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흔히들 귀로 듣는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에 문제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도리어 당연한 명제를 왜 꺼내냐고 할 것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당연한 것이 맞다. 우리는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수없이 많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그 음악들은 오로지 틀어지는 것 말고는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음악 환경에서 자라, 우리는 음악을 트는 게 곧 음악을 듣는 작업이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음악을 읽지 않으며, 심히 흘린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간에 묶인 음악의 틀어짐은 마치 수도꼭지를 트는 것처럼 음악이 나온다. 물론 우리는 그 수도꼭지를 다시 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닫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음악을 담지 못한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있고, 그만큼 우리는 열심히 써낸 음악이라는 거대한 글 중 일부를 생략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음악을 튼다는 것은 한편으론 손실의 과정이다. 그리고 개인화의 과정이다. 음악을 트는 것 중에 개개인이 주목하는 부분, 즉 손실되지 않고 소중하게 안고 있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개인마다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다른 음악을 들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된다. 마치 글을 띄엄 띄엄 읽으면 아예 다른 문맥이 되듯이, 개개인은 음악을 샘플링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음악을 튼다는 행위는 단편일률적이면서도, 또 개인적이기도 한, 애매모호한 위치에 서있다. 그런 애매모호한 위치 때문에, 원래의 음악은 퇴색된다. 본질적으로 트는 음악은 다른 곳에서 명명백백히 왔지만, 우리는 그 음악의 가치를 깎는다. 그래서 트는 음악은 남이지만 깎아서 자신의 모양으로 만드는, 비효율적인 행위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그 비효율을 뛰어넘는 보편성으로 인해 트는 음악이 널리 퍼져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음악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여기서 음악은 트는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즉, 수도꼭지가 아니라, 하나의 글로서 음악을 취급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악보다. 즉, 음악은 복종되는 것 뿐만이 아닌 실천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음악을 귀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들을 수 있다. 손 끝으로, 성대로 말이다. 이러한 또다른 음악의 담아냄은 음악을 다각도로, 더더욱 정교하게 받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에 내가 그 음악을 읽어내려가는 순간, 이것은 나의 음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치 글렌 굴드가 바흐의 곡을 연주했다고 해서 글렌 굴드라는 타이틀이 없어지지 않듯이, 그것은 내가 연주함으로서 나의 음악이다. 그렇기에 음악을 손 끝으로 듣는 것은 마치 점자를 읽어나가듯이 명상적이며,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상대의 진정한 속을 느끼는 과정이다. 허나 이런 음악의 또다른 담아냄들은 대신 보편성이 매우 떨어진다. 트는 음악은 이어폰으로 혼자서 들을 수도 있고, 파티처럼 크게 스피커로 틀 수도 있는 반면에, 성대로 듣는 음악은 상황이 매우 제한적이다. 노래방에서나 부르지, 우리는 평소에 음악을 성대로 듣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성대나, 손 끝은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 귀는 대부분 밝게 태어나지만, 성대나 손 끝은 그렇지 못하다. 3단 고음을 내지르지 못할 수도 있으며, 재빠른 연주를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예전엔 이런 숙련도를 길러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하나의 우월적인 교양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극히 축소되어 그런 문화 전반이 축소 되었다. 그 축소된 끝에 남아있는 노래방이나, 밴드 동아리의 미숙한 공연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음악을 읽을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다만 이런 트는 사회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적인 자신의 연주를 들을 바에, 연주를 잘하는 사람의 것을 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연주를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트는 음악은 우리가 연주할 수 없던 어릴 때부터 들려왔다. 자장가를 대표적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아무튼, 이렇게 어릴 적부터 우리는 음악을 트는 것으로 인식해왔으며, 그렇기에 연주는 본래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는 그 낯선 것에서 무언가 욕망을 느끼는, 선망을 하기도 한다. 그것까지가 음악이 이끄는 예술이다. 그런 낯섦을 트는 것 자체로부터 보여주는 것. 그렇기에 그것에 이끌린 사람들이 연주하는 자가 된다. 허나 많은 사람들은 그 선망적인 것에서 멀어진다. 왜냐하면 먼저 사랑한, 프로들의 연주에 비해 뒤늦게 싹트는 손 끝과 성대는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음악가와 일반인을 구별하는 것은 그 따라잡음에서 먼저 사랑한 만큼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다. 여튼, 음악은 그렇게 남을 바라보며 듣기 때문에 잘 연주하는 사람들에 부합하지 않는, 그리고 또한 그것에서 자신의 의견으로 떨어지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연주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연주를 뗀 사람들에게는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갖춰진 스트리밍 시장이 우리를 달콤하게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시점에 음악의 연주 문화가 되살아나길 기도해본다. 그리고 여기 스트리밍 시장 아래 디깅이라는 극히 거센 물줄기를 마냥 제대로 받아먹지 못한 채 흘려보내기만을 반복하는 음악팬들에게 연주를 해보라 권하고 싶다. 나는 남을 바라보는 그런, 잘 연주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마추어적인, 사랑하는 것을 나는 바란다. amateur라는 단어는 라틴어 동사 amare, 사랑하다에서 유래했다. 즉, 아마추어는 그저 사랑하는 자, 그것이 좋아서 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음악을 좋아한다면 자신의 음악도 좋아해보라. 물론 음악 연주는 장벽이 높긴 하다. 악기들 부터가 몇십만원이 스타트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음악 연주를 널리 알리고 싶다. 음악을 못한다면 오히려 좋다. 음악을 읽어나가는 과정이 오래 지속되고 그 음악을 반복적으로 들으면 들을 수록 우리는 그 음악에 새로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의 손 끝에서 다시 나의 음악으로 들리우는 것이다. 나는 태블릿으로나마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물론 진짜 피아노와 달리 타건감도, 눌리는 감각도 뭣도 없지만 오로지 내가 눌러서 소리가 난다는 쾌감으로 연주를 한다. 최대한 키스 자렛의 피아노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렇듯, 나는 초등학생 시절을 다들 떠올리게 만들고 싶다. 대한민국의 초등학생이라면, 악기 다루는 학원 하나 쯤은 다녔을텐데, 지금 와서 다시 묻고 싶다. 그 손 끝에서 무엇을 느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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