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시선없이 사물은 없다고 했다. 사물은 인식 주체의 시선으로만 존재하고 사물 자체는 무지의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칸트가 맞는 지는 모르겠으나 시선/인식은 중요한 주제다. 시선이 없으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음에 다름 아니다. 보다와 알다를 고대 그리스인들이 동의어로 사용했다는 얘기는 그래서 그럴싸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무엇을 볼 것인가 이다.
이를 위해서 스핑크스 난제를 해결한 남자를 찾아보자. 그는 그가 본인이 찾던 죄인임을 알게 되자 눈을 뽑아버린다. 본인 스스로 무능력했던 눈을 적출하는 행위는 본인의 본인 자신을 몰랐음에 대한 대가이다. 동시에 이는 진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알게 한다. 실상 오이디푸스는 본인이 누구인지 알게됨으로써 장렬한 비극을 맞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랐던 이는 오이디푸스만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에게 또다른 예가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리어는 광야에서 이렇게 절규한다.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
리어는 권력을 상실했고 사랑도 잃은 상태서 하나의 자각을 성취한다. 예컨데 오이디푸스가 알아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리어는 무지했기에 비극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듯 올바르게 보기란 참 힘든 일이다. 우리는 나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며 알든 모르든 고통받는다. 하물며 타인은 어떻겠는가.
타인은 지옥이다. 샤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 나오는 대사는 한 마디로 타인이라는 존재의 딜레마를 압축한다. 우리가 보는 순간 타인을 인지하고 관계가 형성되고 우리의 타인은 나의 인식체계 속 타인이다. 즉 내가 보는 타인과 실제의 타인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1900년대 초 아인슈타인이 기적의 해를 보내는 동안 ㅍ카소는 충격적인 그림을 완성한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라 이름 붙여진 작품은 여러 시선들을 합쳐서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시킨다. 결국 미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이고 피카소는 세잔의 뒤를 이어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분열된 자아들의 총합체로서의 인간. 이것이 피카소가 제시한 인간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래서 끝일까? 우리는 리어처럼 무지의 광야를 헤매고 볼 수 있지만 알 수 없는 눈을 가지고 살아야할까.
햄릿의 말대로 연극은 본성(nature)를 비추는 거울이고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온 세상은 무대이다. 그리고 모든 남자와 여자는 배우들이다. 우리는 무대에서 연기를 펼친다. 내가 생각하는 나, 남에게 보이고 싶은 나 등등 수많은 얼굴들을 꺼내며 고민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무한공간의 왕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할까 인생이 연극이고 그저 우리는 배역을 맡은 배우라면, 언제 진짜의 삶을 얻을 수 있고 볼 수 있는가.
하나 그리고 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 "아빠, 난 아빠가 보는 걸 못 보지만 아빤 내가 보는 걸 못 보잖아요. 아빠가 보는 걸 어떻게 내가 볼 수 있죠? 진실의 반을 볼 수 없을까요? 앞에서만 볼 수 있지, 뒤에 서면 못 보잖아요. 그러니, 진실의 반만 보는 거죠."
이 사랑스러울 정도로 영특한 아이는 인간이 가지는 실존적 한계를 뚜렷하게 알고 있고 지혜로운 아버지는 사진기를 선물한다. 그렇게 소년은 뒷모습을 찍는다. 하지만 소년은 그것이 불가능임을 뒷모습을 포착한다고 삶의 본질과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안다. 칸트의 지적대로 사물은 시선 없이 인식 불가능하다. 그리고 시선은 늘 왜곡되어있다.
답은 늘 셰익스피어가 가지고 있다. To ne or not to be라고 독백을 하던 청년은 Let be라는 말로 이 고뇌를 극복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우리는 타인을, 나를, 삶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존재한다는 그 희미한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온전히 시랑히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인지한다면, 우리가 보는 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래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정확히 모르고 그래서 온전히 부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볼 수 있고 부를 수 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부르자. 보고 있다는 것을 알리자. 시선이 없다면 대상도 없다. 내가 바라보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것들은 사라진다. 불완전할 지라도 보자. 그것이 시작이다. Let be. 존재하는 것을 보고 호명하자. 우리는 정확하게 볼 수는 없지만, 타인을, 삶을, 나의 존재를 부를 수 있다. 그럴 때 꽃이 된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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