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내일도.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하루하루 더딘 걸음으로 기어가는 거지.
우리의 어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보여주지.
우리 모두가 죽어 먼지로 돌아감을.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얼마 안 가 잊히고 마는 불행한 배우일 뿐.
인생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와 같아.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 의미도 없도다.
내일,또 그리고 내일 이 하루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종국에는 무로 돌아간다. 셰익스피어의 극들은 이 허무를 정확하게 담아낸다. 정말이지 반복되는 무망한 일생을 우리는 보낸다.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파우스트는 극의 절정에서 이 대사를 남긴다. 그 대상은 '순간' 이다.
순간은 정의하기가 어려운데 우리가 순간들의 연쇄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찰나라고 하지만 시간은 인간에게 선형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 찰나는 곧 과거가 된다.
그래서 순간은 순간만 존재하고 과거와 기억을 남기고 도망간다. 그래서 사실 순간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순간을 예측해야 하고 준비해야하는데 미래는 부재하다. 그 순간 사랑하는 것은 미래의 순간이 아니라 미래를 기대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그 순간은 언제 드러나는가.
셰익스피어 마지막 희곡으로 알려진 템페스트에서 주인공은 본인의 권능을 포기한다. 이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고 믿고 싶은 설은 은퇴작인 템페스트로 본인의 글쓰기를 포기하는 것에 대한 은유라는 주장이다.
프로스페로는 그 권능을 포기한다. 그가 놓아버리는 것은 과거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했던 남이 했던 과거의 망령에 시달린다. 하지만 프로스페로는 본인의 일을 모두 말끔히 갈무리한 후 자신의 힘을 은폐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통찰력있고 지적이고 위대한 인간은 마지막에 내려놓음과 포기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벚꽃동산의 피르스는 극 말미에 이렇게 회상한다.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군.
아무것도 없어.
맞는 말이다. 산다는 것은 가능성을 삭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삶은 본질적으로 슬프다. 체호프는 어찌도 그리 인생을 잘 알았을까.
순간을 사랑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데 무슨 잡소리인가 하겠다. 맞다.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내가 하고픈 말은 내려놓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로스페로의 권능처럼 이루지 못한 가능성들은 마술적이다. 하지만 프로스페로가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관객과 배우가 순간을 봉인하고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본인을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엔딩서 알 수 있듯이 때때로 권능과 가능성은 우리를 옥죄기도 한다.
그 모든 가능성들 중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 그것이 순간이다.
그래서 그 빛나는 순간들을 어찌 알아보고 즐길 수 있겠나.
우리가 그 순간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모른다. 그 순간이 지난 후 기억하는.방식으로 간직할 수 있다.
그리고 내일,또 그리고 내일이 돌아오는 것처럼 순간은 반복된다. 들뢰즈가 지적했던대로 차이 역시 그렇다. 바람이 봄을 실어나르는 감각은 반복되지만 그 해 봄과 지금의 봄은 다르다. 그 차이는 분명하다.
예컨데 차이의 반복이다.
어떻게 순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순간을 사랑하는 동안 멈출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할 수 있고 내 과거, 그러니까 내 정체성에 새겨서 반복시킬 수 있다. 그것은 반복되는 순간 차이를 발생시킬 것이고 거기서 삶은 다시 반짝인다
진짜 명필이시네요
그 정도는 아닌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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