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투로
이승윤은 워드플레이를 즐긴다. 워드플레이란 동음이의어, 몬더그린 등을 이용한 말장난을 의미한다. 유명한 워드플레이로는 올티의 "세대를 뒤집어 대세가 된 지코, 딘 / 이건 도시를 뒤집을 시도지", 스윙스의 "넌 요즘 권투계랑 똑같아 / 알 리 없지" 등이 있을 것이다. 인투로는 앨범의 인트로라는 의미와 사람이(인) 싸우러(투) 가는 길(로)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듯한 제목이다. "어찌 되어 나는 피투 / 되어 여기에서 기투"로 시작하여 "가치들은 전부 피투 / 성이인 채로 다 실투" 라인은 피투된 자신의 삶과 피투성이가 된 가치들을 같게 보도록 하는 언어유희의 일종이다. 진리란 <강철의 연금술사>의 그것처럼 실재하는 게 아니며 각자의 삶과 가치로 만들어내는 것이나, 그것들이 훼손된 현재 이승윤은 진리를 탐하지 않는다. 그저 그 피투성이 된 가치, 의미 없는 의미 위에서 "진리 없는 삶 속의 궤도를 / 난 진짜 다 돌아 버릴 거야", 마치 미친 듯이 군림할 것이라는 인트로다. 앨범의 타이틀인 <역성>을 향해 나아갈 길, 인투로다.
2. 폭죽타임
폭죽의 모양새를 보고 만든 듯한 펑펑 터지는 노래다. 폭죽의 불꽃은 자상처럼 죽 뻗어 드높은 하늘에 상처를 내는 듯 보인다. 후렴 전으로는 낮, 후로는 밤을 묘사하고 있다. 스쳐지나가는 듯한 낮자락의 햇살은 우리 삶 순간순간의 하이라이트들, 다시 오지 않는 시간들이다. 그 시간들을 긁어모아 길고 긴 밤의 얼굴에 폭죽을 터뜨려 밤을 낮보다 밝히겠다는 당돌한 노래다. 멜로디나 코드 없이 일정한 기타 사운드 위에 얹히는 이승윤의 얇게 깎은 목소리가 악동을 연상시키다, 그 폭죽 같은 목소리 위로 밴드 세션이 하나씩 얹히고 후렴에는 코러스까지 더해진다. 화자가 쏘아올린 폭죽이 펑펑 터지면서 모두가 역성에 동참하기 시작한다.
3. 검을 현
화자는 이제 역성혁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 이 트랙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기존의 케케묵은 가치를 자신의 군대와 함께 부정하고 있다. 검을 현은 한자의 훈음이기도 하나, "펜은 검보다 강하다"라는 말을 이용한 말장난이다. 그 말을 한 사람들은 검 대신 펜으로 싸우나, 음악인인 화자는 검을 악기의 현으로 쥐고서 군림하던 가치들, 군림하던 노래들을 벨 것이라 선언한다. 말처럼 노래 안에서 베이스와 기타는 끊이지 않는다. 폭죽타임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코러스도 "필요 없어 난 / 필요 없어 난 / 못 박아 넌 / 날 못 박아"로 동참한다. 노래 안에서 쓰이는 비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체스판이다. 흑백뿐인 체스판, 그 밖에 존재하는 나이트로 자신들을 비유하고 마치 나이트가 움직이듯 말들 뒤에서 대각선으로, 말 그대로 "어딘가에서나 나타나" 벤다. 노래를, 시대를, 그리고 판도라를 벤다. 판도라가 가지고 있는 전사를 생각하면 판도라를 좋고 나쁨을 규정하는 기존의 가치, 억압의 근원으로 해석한 듯하다.
