MBDTF를 더 좋아하는게 정상이다.. 라고 느껴져서 좀 동의가 안 되네요
꼭 가슴으로 공감이 되는 리릭이어야만 더 좋은 앨범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한국에서 평생 산 동양인은 그럼 시카고에서 자란 흑인 칸예한테는 가슴으로 공감이 다 되나요?
켄드릭라마가 스포티파이 월간 청취자 수가 6천만명입니다. 6천만명이 죄다 미국 흑인일 리도 없는데 이들은 다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면서 TPAB GKMC를 듣고 있는 걸까요
이탈리아 마피아가 아니면 대부를 가슴으로 온전히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친구(한국영화)>>대부1,2 이 얘기랑 같은 얘기 같아요
세간의 평가는 대부>친구이지만
한 개인한테는 친구>대부일 수 있습니다.
모든 평론이 그러하듯 그것은 오직 참고용일 뿐이며 이조차도 주관적인 평가에 불구합니다.
친구에서 보여주는 시대상을 살았던 인물이라면 친구에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경험이 친구를 대부보다 더 고평가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전 존중해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피치포크가 mbdtf에 만점을 주었지만, 판타노는 6점을 준 것처럼요.
일단 해당 글은 일반화하려는 글이 아닌 개인의 감상평입니다.
제가 예술을 즐길 때 1순위로 두는 것은 공감입니다. 켄드릭이 두 앨범으로 미국 흑인 커뮤니티에 끼친 영향이나 칸예가 mbdtf로 피치포크에게 만점을 받았다는 사실은 저에게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하나 단정짓고 싶은 것은 gkmc tpab에 100%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특정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두 앨범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켄드릭이 인터뷰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부정한다는 것은 마치 인터넷상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에 살아본적도 없으면서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꼴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mbdtf는 매우 개인적인 앨범입니다. 칸예가 해당 앨범에 담은 감성은 켄드릭의 두 앨범보다 훨씬 보편적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칸예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수록곡들에서 보여지는 그의 공격성이 느껴질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나 우울감에 젖어 나에게 상처받지 말고 나를 떠나가라는 처량함 등은 우리도 한번쯤은 겪어본 경험과 감정이고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꼭 시카고에 사는 흑인이 아니어도 알 수 있습니다.
전 예술작품을 100% 느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gkmc tpab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켄드릭의 가사는 훌륭하지만, 그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저에게는 mbdtf가 더 와닿는 것입니다.
이 떡밥 엘이에서 돌때마다 왜이렇게 보기 싫지
결국 사람마다 최우선으로 두는 가치가 다른데 이런 의미 없는 논쟁은 그 앨범을 좋아하는 사람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짐
개인 의견으로 봐주세요
나름대로 납득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썼습니다
어떤 앨범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보다는,TPAB의 메세지에는 깊게 공감하기 힘든 점(흑인 사회~ 메세지)이 MBDTF에 좀 더 끌리는 점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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