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4
아이작의 유약한 음색, 체임버 팝과 프로그레시브의 절묘한 배합, 아득한 아르페지오와 그것을 몰래 지켜보는 듯한 현장감 등, 문득<Ants From Up There>가 발표되던 날이 떠올랐다. 이 고유한 정적과 구성미를 자랑하는 앨범은 바늘구멍 같은 취향의 틈새를 통과해 기어코 엘리트주의 청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유약한 음색을 가진 아이작 우드의 이탈은 도리어 더 많은 열성 팬을 양산했다. 대부분의 전설은 그것이 재현 불가능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전설로 불리기 때문이다. 남은 멤버들은 새로운 보컬리스트를 찾는 대신 자신들이 그 역할을 분담할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윈 버틀러 없이 나머지 멤버들이 노래를 부른다면 그것은 아케이드 파이어일까, 아닐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 그들이 어떤 음악을 들려주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변화를 향한 첫 번째 쇼케이스는 이들의 첫 번째 라이브 앨범 <Live at Bush Hall>로부터 시작됐다. 멤버들은 정말로 보컬의 역할을 분담했으며, 거기에는 나의 아둔함으로는 좀체 알아차릴 수 없지만 분명히 무언가 달라진 여자친구 같은 음악이 담겨 있었다. 이 미묘한 변화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작년 초겨울 나는 블랙컨트리, 뉴 로드의 첫 내한공연을 찾았다. (Up Song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예상과 다르게 공연은 대부분 신곡으로 진행됐으며 이 때문인지 현장 분위기 또한 모두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수북이 쌓여가는 눈과 함께 여운을 곱씹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공연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아이작을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Ants From Up There>도 마찬가지였다. 예감이 나쁘지 않았다. 블랙컨트리는 몰라도, '뉴 로드'로서의 정체성은 변함없어 보였으므로.
사용된 악기로만 보자면 <Forever Howlong>과 1967년 녹음된 <Odessey and Oracle> 사이의 시대적 간극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과장 좀 보태서 신시사이저와 맥북만 있으면 세상 모든 소리를 구현할 수 있는 시대에,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 클라리넷, 색소폰이 이끌어 가는 앨범을 듣는 것에는 그 자체로 색다른 맛이 있다. (6명의 멤버 전원이 예술 학교 출신의 숙련된 연주자로서 이번 앨범에서 각자 3가지 이상의 악기를 연주했다) 우리 모두 불안과 절박함이 공존하는 아이작의 바리톤에 압도된 적이 있지만, 나는 <Forever Howlong>이 좀 더 보컬 중심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들이 아이작의 그림자를 지우고 싶었다면 보컬의 분담이야말로 그 길로 통하는 웜홀이었던 셈이다. 부시 홀과 내한공연 그리고 이번 투어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라이브를 뒤따르면서 제일 인상 깊게 여겼던 것은 멤버 모두가ㅡ특히 타일러 하이드!ㅡ자기만의 컬러가 뚜렷한 보컬리스트라는 점이었다. 한데 지금처럼 여러 명이 보컬을 분담할 경우 품앗이 래퍼들의 경우처럼 음악이 난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블랙컨트리, 뉴 로드가 주도한 윈드밀 신이야말로 정교함과는 거리가 먼 집단 아니었던가. 또한 아이작의 사사로운 농담과 절규로 가득 찬 음악보다는 모두가 연주하고 모두가 노래하는 지금의 방식이 그나마 블랙컨트리, 뉴 로드에 더 어울리는 듯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정교함은 이들의 무기가 아니었다.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변화무쌍한 곡 구성, 회오리치는 듯한 루이스 에번스의 알토 색소폰, 거기에 더해 고전의 심벌과도 같은 사운드를 빌려와 자신들의 발상과 충돌시킨다. 역동성과 즉흥성이야말로 블랙컨트리, 뉴 로드의 창과 방패였다. 드러머 찰리 웨인은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 각종 라이브 앨범과 연극, 뮤지컬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아닌 게 아니라 Socks는 꼭 클립화되어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를 떠돌며 15초 정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뮤지컬 명장면처럼 막을 연다. 멜로디와 코러스에는 흥얼거리고 싶을 만큼 묘한 중독성이 있으며 드럼을 포함한 모든 세션은 곡예를 하듯 조심스럽게 타일러의 목소리를 뒤따른다. 비슷한 형식의 Two Horses에서는 바에서 제임스 딘을 닮은 남자에게 유혹과 배신을 당하는 여행자의 로드무비를 그리고 있다. 애달픈 어쿠스틱 기타로 시작했다가 두 인물이 함께하는 순간 드럼이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데, 독창적인 리듬과 역동성의 물꼬가 되는 찰리의 드럼은 오늘날 블랙컨트리, 뉴 로드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라 할만하다.
