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9
어떤 창작자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주제가 있다. 흑인에게는 인종차별과 노예제도, 유대인에게는 홀로코스트,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일제강점기와 군부의 독재가 그런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남긴 발자국보다 더 지나칠 수 없는 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유년 시절이다. 헤세가 골드문트와 싱클레어를 통해 들락거렸던 세계, 덤보, 찰리, 윌 같은 팀 버튼의 소년들, <Discovery>와 <Music Has the Right to Children>처럼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음악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들까지, 왜 그렇게 많은 예술가들이 유년 시절을 지나쳐버리지 못하는 걸까? 수년간 클래식 음악 작곡과 아방가르드 거장 율리우스 이스트먼의 예술 세계를 탐구하는 프로젝트에 매달려온 데본테 하인즈가 블러드 오렌지로서의 컴백을 예고했다. 앨범명인 에식스부터가 데브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런던의 외곽 지역으로 그는 어머니가 작고한 후에 이 앨범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사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Essex Honey>는 이전 작품들에 비해 잔잔하고 차분한 인상을 준다. 여백과 간주가 많고, 풍성하게 쌓아 올린 화음, 앨범의 분위기와 동떨어진 듯하지만 내내 흐름을 이끌어가는 머신 드럼이 특징이며, 이 음악을 알앤비라고 부를 만한 속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Blonde>가 <White Album>과 <Pet Sounds>의 유산을 자기 식대로 꽃피운 결과물이라면, <Essex Honey>는 블러드 오렌지가 다시 쓴 <Forever Changes>일 것이다.
앨범에는 인디펜던트의 큰 바위 얼굴인 엘리엇 스미스, 폴 웨스터버그, 요 라 탱고에 관한 이스터에그가 있고, 신시사이저, 색소폰, 통기타, 그랜드 피아노, 첼로가 믹스 속을 부유하다가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다. 나는 추상적인 클래식 연주와 80년대 신스 팝이 결합된 바로크 알앤비라고 블러드 오렌지의 음악을 묘사한 적이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는 진짜 '바로크 팝'을 들고 왔다. 새로운 챕터와 새로운 이야기에 걸맞은 새로운 양식인 셈이다. 그런데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다고 해서 모든 조건이 새로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오랜 팬으로서 데브 음악의 가장 큰 강점은 별 관련 없어 보이는 개별 믹스들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덩이를 이뤄 한 앨범을 아우르는 발군의 리듬을 만들어 낼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Essex Honey>에도 리듬이 없진 않지만 뭔가 이전만은 못한 느낌이다. 하지만 목가적이고 광활한 사운드스케이프가 주는 호소력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수록곡에서는 피아노 선율이 한가롭게 울려 퍼지고 톡 쏘면서도 귀를 사로잡는 첼로가 등장한다. 특히 첼로는 곡의 템포를 바꾸는 슬레이트 역할을 하고 브레이크 비트에 한 음을 더해 애절한 정취를 풍기는 감초가 되기도 하며 엘리엇 스미스의 <XO> 이래 제일 중요한 배역을 맡는다.
<Essex Honey>를 듣고 있노라면 흡사 <Discovery>나 <Music Has the Right to Children>을 들을 때처럼, 흘러간 시간을 돌아보기 위해 오래전 사진이나 기념품을 만지작거리는 느낌이 든다. 앨범의 사운드와 가사, 농구공을 들고 하교하는 소년, 데브가 친구들과 함께 벌판으로 여행을 떠나는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나는 자라면서 제일 소중하게 여겼던 음악들이 떠오른다. 전주가 흘러나오면 노래방을 정적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Creep 같은 팝송들, Part Time Lover나 Life on Mars?처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던 고전 음악들, 머라이어 캐리와 보이즈 투 맨처럼 늦은 밤 아무 말 없이 나를 위로해 줬던 목소리들. 그때 우리는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한편 이 앨범에는 듣기만 해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슬픔이 스며 있다. 캐롤라인 폴라첵과의 듀엣 곡 The Train (King's Cross)의 배경에는 경쾌한 기타 리프가 깔려 있지만 화자의 태도는 어둡고 비관적이다. "내 폰을 봐. 거기에 나를 집으로 인도해 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어찌 됐든 진실을 무시해." 데브는 인트로 Look At You의 적막한 기타 연주 위에서 신기할 만큼 꾸밈없는 톤으로 낭송한다. "사랑과 젊음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엘리엇이나 수프얀의 음악을 들으면 정말로 슬퍼진다. 하지만 데브는 다르다. 그의 음악은 슬프게 만든다기보다 슬픔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작가란 이런 것이다. 불러일으키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생각해 본 적 없던 상황을 고찰하게 할 수도 있다.
