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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 맞추기

산소2024.01.29 12:10조회 수 214추천수 5댓글 4

살아있는 음악을 좋아한다. 물론 어떤 음악은 죽어있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은 온통 자기 존재의 증명을 위한 소리로 이루어져있다. 매일마다 크고 작은 진동으로 시끄럽게 울리는 지하철과 전원을 키면 동시에 바쁘게 돌아가는 책상 위 컴퓨터의 쿨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마다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소리를 내지 않는 지하철은 운행이 멈춘 지하철이고 쿨러가 돌아가지 않는 컴퓨터는 고장난 컴퓨터이다.

수만년 전 지구에 존재하던 인간들은 동물의 울음 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를 따라 흉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태초의 음악이다. 이렇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한 인류의 음악이 녹음으로 기록되기 시작한건 불과 150년 전의 일이다. 에디슨이 처음 축음기를 발명하기 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단 두가지였다 - 남이 연주하거나, 내가 직접 연주하거나. 축음기가 처음 탄생하고 큰 인기를 끌 수 있게 된 이유는 단순히 기술적 혁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18-19세기의 유럽에서 클래식 음악은 오로지 비싼 라이브 공연료를 지불할 여유가 있는 상류층의 것이었다. 배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고급 악기와 개인 과외비를 지불할 수 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합리적인 가격에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시간과 닿을 수 없던 공간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축음기의 탄생을 반기지 않을 중산층은 없었다.

음악을 녹음하고 청취하는 것이 보편화되면서 녹음된 음원의 질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 역시 비례적으로 향상하였다. 사람들은 공연 현장을 녹음한 음원보단 스튜디오 녹음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숨소리와 같은 크고 작은 소음들은 지워져갔다. 음악이라는 매체의 상징보단 소리 그 자체의 가치를 우선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깨끗한 녹음 환경에서 탄생한 정돈된 음악이 듣기 더 좋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돈된 사운드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기계로 찍어낸 듯 숨소리 한번 내지 않는 보컬, 마찰 소리가 나지 않는 타악기, 페달 밟는 소리가 나지 않는 키보드. 그 누구보다도 현대음악을, 혹은 소위 말하는 상업음악을 좋아하는 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음악의 형태에 대한 불쾌한 골짜기와 같은 미세한 거부감이 드는건 사실이다.

오케스트라 공연의 후기들을 찾아보면 연주자들의 숨소리, 혹은 악기가 연주되며 발생하는 소음으로 인해 관람에 불편함을 느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아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연주자가 살아있기에, 악기가 살아있기에 당연히 존재하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이해가 되는 말이긴 하다. 이들의 감상이 틀렸다는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이들과 다르다.

오늘날 흔히 라이브 앨범이라고 부르는 음악은 말 그대로 특정 공연에서의 현장을 그대로 녹음하여 발매한 앨범이다. 이런 라이브 앨범들이 주는 현장감은 ‘그 공간에 있던 관객들이 느꼈을 감정’이다. 또 다른 종류의 ‘라이브 앨범’이 있다. 이 앨범들은 어느 공연의 무대를 녹음한 앨범도, 정오의 라디오에서 라이브로 선보여진 앨범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라이브 앨범만큼이나 훌륭한 현장감을 선사한다. 수천 관객이 뛰고 있는 무대 아래가 아닌 한 명의 아티스트가 있는 녹음실의 현장감 말이다. 많은 악기들과 목소리들이 저마다의 플러그 꽂고 효과를 입힐 때, 텅 빈 공간 자체를 연주하는 이들이 있다. 피아니스트들이다.

 

 

작년 초 발매된 그의 생전 마지막 앨범이 세상에 나오기 전, 류이치 사타모토는 이러한 소개글을 올린 적이 있다.

"2021년 3월 초순, 큰 수술을 하고 오랜 입원 끝에 새 임시 거처로 돌아왔다. 몸이 조금 회복되던 3월 말 우연히 신디사이저에 손을 대보았다. 무엇을 만들자는 의식은 없었고 단지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것으로 몸과 마음이 조금 치유될 것 같았다. (…)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일부러 있는 그대로를 제시해본다. 앞으로 체력이 다 할 때까지 이런 ‘일기’를 계속해서 써 나갈 것이다."