느슨한 비유법과 간결한 시구를 좋아하는 메이는 명실공히 이 밴드 최고의 작사가일 것이다. For The Cold Country에서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는 은빛 기사가 되고, Forever Howlong에서는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한 남자가 애완견의 배변을 치우는 사이 그 개와 눈을 마주친다. 그녀에 따르면 <Forever Howlong>은 또다시 찾아온 회색빛 아침일 수도 있고, 흐릿한 멜로디 위에 쓰인 덧없는 독백일 수도 있다. 반면 조지아는 장난기 넘치는 미니멀리스트다. 하프시코드와 만돌린, <Pet Sounds>를 연상시키는 애드리브, 유려하지만 감정적 파고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보컬까지, 그녀는 자신들의 커리어에서 제일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곡 Besties를 작곡했다. 반응이 어찌 됐든 간에 많은 팬들의 생각처럼, 조지아는 밴드의 성격이 변화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가장 큰 놀라움을 안겨준 건 타일러였다. 이전까지 타일러가 특이한 자세로 베이스를 연주하는 괴짜 세션이었다면, <Forever Howlong>에서의 그녀는 흡사 조앤나 뉴섬과 피오나 애플을 반반씩 섞어놓은 듯하다. Nancy Tries to Take the Night에서 타일러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창부 캐릭터 낸시의 이름을 빌려와 디킨스의 방식 그대로 낸시를 비극 속에 밀어 넣는다. 비극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위로라도 된다는 듯이.
For The Cold Country에서는 패배를 경험한 한 기사가 자신이 걸어온 행로를 되돌아본다. 앰프의 출력량이 증가하고, 색소폰과 베이스는 천둥 치듯 울려대고, 비올라가 큐사인에 맞춰 비명을 지르는 동안, 피아니스트 메이 커쇼는 나른하고 최면적이면서도 동시에 진심 어린 음색으로 내러티브를 풀어낸다. 각 벌스마다 시점, 형식, 청자가 모두 다르다. "우리는 나무에 걸려 찢어진 연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이제 해는 집을 향해 돌아갔지만, 우리의 손은 서툴게 맞닿아 있어." 이 작은 서사시는 아마도 앨범의 주제이자, 음악을 통해 전하는 블컨뉴로의 메시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Forever Howlong>은 특별하다. 전작들의 화려한 명성은 잠시 잊어버리고 6명의 멤버 개개인이 보여주는 다재다능함에 귀 기울여 보자. <Ants From Up There>가 붕괴의 사운드트랙이었다면, <Forever Howlong>은 그간 화음을 내던 이들의 목소리로 신중히 돌탑을 쌓는 재건의 과정일 것이다. 이번에는 독보적인 호소력이 아닌 '화음'이 마이크를 잡는다. 과거 불가해한 독창성과 고통의 강도로 정의되었던 밴드는 지금 이 순간 주지의 사실 한 가지를 상기시킨다. 우리가 앞으로 하려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함께 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함께, 함께 연주하는 것, 영원히 함께 연주하는 것, 그 영원이 얼마나 길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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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s From Up There'가 발매됐을 때,
아이작 우드가 탈퇴한 블컨뉴로를
윈 버틀러가 없는 아케이드 파이어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말도 안 된다는 의미를 담은 표현이었는데,
'Forever Howlong'을 듣고 나니
갑자기 윈 버틀러가 없는 아케이드 파이어가 보고 싶네요.
어찌 됐든 간에
블랙 미디처럼 끝내는 것보다는
블컨뉴로처럼 함께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입니다.
쌀쌀한 날씨에 처음 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감상하는 블컨뉴로.
이거 참기 쉽지 않죠. ㅎㅎ
벌써부터 겨울이 기다려집니다
캬 정말 잘 읽었습니다
선공개 싱글이 나왔을 땐 부쉬 홀 앨범도 꽤나 놀라웠지만 그것보다도 더 희망적인 음악을 들고 와서 충격을 먹었었죠
레딧 등지에서 블컨뉴로의 ‘팬’들이 이 앨범을 단지 예전과 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까내리는 건 정말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번 앨범의 진가는 호소력이 아니라 화음에 있다는 말이 인상깊네요.
사실 아이작 탈퇴 이후의 BCNR에는 애정이 안 가서 이번 내한공연은 고사하고 올해 신보도 별로라고 느꼈는데, 글을 곱씹으며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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