블러드 오렌지의 음악은 마음 맞는 이들이 모여 사는 셰어하우스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데, <Essex Honey>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손님들로 북적인다. 애콜라이트의 히로인 아만들라 스턴버그는 Mind Loaded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인 제이디 스미스는 Vivid Light에 백 보컬로 참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데브의 친구이자 지원군인 캐롤라인 폴라첵, 무스타파, 웻의 켈리 주카, 턴스타일의 브렌던 예이츠, 다니엘 시저와 로드의 목소리가 앨범 곳곳을 수놓는다. 그러나 이 목소리들은 리버브에 파묻힌 나머지 식별이 어렵고 종달새의 울음이라기보다 수려한 풍경화의 일부처럼 여겨진다. 이 특별한 음색들, 첼로, 플루트, 베이스, 빈티지 신시사이저 등 모든 소리들이 합쳐져 Essex Honey라는 단체 사진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듀서로서 데브가 가진 역량이 잘 드러난다. 이 많은 목소리와 악기들이 믹스의 여백을 촘촘히 메우고 있음에도 전혀 과하거나 혼잡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작품이었으면 진부한 답습으로 치부됐을 댄스 브레이크 또한 어쩐지 여기서는 제 나름대로의 개연성을 갖추고 있는 듯하다. 마치 춤을 추지 않으면 다음 곡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듯이.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모든 예술가들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에 의해 집을 떠나고 그 집에 대한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시켜 명성을 얻는다. 데브 하인즈는 영국의 일포드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앨범 커버는 타임스퀘어의 드래그 퀸들과 브루클린의 셋방과 거리에서 찍은 사진들로 장식됐다. 나에게 뉴욕 하면 떠오르는 음악은 <illmatic>이나 <Is This It>이 아니라, 센트럴파크의 색소폰 버스킹과 거리의 소음으로 가득 찬 <Freetown Sound>이다. 그랬던 그가 새 앨범에서는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간다. 아니, 영국과 에식스를 넘어서 그의 가족이 살던 집 카펫 위 그리고 유년 시절이라는 기억의 골짜기로 돌아간다. 프린스와 비견되곤 했던 교태가 사라지고 소박한 멜로디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블러드 오렌지라는 예명이 암시하듯 캐롤라인이나 무스타파 같은 동료들은 데브만큼이나 많은 파트를 가져가고 한 곡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또 다른 변주가 시작된다. 최고의 장면은 The Last of England에서 나온다. 피아노 선율, 데브의 섬세한 목소리, 나오미 스콧의 백 보컬, 브레이크 비트가 한데 어우러져 발군의 리듬을 만들어내기 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음성과 소음이 믹스를 채우는데, 이는 데브의 가족이 마지막으로 함께 한 크리스마스 저녁의 녹음본이다. 그 녹음본 속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소리는 거실을 가로지르며 비틀스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Freetown Sound>가 단지 뉴욕과 시에라리온을 위한 음악이 아니었듯 <Essex Honey> 역시 영국과 에식스를 위한 음악이 아닐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Essex Honey>는 이미 흘러가버린 것에 대해 애도하는 앨범이다. 엘리엇 스미스와 리플레이스먼트 같은 어렸을 적 영웅들과 사랑에 빠졌던 순간들을 애도하고, 이제 기억 속에서만 펼쳐지는 전원 풍경을 애도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비틀스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영국의 마지막 밤을 애도하고. 또 무엇을 애도해야 할까?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과 결코 내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던 기쁨에 의해 숱하게 마비됐던, 모든 것이 한없이 크게만 다가왔던, 다시 오지 않기에, 그렇기에 애틋한 우리의 유년 시절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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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in love, What's that song?
I'm in love With that s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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