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번에 대중문화의 미래를 좌지우지할지도 모르는 중대한 주제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 주제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에 따라, 우리의 대중문화는 진보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다.
‘PC 운동’이라는 화두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2010년대 중후반이다. 거론될 때마다 매번 논란과 논쟁을 불러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해서, 이번 기회에 ‘PC’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고,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PC 운동이란 인종과 성별, 종교, 성적지향, 장애, 직업 등과 관련해 소수 약자에 대한 편견이 섞인 표현을 쓰지 말자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말한다. 배경에 문화 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를 깔고, 1980년대 미국의 대학가에서 대두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의 만화가인 데츠카 오사무 역시 ‘전쟁이나 재해의 희생자를 놀리는 것. 특정 직업을 깔보는 것, 민족이나 국민, 그리고 대중을 바보로 만드는 것’을 하지 말라는 이른바 작가 3원칙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 역시 의도는 PC 운동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기존에 경찰을 의미하는 단어인 ‘policeman’의 경우, ‘man’이 남성만을 의미하기에 ‘police officer’로 대체한다거나, 흑인 비하의 함의가 있는 ‘nigro’대신 ‘Afro-american’을 사용하자는 것이 PC 운동의 좋은 예시이다.
위에서 보듯이, ‘소수 약자에 대한 편견을 지양하자’라는 PC 운동의 대의는 분명히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 대의를 급진적으로 밀고 가려다 보면 그만큼의 마찰과 반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최근 PC 운동은 몇 가지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먼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의 여지가 크다. PC적인 표현은 문맥에 맞춰 써야 된다. 이를테면,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는 심심치 않게 ‘nigger’라는 표현이 쓰이고, 그의 활동 시대인 19세기에는 그것이 당연한 표현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마크 트웨인의 문학이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일부 극단적 PC주의자들은 언어적 표현에 집착한 나머지 문맥과 작품성은 그냥 무시하고 있다. 의도는 옳으나, 어떤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이 PC로 인한 문맥의 파괴로 인해 PC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 다음으로, 선민적인 마음가짐과 계몽주의로 인해 반발을 살 수 있다. 그 단적인 예시가 닐 드럭만을 위시한 ‘라스트 오브 어스 2’제작진일 것이다. 전작 유저에게 거부감을 주는 스토리 구조와 캐릭터간의 형평성, 설득력이 부족한 스토리로 인해 게임이 비판 받았음에도 닐 드럭만의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우리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만일 당신이 동성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면, 한 가지만 부탁 드리겠습니다. 씨X 우리를 내버려 두라고! 절대로 우리 공연에 오지 마, 너바나 음반도 사지 말고.’ 커트 코베인이 했던 말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린 의도는 자명하다. ‘우리 게임 스토리를 까면 넌 차별주의자다’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최대한 양보해서 의도가 좋았다고 치자. 허나 의도가 모든 것의 방패막이 돼주지는 않는 법이다. 메시지를 ‘전달’해야지, 강제로 주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선택적 올바름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를 예로 들어보자. 게임 ‘오버워치’에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캐릭터를 넣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일부가 동성애자라는 설정을 추가했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는 여성 캐릭터인 ‘실바나스 윈드러너’의 스토리 상 비중이 대폭 상향되기도 했다. 이렇게 PC 요소에 공을 들인 블리자드였으나, 정작 이런 PC가 제일 요구되는 홍콩에서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중국 공산당 눈치 보기 급급했다. NBA에서도 평소 흑인 인권에 목소리를 내던 선수들이 홍콩 관련 이슈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치적 올바름의 명분은 약자에 대한 존중이었는데, 그런 명분을 저버린 채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PC를 주창하던 이들의 이런 모순된 행보는 그들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떨어뜨렸다.
또한, 약자들을 우대하려다 되려 역차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움베르토 에코가 ‘미네르바 성냥갑’에서 지적했듯, 소수자 캐릭터는 완벽하게 나오고 사회적 다수가 역으로 지나칠 절도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 ‘걸캅스’일 것이다. 이 영화의 남성 캐릭터들은 너무도 무능하게 묘사되고, 그저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성 캐릭터를 띄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쓰일 뿐이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이라기보다도 차라리 이분법적인 편 가르기로 보일 지경이다.
물론 옹호 의견도 무시할 수는 없다. ‘소수자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지 않느냐?’라는 그런 의견은 분명 옳은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의 존중을 위해 다수자를 찍어 누르고, 더 나아가 혐오로 까지 번진다면 이는 그저 차별을 광기로 덮으려는 것일 뿐이다. 작금에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분란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PC주의가 지금처럼 극단으로 치달아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과 반감을 가지게 하는 것보다는, 보다 보편적인 다수를 이해시키고 수용시킬 수 있는, 그 이해와 수용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갔으면 한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 아닌가.




장문 추천 드립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이 주제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에 따라, 우리의 대중문화는 진보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다."
"이해와 수용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갔으면 한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 아닌가."
라는 부분에서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소수자의 존중을 위해 다수자를 찍어 누르고, 더 나아가 혐오로 까지 번진다면 이는 그저 차별을 광기로 덮으려는 것일 뿐이다."
저는 이 부분도 공감이 가는 군요.
스스로를 선, 정의로 규정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넘어서 그 다름을 세상에서 삭제 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탈레반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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