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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쓴 새벽 헛소리.

아드아스트라5시간 전조회 수 182추천수 2댓글 3

1321년,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정치인이자 시인은 본인의 이름을 불멸의 암각에 새길 서사시를 완성했다. 후에 신곡이라는 이름이 붙게될 3부작의 첫문장은 이러하다. 

우리 인생길의 한 중앙, 올바른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을 헤매이고 있었다.   

이 문장의 놀라운 점은 바로 라틴어가 아니라 피렌체 속어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은 여러 이유로 피렌체 속어를 본인들의 언어로 삼았는데 믿기지 않겠지만 거기에는 단테가 신곡을 피렌체 속어로 썼다는 사실도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선포하고 라틴어였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루터의 의도와 별개로 신교의 탄생은 신교가 성경의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에서 결국 해석의 다양성을 탄생시켰다. 이는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그의 번역은 라틴어를 절대적 위치에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1601년, 아들을 잃은 한 극작가는 아버지의 복수를 계획하는 한 왕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여기서 그는 왕자의 아버지로 출연해 필생의 연기를 펼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언어구사력을 소유한 자의 최고작답게 이 작품은 그의 언어를 영원히 변혁시키고 본인의 명성을 불멸에 올리고 문화사를 본인 이전 이후로 나눈다. 이 작품의 가장 유명한 구절은 이렇다. To be or not to be. 많은 해석이 오가는 문구이지만 셰익스피어의 경이로운 이미지 창조력과 비유와 상징의 창의적 사용, 믿기지 않는 언어굴절력으로 빚어낸 수많은 문장들 중에서도 앞선에 서있는 이유는 이 문구가 ‘선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1781년 후대인들을 괴롭히게 하기 위해서 흄의 저작을 읽은 다음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계속 주무셨으면 좋았겠으나)칸트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논쟁을 융합시키고 우리의 이성과 지식을 분류했고 무엇보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는 정신이 사물의 작용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정신의 작용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신이 능동적으로 사물의 인식에 개입하여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인식의 중심을 사물이 아니라 정신에 있음을 밝혔다. 

 네 명의 위대한 천재, 이탈리아, 독일, 영국 세 제국주의 국가들이 저지른 끔찍한 재앙들에 약간의 참작요소로 생각될 인물들을 꺼낸 이유는 명확하다. 이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주체의 탄생을 예고하고 이끌었다.

 그래서 개인의 주체성은 무엇인가? 

이를 논하기 위해 먼저 이야기할 것은 근대라는 개념이다. 근대는 하버마스가 말했던 것처럼 1800년을 중심으로 이전의 3세기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방향을 틀어본다면 근대는 일종의 태도일 수도 있다. 근대의 어원이 바로 ‘modernus’ 라는 단어이고 이는 가까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근대는 새로운 시기를 탐지하는 태도로 번안할 수 있다. 

 이런 태도로서의 근대를 논하기에 앞서 다들 유럽의 근대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실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 시기는 유일하게 인류가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안목을 공유했던 시기라는 지적이다. 지극히 서구중심적인 관점이나 우디 앨런- 우리 시대의 가장 유쾌하며 지적이고 짜증나지만 그래도 항우울제마냥 찾게되는- 의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인물들이 보인 과거지향- 노스탤지어적 태도를 감안하면 분명히 의미심장한 신호다. 예컨대 근대는 새로움에 대한 추구이다.

 그렇다면 근대와 개인의 주체성의 연결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바로 근대의 원동력 지금보다 나은 미래라는 개념이 인간 주체의 탄생에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주체성을 획득함으로써 근대는 시작되었다. 주체라는 단어의 시원은 그리스어로 하나의 원리로서 자연을 뜻하는 피시스를 포함하는 단어- 휘포케이테논- 에 있다. 그리고 이 그리스어 개념은 라틴어로 subjectum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주체를 뜻하는 단어- subject로 변했다. 즉 주체와 인간은 이 때까지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밀란 쿤데라는 근대의 출현을 유럽 역사의 관건으로 해석한다. 신이 부재하는 신이 되었고 인간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밝힌다. 


