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나 커뮤니티, 스쳐가는 대화 속에서 이런 광경은 낯설지 않다. 누군가는 팝을 듣는다고 말하면 '가볍다'는 낙인을 찍고, 누군가는 힙합을 듣는다고 말하면 '의식 있는 음악을 아는 사람'처럼 묘사된다. 언뜻 보기엔 취향의 문제 같지만, 실은 그 밑에는 꽤나 완고한 위계적 시선이 놓여 있다. '더 깊은 음악', '덜 소비적인 음악', '생산자 중심의 음악' 같은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그리고 그 기준은 대개, 특정 장르에 대한 이해가 아닌, 특정 장르를 소비한다는 '자기 이미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가장 불편한 지점은 ㅇ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힙합을 들으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을 더 날카롭고 생각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처럼 믿는다. 동시에 팝은, 너무 쉽고, 너무 꾸며졌으며, 너무 대중적이어서 감정의 깊이를 담지 못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음악의 본질은 언제나 감정의 파장에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언제나 맥락 위에서 움직인다. 어떤 사람에게 팝은 단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팝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과 닿아 있는 결정적인 정서일 수 있다. 그 둘 중 어느 쪽도 더 옳거나 덜 진지하지 않다.
힙합이 더 문학적이거나 사운드가 더 복잡하다는 이유로, 어떤 음악이 다른 음악보다 '높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힙합에서 깊은 감정을 느끼는 건, 그 장르가 정교해서가 아니라, 그 장르 안에서 감정을 정확히 건드린 어떤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로파이한 랩 몇 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오토튠 속 흔들리는 목소리일 수도 있다. 음악은 기술이 아니라 감각의 문제이고, 감각에는 위계가 없다. 감각은 그저 '닿는다'는 사실만으로 정당화된다.
어떤 사람들은 팝에서 구원을 얻는다. 어떤 사람들은 레이지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재즈 안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그 모든 감정의 출처는 다르지만, 그것이 강도나 밀도의 차이를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음악이 감정에 도달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의 넓이를 상기시켜주는 일일 뿐이다.
장르를 나누는 건 필요할 수 있다. 언어로 분류하고 정리하는 건 비평의 도구다. 하지만 그것이 곧 누군가의 감상을 깎아내리는 칼이 될 때, 음악은 더 이상 해방의 매체가 아니다. 감정의 무게를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서열을 만든다.
가벼운 노래를 듣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감정이 가벼운 건 아니다. 대중적인 곡을 듣는다고 해서 그 감상이 덜 진지한 것도 아니다. 어떤 음악이 나를 무너뜨리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면, 그것이 어떤 장르든, 어떤 문법이든, 그 음악은 충분히 깊다.
그러니까 음악을 듣는다는 건, 누군가보다 더 낫다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와 조금 더 가까워지기 위한 행위였으면 좋겠다.
대 브 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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