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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책들 10

아드아스트라3시간 전조회 수 154추천수 1댓글 2

1. 커튼 -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의 문학에 관한 이 에세이집은 플로베르의 서간집이나 나보코프의 문학 강의, 피터 브룩의 『빈 공간』만큼이나 귀하다. 쿤데라의 소설이 그러하듯 7부 구성인 이 에세이는 쿤데라의 예술관, 예술사, 통찰을 보여준다.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왜 필요한가에 대한 고찰과 맥락에 대한 탐구, 그리고 쿤데라가 약소 국민으로서 가지는 고뇌까지. 이 다채로운 예술과 소설에 대한 깊은 고민은 사실 인간성에 대한 탐구에 다름 아니다. “삶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 모든 종류의 ‘선(先)해석의 커튼’을 찢는 것이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말한다. 사실 이것은 소설만이 아닌 모든 예술의 의무이다.



2. 세계를 향한 의지 - 스티븐 그린블랫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직업인이자 영향력 있는 인간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셰익스피어의 삶은, 그가 재창조하고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덜 알려져 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그 당시 인물치고 공식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가 세계 문화사와 영어사에서 차지하는 범접할 수 없는 위상을 생각하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이 전기는 그 자체로 훌륭한 작가론이며 평전이고, 하나의 셰익스피어 해석론이다. 저자는 광대한 자료를 살피고 셰익스피어의 업적들을 넘나들며 한 위대한 지성의 삶을 복각해낸다. 종장에서 그가 프로스페로처럼 자신의 힘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 그의 예술이 가지는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서술하는 결말은 그의 희곡과 언어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이 놀라운 전기가 납득시키는 사실은,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인간성의 다채로움을 담아내는 놀라운 소화력에, 그리고 동시에 그 자신을 지켜내는 힘에 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삶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과 삶의 사소한 일상성을 모두 담아낸 드문 예술가다. 그러니까 그의 희곡들은 곧 삶 그 자체이다. 그의 인생이 곧 그의 예술인 것처럼. (원제 Will in the World는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다. 셰익스피어는 세계의 것이다.)



3. 빈 서판 - 스티븐 핑커


스티븐 핑커는 신뢰할 수 있는 작가인데, 이 신뢰성은 첫째 그가 일류 문장가라는 사실에 있고, 둘째는 그가 보여주는 통찰에 있으며, 마지막은 그가 선보이는 당당함에 있다.


‘인간의 본성은 만들어지는가, 교육되어지는가?’ 이 이분법적 기준에서 그는 벗어나, 결국 하나의 결론—인간의 서판에는 이미 철자들이 새겨져 있다는 것—에 도달한다. 그가 본인의 의견을 전개하고, 빈 서판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논박하는 과정은 시원하다. 다만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영역에서 보이는 환원주의적 태도나 비약, 혹은 지나친 낙관주의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툼한 논픽션은 하나의 중요한 일을 해낸다. 독자에게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개안(開眼)’하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메리 미즐리의 『짐승과 인간』 옆에 두고 있다.



4. 모든 것은 빛난다 -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우리는 어떻게, 왜 사는가? 평전 『릴케』(볼프강 레프만)의 저자는 이 질문을 “신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 시대에 인간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드레이퍼스는 이 질문을 정확히 던진다. 호메로스에서 페더러까지, 이 대중 철학서는 다양한 분야를 거침없이 경유하며 반짝이는 모든 것들을 탐구한다.


이 철학서의 절정은 단연 『모비딕』에 대한 부분이다. 성경과 셰익스피어, 체호프에 비견될 몇 안 되는 그 책 말이다. 그곳에서 작가들은 신이 죽은 이후, 허무주의와 전체주의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에세이만큼 정확하게 찌르는 책은 드물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의 고결한 대학 졸업 축사에 담긴 한계, 경이로운 공유의 순간이 가지는 두려움까지. 이 책은 짧지만 각각의 파트가 독자에게 씨앗을 심는다. 그리고 그 씨앗은 발아해 인간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독자가 덮고 나서 찾아나서게 만든다.