신의 부재는 다들 아는 전언을 연상시키는데 그것은 니체의 아포리즘 ‘신은 죽었다’ 이다. 니체의 이 선언은 시대를 지배하는 하나의 가치가 실종되었음을, 그러므로 인간이 매순간 삶의 의미를 발명해야한다는 전언이다. 이 주장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서 그 질서와 규칙성을 우리는 스스로 집어넣는다.’

우리는 삶과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이자 정신이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물론 더이상 종교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선택의 영역이다. 하지만 법과 자본은 다르다. 그것들은 선택의 영역이기는 하나 사실상 반강제되어있다. 왜냐하면 모두 각자만의 기준을 가지고 살기에는 인간들은 다양하고 그 다양성에는 상충되는 요소들이 있어 갈등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니체가 원하는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법과 정의,인권,돈 이라는 우리가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허구의 가치를 발명했다. 다른 의미로 여전히 신은 살아있다. 푸코의 지적대로 우리의 생각은 여전히 권력구조의 영향 아래에 있다.그러니까 우리를 지배하는 이성 역시 역사와 상황에 따라 출현하는 경우들 중 하나이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다. 


니체의 주장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는 베케트가 제시한다. 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런 대사가 있다.

'이젠 어떡하지?'

고도를 기다리며는 죽은 나무 앞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두 남자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이 이미지는 인간실존의 상태를 압축적이고 아름답게 제시한다. 그들은 막이 끝나기 전에 '이제 갈까'라고 하지만 지문은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연극은 무대가 인물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곳이며 두 인물은 탈출할 수 없다. 그들이 암시하는 자살 말고는. 

 이들의 절망은 할 일이 없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고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의미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그 무엇도 정해져있지 않다는 인식이 주는 공포와 권태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발명하고 불확실성을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는 무대로 삼을 정도로 강인하지 못하다. 이런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는 언제나처럼 셰익스피어에게서 발견된다. 예로 맥베스의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난 태양이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주가 이제 무너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불멸이 된 독백이 있다.


그녀가 이 다음에 죽었어야 했는데.

그런 소식을 언젠가 한 번은 들었어야겠지.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내일도.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하루하루 더딘 걸음으로 기어가는 거지.

우리의 어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보여주지.

우리 모두가 죽어 먼지로 돌아감을.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은 그저 걸어다니는 그림자,실력없는 연극배우!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녀도

얼마 안 가 잊히고 마나니.

마치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와 같아서,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 아무 의미도 없도다.



이 지독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는 인간의 삶에 각인되어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위대한 예술이고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 그들 중에서도 아름다운 숏을 하나 고르라면 액자틀의 그림자로 표현된 두 주인공의 모습을 택하겠다. 빛의 그림자로 표현된 그들은 정말로 무력하고 마음 아프게 희미하다. 인간실존은 그렇게 약하다. 그래서일까 체호프가 이런 대사를 남긴 것은.


이건 무슨 나무죠?

''느릅나무'

'왜 저렇게 시커멓지?

''벌써 저녁이니까, 사물들이 전부 검게 보이는 것이에요'



체호프의 『갈매기』에 나오는 이 짧은 대사로 위대한 예술가의 천재성을 알 수 있다. 연극 초반부, 나무에 주목하면서 두 연인의 어긋남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체호프이기에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저녁이어서 전부 검게 보인다는 말은 결국 인생 전체에 대한 은유가 된다. 인간은 검은 나무이며, 그 말 속에 서글프고 유약한 인간의 실존이 담겨 있다. 이런 섬세함은 오직 체호프만이 가능하다고 느낀다.