4. 역성
무리를 끌어모으고 출사표를 던진 화자는 본격적으로 역성을 시작한다. 밴드 세션 위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과 각종 목관악기와 피아노가 포함된 관현악단이 역성에 동참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역성을 이끌고 있다. 웅장하고 꽉 찬 사운드가 이끄는 반주 위에서 화자의 가사는 너무나 노골적이라 해석의 여지도 없다. 처박힌 이름, 처박힌 리듬이 모인 잡음들이 주선율을 모두 잡아먹으러 가는 뜨거운 언더독의 이야기는 항상 그렇듯 진부하게 가슴 뛰는 이야기다. 산왕전의 관중을 마주하는 북산고처럼, 악당이 지금 막 출현했다.
5. 스테레오
타이틀 트랙에서 우선 한 서사를 마친 뒤 전환을 위한 스킷 같은 트랙이다. 그러나 스킷이나 인스트루멘탈로 넘기지 않고 목소리로 채워넣어준 것은 가수의 팬으로서 고마울 따름이다. 스테레오 음향을 소재로 한 노래로, 첫 네 소절을 모노로 녹음해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이용하면 노랫말이 좌우를 오가며 들린다. 그리고 첫 네 소절은 반주의 장르도 달리해 편향적인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다. 뉴웨이브/뉴올리언스 재즈/트랩/헤비메탈 순으로 연주되는 탑라인과 뒤에 이어지는 앰비언스는 대중을 연상시킨다. 끝의 노랫말이 해석될 여지를 남겨놓았나 했더니, 라이브에서도 의미 없는 단어를 뱉는 것을 보니 오롯이 해석을 청자에게 맡겨 놓은 것 같다. 이 부분은 아쉽기도 하다.
6. 까만 흔적
5번 트랙을 시작으로 앨범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너'에게 따라붙기 위한 존재로 비유된 그림자는 조금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심플한 기타 리프와 피아노, 들릴 듯 말 듯한 드럼과 베이스를 리듬으로 진행하는 블루스 풍으로로 시작해 웅장한 밴드 세션으로 마치는 사랑 노래는 말하자면 '이승윤 클래식'이고, 그런 익숙한 트랙으로 앞으로 뻗어갈 사랑 노래들을 암시한 듯하다. 자칫 이단아의 반항처럼 들릴 <역성>의 앨범 소재에 개인적 서사를 더한 사랑 노래다. 앨범이 발매된 지 반년 가량 뒤 리뷰를 쓰는 이유도 '까만 흔적'과 이승윤의 결혼 소식 때문이었다.
7. 캐논
역성에 동참한 자들은 다시 표현하자면 처박혀버린 얼과 넋, 잡음들이었다. 그들의 삶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하이라이트가 없었다. 그저 진부한 탑라인의 연속, 캐논 멜로디로 시작하여 그렇게 끝나는 삶. 그러나 그런 삶은 외려 아름답지 않은가? 흔하지 않은 순간들만이 아름다운가? 특별한 이야기 같은 건 없지만 우리의 개인적이고 일반적인 이야기는 가장 좋은 이야기다. 그런 메시지를 담은, 마치 배우자에게 바치는 축가 같은 로맨틱하고 영원한 것처럼 보일만치 사랑스러운 노래다.
8. 내게로 불어와
이 트랙은 이승윤이 자신의 팬들 '삐뚜루'에게 바치는 노래인 것 같다. 각자 어디에서 왔는지, 어쩌다 이 노래를 듣고 있는지는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목소리를 내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한 공간에 한 시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 과거나 미래는 별로 중요치 않으니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말하자면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답가 같은 것. 팬이 아닌 청자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9. 28k LOVE!!
<역성>은 가수가 직접 밝혔듯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구 적어 넣은 앨범이다. 그런 앨범에 "가사엔 영원토록 적어내리지 않을 / 노래를 우린 귓가에 밤이 다 녹아내리도록" 같은 가사를 쓰다니. 얼마나 미친 사랑을 하신 건지 짐작도 안 된다. 그러나 젊음을 불태워 남은 것을 접착제 삼아 누군가와 딱 붙어 사랑해본 사람은 공감을 할 수 있으리라. 노래가 조금 야한 감이 있어 이질감이 느껴지긴 한다.
10. 너의 둘레 - 개인적으로 워스트 트랙이라 많이 듣지 않음. 리뷰 없음.