해당 앨범인 <12>를 들어보면 당시 투병 생활 중이던 사카모토 선생님의 가뿐 숨소리가 자세하게 들린다. 1976년 데뷔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죽음에 가까웠던 시기에 만든 음악이지만, <12>는 숨소리 하나만으로 그가 젊은 시절 발매한 그 어떤 앨범보다 그의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작업한 고레에다 히로카츠 감독의 영화 <괴물>의 사운드트랙 앨범 속 ’Monster 1’에서도 우리는 그가 힘겹게 내뱉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같은 클래식 공연을 관람하는 청중의 심장 박동과 호흡에 일치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들이라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동일한 속도로 숨을 뱉고 같은 심장 박동을 느낀다는 것이다. 남의 숨소리를 듣는건 우리에게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친다. 물론 대개는 방해가 되지만 그것이 내가 존경하는 연주자가 작곡을 하며 내뱉은 마지막 호흡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면 서래의 호흡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며 잠에 드는 해준의 모습이 등장한다. 호흡을 맞추며 긴장을 풀고 온몸을 이완시키는 것이다.

<12>와 <괴물> 사운드트랙 앨범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카모토 선생님의 숨에 나의 숨을 맞추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비록 더 이상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의 날숨이지만, 그것만큼 나에게 큰 위로를 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을 만들겠다는 목적이 아닌 오로지 소리를 듣고 싶다는 소망으로 탄생한 그의 음악은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도 치유해 주었다. 완벽만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그의 소리는 완성되었고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기에 나라는 존재까지 닿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피아니스트가 있다. 미니멀리스트, 또는 앰비언트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히데유키 하시모토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음악이 아닌 공간을 녹음한다. 작은 볼륨의 피아노, 공기 흐름에 맞춰 밟히는 페달 소리, 방음 부스가 아닌 공간에서의 백색소음들. 이 모든 소리가 함께 어울리며 비로소 그의 음악을 완성시킨다. 그의 음악은 경험을 연주하며 인간은 생각보다 남의 경험에 이입을 잘하는 동물이다. 가본 적 없는, 갈 수도 없는 그의 공간이지만, 그의 앨범을 통해 그의 공간은 내게 전달된다. 훗날 그가 사라지더라도, 그의 공간은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

여담으로 몇 년 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앨범인 <Itadaki Girl>의 사운드트랙의 시디를 소장하고 싶어 그에게 짧은 글과 함께 연락을 보냈을 때 그는 내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의 밴드캠프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때 남아있던 <Itadaki Girl>의 수량은 1/100. 그의 사인이 담긴 백 번째 <Itadaki Girl>은 내 방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나에게는 한 달이 걸려 어제 도착한 프랭크 오션의 바이닐보다도 소중한 앨범이다.

 

 

 

 

글을 마치며.

테드 창의 단편소설 <숨>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당신의 사고를 형성하는 패턴들은 한때 나의 사고를 형성했던 패턴들을 복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는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당신을 통해서."

그들의 음악을 듣는 행위를 통해, 나의 사고를 형성하는 패턴들은 한때 그들의 사고를 형성했던 패턴들을 복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그들은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나를 통해서.

 

https://blog.naver.com/sxnye/223336759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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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1.29 12:53

    저도 가끔 스튜디오 음원들을 듣다 보면 왠지 모를 공허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그게 현장감의 부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산소글쓴이
    1 1.29 20:57
    @midicountry

    감사합니다!!

  • 1.29 15:00

    "많은 악기들과 목소리들이 저마다의 플러그 꽂고 효과를 입힐 때, 텅 빈 공간 자체를 연주하는 이들이 있다. 피아니스트들이다."

    공간을 연주하고 녹음한다는 말씀이 정말 놀랍네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 산소글쓴이
    1 1.29 20:57
    @Pushedash

    항상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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