5. 아버지 – 플로리앙 젤러


플로리앙 젤러의 『아버지』는 영화화되었고, 그 작품 역시 걸작이다. 하지만 이 연극/희곡은 단연코 21세기의 대표작 중 하나다. 젤러가 보여주는 놀라운 능력은 공간과 인물을 연결시키는 이미지 창조력에 있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기억처럼, 빈 무대와 앙드레의 이미지는 마치 『햄릿』, 『맥베스』, 체호프의 연극, 베케트의 연극에 비견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반복되는 시계의 상실, 반복되는 대사들은 알츠하이머병을 직접 겪게 만드는 동시에 늙음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6. 필로우맨 – 마틴 맥도나


마틴 맥도나처럼 연극과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손가락 하나쯤은 기꺼이 내줄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새롭다. 그의 희곡을 학수고대하던 나는 참다 못해 원서를 뉴욕 여행 중에 구매했을 정도였다. 『필로우맨』의 번역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필로우맨』은 이야기 자체에 대한 이야기, 연극에 관한 연극, 체제와 개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실재와 허구에 대한 탐구이다. 이 작품에 담긴 블랙 유머는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고, 동시에 삶에 대한 거대한 농담이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당신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이 희곡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은 그 질문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7. 화염 – 와즈디 무아와드


『화염』은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으로, 드니 빌뇌브의 영화 『그을린 사랑』의 원작이다. 단호히 말하자면, 『화염』은 영화보다도 훌륭한 작품이며, 21세기를 대변할 문학 중 하나이다.


나를 완전히 압도한 순간들은 잔느의 수학 강의와 시몽의 권투 장면들이 교차되는 장면, 무덤에 세 물병을 붓는 장면, 그리고 끔찍한 진실을 마주한 후 침묵으로 맞서는 남매의 엔딩에서 찾아온다. 그 모든 장면은 아름답고 처연하다. 그리고 나왈이 존엄성을 울부짖으며 남기는 증언.


다시 말하자면, 『화염』은 레바논의 비극적 역사와 끔찍한 고통을 다루는 작품이자, 오이디푸스 신화와 안티고네 신화를 재해석한 서사이며, 세대 간 화해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보는 것과 아는 것, 기표와 기의 사이, 증언과 침묵, 시간과 세대, 증오와 애정을 모두 포용하고 뛰어넘는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문학이다. 와즈디 무아와드의 성취는 정말이지 눈부시다.



8. 나를 보내지 마 – 가즈오 이시구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학을 설명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섬세한 문체와 양식은 매우 아름다우며, 그 문체로 성취된 뉘앙스와 분위기는 모든 것을 납득시킨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분위기’에 새겨진 정조(情調)가 매우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지 마』는 SF의 형식을 빌려 기억, 인간, 사랑, 윤리, 마음이라는 여러 주제를 탐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가즈오의 작품들은 언제나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시선이다.



9. 철학자와 늑대 – 마크 롤랜즈


마크 롤랜즈의 이 에세이는, 제목만으로도 오래 기억될 만큼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더불어 가장 아끼는 21세기 에세이 중 하나이다. 사실 나 역시 룰루 밀러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그 책에 더 마음이 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나의 고양이라는 사실, 자고 있는 고양이 옆에서 책을 읽는 순간이 나를 가장 살아 있게 만드는 순간임을, 그 아이의 눈을 마주하고 끌어안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자 선택은 쉬워졌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것도 고양이의 시선 아래 내가 발가벗은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이 순간들보다, 이웃의 타자성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늑대 브레닌과 함께 살기 시작한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브레닌과의 삶, 그 일상에서 다가오는 질문들을 서술한다. 그렇게 던지는 화두들은 삶에 대해, 관계에 대해, 선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에세이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는, 내가 내 고양이의 눈을 바라볼 때 그 고양이가 내게 주는 어떤 것—감정이든 사유든—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삶에서 중요한 것이 행복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에서 오는 위엄임을 느끼게 한다.


P.S. 영원히 사랑할 내 동생 몽실이에게, 친한 누나가 생일 선물로 준 츄르를 먹일 생각에 신나며.



10. 룩 백


『룩 백』은 연출력의 승리이자, 서사의 승리다. ‘문’이라는 소재를 다양한 의미로 변용시키고, ‘등’이라는 이미지를 반복하여 새로운 의미의 차이를 생성해내는 연출은 경탄스럽다. 평범해 보이는 소재를 결국 보편적인 주제로 전환시키는 서사 구성과 감정선은, 단편만화라는 형식이 도달할 수 있는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내가 이 단편을 고른 이유는, 나 역시 사랑하던 친구와 서로 싸우며 결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런 일들은 일어난다. 『룩 백』은 그런 나에게 우산이 되어준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이제는 함께한 기억조차 분노와 실망감으로 얼룩진 너에게 보내는 편지다. 나의 열등감과 화, 배신감과 그리움, 짜증, 그리고 불현듯 네 선물을 보며 떠오른 상처를, 무엇보다 나의 사랑을 담아 전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편지를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문을 열고 나올 수 있게 해준 나의 후지노들에게 고맙고,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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