11. 리턴매치
그와의 사랑 뒤 계속된 싸움에 임하고 있는 역전의 용사. 내가 한국힙합 역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라인 중 하나인 <Undercover Angel>의 'Mama Lisa'에서의 "방해한다면 사살 / 질 것 같으면 자살"의 태도를 조금 더 밝은 이야기로 바꾼 듯한 노래다. 방구석 음악인이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악인 타이틀을 가져갈 수 있으리라 믿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그 아무도 믿지 않을 구호를 실화로 만들리라 다짐한 그날 이후엔 화자는 더 이상 초심자가 아니다. 브릿지에 삽입한 군중 소리나 복싱의 종소리 등, 들을 재미가 많은 트랙.
12. SOLD OUT
너바나를 연상시키는 거친 기타 리프로 시작한다. 메시지는 진부할지언정 '팔지 않아'. 인투로에서 노래한 자신의 의지, 목적과 진리와 대단한 의식 없이 존재하여 군림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고 있다. 피투되어 기투. 저항정신과 개인주의가 듬뿍 묻어난 그 시절의 록을 연상시킨다.
13. 폭포
화자는 사랑과 투쟁 뒤로 이제 자신만의 싸움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폭포라는 거대한 물줄기 앞에서 모두 쓰러지듯 포기하는 동료들이 있다. 시체로, 혹은 시체보다 못한 꼴로 발견된 나의 영웅. 그렇게 홀로 남은 화자는 자신의 발자욱을 내려다보다 돌연히 폭포를 올려다본다. "엎어버려 / 후회는 됐어 태어났다 / 엎어버려 / 흐름은 거부할 거야 / 엎어버려 / 폭포를 거꾸로 뒤엎어버려 / 여기서 Shoot a / fountain to the sky"
폭포보다 큰 분수를 본 적이 있는가? 화자는 이제 폭포보다 높이, 하늘에 닿는 분수가 되고자 한다. 네 분수를 알라는 말에 대답하듯 자신의 분수의 크기를 보여줄 것이다.
14. 끝을 거슬러
'리턴매치'의 메시지와 '캐논'의 메시지를 합친 듯한 노래. 리턴매치를 계속해서 가져오는 사람은 결국 계속해서 패배했거나, 승리했으나 싸울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널 데리러 / 다시 돌아가 / 널 그리러 / 그리로 돌아가"로 호소한다. 이미 폭포보다 높은 분수가 되어 승리한 화자. 그런데 그것은 '널' 향한 사랑보다 소중하지 않다. 그의 사랑이 궁금하지만 그의 사랑은 아마 팔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그의 팬이니만큼 그것을 사려 들지 않을 것이다.
15. 들키고 싶은 마음에게
부식된 왕관을 쓰고 있는 세상에 달려들어 모든 걸 뺏어온 화자. 그러나 그는 이전의 왕들처럼 홀로 군림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의지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의적일까. 의적처럼 자신의 과거와 같은 방구석 음악인들, '무명성 지구인'들에게 바치는 노래. "전시되지 않을 / 거론도 되지 않을 / 호명조차 되지 않을 / 마음아 이 노랜 너희 거야" '폭죽타임'보다 성숙해진 목소리 톤은 덤이다. 의도한 바일까?
리뷰 내내 화자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애초에 이건 스토리텔링도 아니고 컨셉도 아니며 에세이조차 아니다. 그저 이승윤 개인의 노래.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 사람의 개인적인 외침이, 세상을 뒤집기 시작한다. 앨범이 꿋꿋이 하나의 단어를 키워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타인이 원하는 말 사이에서 균형잡기를 하지 않은 심지가 엿보이는 일종의 정돈된 포효. 우리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 반역가들, 무명성 지구인들이, 흩어진 꿈들이, 야생마들이, 들키고 싶은 마음들이 <역성>을 통해 용기를 얻었으면 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
https://youtu.be/MPBhezByt7k?si=hBHCD6PkmAHqR9SQ
좋은 글 감사합니다 들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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