나는 ‘살아가다’라는 말이 가끔은 어색하게 들린다. 우리는 살아가지만, 그것은 사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살아가다’와 ‘죽어가다’는 결국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살아서 뭐하지’라는 물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동시에 우리는 생존에 대한 압박 속에서 삶에 대한 질문을 점점 더 할 수 없게 된다. 삶에 의미가 있을까. 그런 걸 고민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To be or not to be.”

지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인간들 중 하나가 인류에게 남긴 이 문장은, 그 존재만으로도 질문이 된다. ‘존재냐 부재냐’, ‘사는 것이냐 죽는 것이냐’, ‘하는 것이냐 마는 것이냐’ 등 다양한 번역이 가능하지만, 이 be는 그 모든 함의를 포괄하고 있다. 삶이 고통인 이유는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극장은 수많은 영화들을 상영하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만을 볼 수 있다. 삶은 내가 선택한 길과 가지 않은 길들의 총합체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사실 태어난 순간부터 대부분의 가능성은 사라져 있다.


삶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책임이고, 산다는 것은 그 가능성들을 하나씩 지우며 죽어가는 일이다. 나라는 존재 역시 선택하지 못한 책임이라고 느낀다. 그래서일까. 저 문장으로 고뇌하던 영혼은, 인간이 무한 공간의 왕이면서 동시에 먼지의 정수라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다. 정말이지 인간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이고, 인생은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바보의 무의미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근대는 인간의 주체성 성취로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이 삶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표현대로 ‘날마다 새로이 생기는 무거운 욕구에 시달리며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기 위해 대체로 일평생 걱정하며 살아간다.’ , ‘모든 의욕의 기초는 결핍, 부족 즉 고통이다……의욕의 대상이 제거되면 인간은 공허와 무료함에 빠진다.’ 



100년도 되지 않은 과거에, 600만 명의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들이 죽었다. 아니, 도륙당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하지만 더 윤리적이고 정확한 문장은 ‘그들 자신이라는 이유로 600만 번의 죽음이 있었다’가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든, 1980년의 광주든, 드레스덴이든, 벨기에가 압제하던 콩고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든, 가자 지구든, 우리는 삶과 개인이 말살되고 폭력만이 남은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건, 이 모든 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누군가의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세상에는 눈물이 일정한 분량밖에 없어, 다른 데서 누가 또 울기 시작하면 울던 사람이 울지 않게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은 그냥 흘러가고 반복된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과 역사는 고통 아님 권태이고 그것의 반복이다. 우리는 반복의 늪을 부유하면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반복에 희망이 있다. 들뢰즈의 통찰대로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것은 차이이다. 우리의 매일매일은 반복되지만 어제와 오늘 ,내일은 다르며 그들 사이의 차이가 반복된다. 그런 의미에서 반복은 변화이며 새로움이 탄생하는 모태이다. 동시에 반복은 우리가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리고 반복으로 소환하기에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발판이 된다. 그래서일까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에서 살바도르가 뒤를 돌아본 이유는. 과거를 다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반복을 어떻게 우리는 맞이하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하는가.



나는 생존만이 유일한 가치였던 수용소에서, 몸을 씻는 행위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작가이자 화학자를 떠올린다. 그는 동료의 말 때문에 손을 씻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킬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선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건 가능하다. 죽을 것이 확실하더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능력이기에, 온힘을 다해 지켜야 한다. 그 능력이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동물들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이제 내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라고 느낀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뭐? 너의 고통이 그런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비극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

정확한 말이다. 고통에 서열은 없지만, 내 고통은 약하다. 그런 비극들과 나란히 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대다수는 생존을 위한 분투와 사랑받기 위한 부박한 노력들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렇기에 감히, 아주 조금은 얹어볼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와 책,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남자를 더 좋아하는 양성애자, 지적인 사람, 인어를 잘 다루는 사람, 피해의식과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이기주의자, 어린 시절 이혼과 재혼, 그 사이에 얽힌 가정불화와 학대에 시달린 사람, 매력 없는 사람, 외톨이, 믿음직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우울증 환자, 10대 시절까지 가난에 시달린 사람, 자해하는 사람.

