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점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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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트랙의 가사가 곱씹는 맛이 있고 내용이 처절합니다. 앨범의 중심 소재 중 하나가 종교다 보니 아이러니한 느낌과 비참한 느낌이 더욱 리얼하게 다가옵니다. 키츠요지의 가사가 그런 부분을 후벼파고 때로는 사정없이 뒤틀어버리니까 와...... 하면서 여러 번 읽게 되는 가사가 많았어요.
이런 괴로운 이야기가 으레 가져다 쓰는 소재인 '엄마'가 아니라 '외할머니'가 슬픔의 원인인 것도 인상 깊었습니다. (<외할머니>)엄마의 사랑 대신 그 사랑의 부재를 메워준 외할머니의 사랑, 그리고 시한부 선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통보받은 손자.
바로 앞 트랙인 <진료비 세부내역서>도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어느 정도 제 얘기처럼 다가오더라고요. 곡의 내용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저도 병으로 앓는 사람을 바라보는 입장과 앓는 사람의 입장, 병든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 현실적인 대가의 압박감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짜증과 자기혐오 등등을 잘 아는데 키츠요지가 이 느낌을 가사로 잘 옮겼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좀 더 노골적으로!
<상담>도 제가 정신과를 다니면서 느꼈던 감정(물론 그림만 보고 나쁜 생각을 하는 지경까지는 아니었습니다)과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6~7번 트랙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정신과 약을 먹으면 나쁜 기분이 가라앉든 좋은 기분으로 전환되든 본인이 딱 '인위적으로 감정이 전환되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 느낌은 기분과 상관없이 언제나 슬프고 비참합니다. 내 상황은 그대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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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자>의 앨범 커버가 나선형인 것도 결국 '내 상황은 그대로'라서입니다. 앨범을 들으면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내려가는 기분이 들고 <동호대교>를 듣고 나서 이 계단이 둥근 나선형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서워서 자살도 못하고 한바탕 질질 짠 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손길 한 번 내밀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매일 비는 엄마의 기도 소리가 들릴 뿐입니다. 닿지도 않는 기도를 왜 하는 걸까요? 괴로운 내 인생이 나아지는 게 없으니까.
제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앨범의 초중반보다는 중후반부가 훨씬 와닿았습니다(전반부가 나쁘다는 거 절대 아님!). 키츠요지가 가사를 잘 쓰는 래퍼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부로 그 평가에 한 가지 주석을 달아야 할 것 같네요. 키츠요지는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가사를 쓰는 래퍼입니다.
P.S 앨범에서 <상실의 시대>가 잠깐 언급되는데, <상실의 시대>는 남주인공이 전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너 지금 어디 있는 거냐'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빙글빙글 도는 계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가늠해야 할까요?
진짜 앨범 섬뜩하던데
저도 뒤로 갈수록 가사에 더 몰입했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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