나는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남들은 또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고독과 자기 연민, 자아도취에 빠진 존재가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생존에 대한 압박과 자기 연민, 애정결핍은 나의 지옥이고, 모두가 각자의 불지옥을 안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삶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살아야 할까.


Even so.

그럼에도.

이 단어들은 가난한 노동자이자 알코올 중독자이며, 동시에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한 남자의 마지막 시에 등장한다.

“그럼에도, 너는 이번 생에서 네가 얻고자 한 것을 얻었나?”

“그렇다.”

그 남자는 even so라는 말 안에, 그 많던 삶의 고통을 욱여넣고 삶을 긍정하고 있다. 


“Say yes to life, in spite of everything.”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삶에 ‘예’라고 답하라고 한다. 이 말도 충분히 멋진 말이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가 남긴 말이라면 전혀 다르게 들린다. 그 everything 안에 우리는 모든 것을, 즉 끔찍한 폭력과 생존 투쟁, 애정결핍, 고독, 무의미함, 그것들이 반복되는  삶 자체를도 넣을 수 있다. 


그렇다면 ‘in spite of’에 나는 무엇을 욱여넣을 수 있을까.

별 하나하나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호명하던 시인을 떠올린다.

나 역시 하나씩 불러보고 싶다. 히치콕, 존 포드, 자크 타티, 박찬욱, 폴 토마스 앤더슨의 걸작들과 평범한 영화들, 셰익스피어, 입센 그리고 이름 없는 이들의 희곡들, 윌리스 스티븐스의 시와 글을 배우고 처음으로 시를 쓴 이름 모를 할머니, 내 발을 어루만지던 바다, 봄을 실어오던 바람, 버스 안에서 나를 툭툭 건드리던 햇살, 여전히 나라는 인간을 견디는 내 친구들, 혹은 나로 인해 떠나버린 이들, 내가 잘못한 사람들, 내가 책 읽을 때 안겨오는 고양이, 펩 과르디올라와 메시, 데브라이너의 축구, 그리고 무엇보다 에드워드 양, 체호프, 카버, 수프얀 스티븐스를 열거하고 싶다.


그리고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 안에, 나를 아프게 했던 모든 것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든 것들을 담고 싶다.


“알기 위해 믿는다.” 안셀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삶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별거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과 영광을, 상처와 사랑을 기쁨과 슬픔을, 존엄과 비참함을 같이 담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합친 다음 반복시킨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To be or not to be.” 존재냐 부재냐 등 무엇으로든 해석해도 정확하지 않은 이 문구는 대립되는 것들 사이의 고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장을 붙잡고 고뇌하던 청년은, 결국 그 독백을 멈춘다. 그리고 진실된 친구와의 대화를 ‘let be’로 마무리한다. 있는 그대로 두겠다는 뜻이 된다. 나는 그 말이 아우슈비츠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햄릿은 삶을 마주하고, 그 끝이 패배일지라도 받아들인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 삶과 죽음, 존엄과 비참함, 상처와 사랑, 고통과 영광이 하나되어 반복되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묻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있는데도, 정말로 살겠느냐고.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yes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반복하는 것. 매번 다르게 차이를 발생시키며 반복해야한다. 그것이 이 무의미한 삶에서 미래를 나아가 가치를 창조하는 근대의 주체로서의 삶이다. 




옛날에 엘이에 쓴 글이기도 하고 커뮤망령 시절 작성한 헛소리 수정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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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4시간 전

    미친 고학력 엘붕이

  • 4시간 전

    갠적으로 저는 삶에 관해선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지금 즐기고 있는 기쁨을 긍정한다면, 이때까지 겪어온 모든 고통이 지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고통또한 긍정된다는 것이

    뭔가 설득력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니체가 다시 한번을 말했던 것 처럼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줘요.

  • 4시간 전

    이거 추억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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