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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ishead - Dummy

title: [로고] Wu-Tang Clan예리2024.08.14 18:50조회 수 426추천수 9댓글 4

(본 리뷰는 블랙뮤직 매거진 w/HOM #13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https://hiphople.com/fboard/28859224

(1차적으로 국외 게시판에 업로드했지만, 종합 게시판에도 업로드하면 좋을 것 같아 추가 업로드해봅니다.)


IMG_3368.jpeg



Portishead - Dummy


레비아탄은 정의되지 않는다. 반짝이는 비늘로 덮인 거대한 고래일 수도, 길이 30미터 가량의 악어일 수도, 혹은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불을 토해내고 연기를 뿜으며 눈에서 빛을 내는... 그에게는 태양을 잠깐 삼켜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너는 낚시로 레비아단을 낚을 수 있느냐?" "땅 위에 그와 같은 것이 없으니 그것은 무서움을 모르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 욥기 41장


페니키아의 전설 속 괴물. 여느 전설이 그렇듯 실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역사의 흔적이 그러하듯 연약한 인간 내면의 가장 큰 적인 공포와 우울은 레비아탄을 실재의 영역에 가깝게 이끌어냈다. 구약 성경의 시편과 이사야서에는 레비아탄의 기시감이 돋아나고, 페니키아 바닷길의 사공들은 누구의 손길 없이도 뱃머리를 멈춰세웠다.


두려움은 알지 못하는 존재를 만날 때 가장 거대해진다. 이때 인간은 가장 날카롭고 총명해지며, 미지로 지어낸 환상의 마네킹을 마주한다. 누군가는 잭 프로스트를, 누군가는 샌드맨을, 누군가는 담피르를, 누군가는 님프를. 흔히 꿈속의 존재로 일컫는 이름들이다. 하지만 소수의 몇은 구름에 잠긴 백색 마네킹 위를 넘어서고, 매혹적이며 감각적인 자태를 그려내곤 한다.


<Dummy>는 그 대면에서 상대한 괴악함과 풍성함을 침전시킨 결과물로서 탄생되었다. 수많은 기라성들이 저마다의 연주로 영민함을 꽃피운 90년대의 한가운데에서, 페니키아와 달리 영국 브리스톨의 전설은 활자의 영역을 벗어나 역사로 남으며 전해지고 있다.


포티스헤드(Portishead)의 결성은 분명 Massive Attack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루어졌지만, 이 사실만으로는 결코 포티스헤드를 모조품으로 결론짓게 만들 수 없다. <Dummy>의 색채는 당대의 어떠한 음악과도 엄연히 거리를 두었다. 흔히 트립합이라는 장르 범주로 묶이곤 하는, 3년을 앞선 Massive Attack의 <Blue Lines>는 분명 동시대 최고의 혁신이었으나, "Safe from Harm"과 "Unfinished Sympathy" 등에서 느낀 기쁨과 경쾌함은 온데간데없이 묘연하다.


그 빈자리는 침착하고, 얌전하며, 또한 못지 않은 강렬함으로 가득하다. 제프 배로(Geoff Barrow)의 악조와 리듬감 위에 스산하고 음흉한 망토를 뒤집어 쓴 베스 기번스(Beth Gibbons)는 가냘프고 음습하게 요동치는 목소리를 떨어뜨린다.  앨범의 킬링 트랙으로 뽑히는 "Sour Times"와 "Glory Box"는 매우 직설적인 예시다. 느와르 필름과 스너프 필름의 경계를 오가는 배경음악의 오묘함. 그 자태는 쉽게 비유할 수 있다.


초콜릿 케이크. 준비물로는 초콜릿, 설탕, 버터, 밀가루, 계란, 생크림, 코코아파우더. 온 재료를 끓이고 녹여서 비주얼 플레이팅으로 기워붙여낸 디저트. 포근하고도 아리게 혀끝을 감싸는 앙금. 쇠꼬챙이에 맥없이 꿰뚫리는 연약한 밀가루 살결과 겹겹이 쌓인 구멍. 바삭하게 으스러지는 겉면과 보드랍게 짓눌리는 폭신한 속살. 달콤씁쓸함과 가장 가까운 쌍둥이.


으레 케이크의 생애로는 쇼윈도 너머에서 추위에 벌벌 떠는 시간을 떠올리곤 하지만, 보다 앞서 당초에 분산되어 있던 엔트로피를 융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뜨거운 열감이 필수적이다. 가장 더운 열대의 열매는 완전히 식었을 때 제일 달콤하기 때문이다. 닿는 순간 손까지 익어버릴 뜨거운 오븐 속의 사건사고들은 유리창 너머에서 그 화학작용을 엿볼 수 있다.


콜라주의 레시피는 지구본 주위를 빙빙 돈다. Lalo Schifrin의 "Danube Incident", Weather Report의 "Elegant People", War & Eric Burdon의 "Magic Mountain", Isaac Hayes의 "Ike's Rap 2". 그 외의 다수가 크게 재즈, 펑크, 소울에서 가져온 레시피들이다. 그 위로 Geoff의 교정과 가필을 덧대어 Beth의 음성으로 싸늘하게 옥죄어내면 푸르고도 어두운 잿빛의 <Dummy>가 완성된다.


이 조립과 해체는 미녀 조수의 사지를 분리하고 끼워맞추는 마술쇼를 방불케 한다. 수없이 늘어선 샘플링의 조각들. 지극히 올드스쿨한 소스와 그렇지 않은 드럼 루프. "Wandering Star"와 "Numb"의 턴테이블 스크래치. 파편이 찢어지는 퍼커션의 농도 짙음. 노이즈와 베이스. 원류로부터 가져왔으나 그 무엇도 얌전히 본래의 형체로 남겨두질 않는다. 포티스헤드 음악의 정서와 닮은 이 자학적 파괴는 낙엽을 떨어뜨려 새 잎이 돋아나는 아폽토시스와도 같다.


도마 위에는 어절의 밀집과 구절의 휘몰아침. 구속적인 루프의 들썩거림. 휘황찬란한 제스처의 끝마무리. 관객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 그 외 등등. 들뜨고 활발한 자극들의 다수는 스러지듯 소거당한다. 그 위는 여백의 장식이 들어차고, 도화지의 흰 면을 빗겨나간 채로 덧칠에 덧칠을 거듭할 뿐이다. 지극히 다습한 악곡을 건조하게 닦아내는 과정. <Dummy>를 이끄는 음산함의 출처란 이 뒤집힌 천칭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과연 <Dummy>란 무엇인가. 힙합이라 칭하기엔 너무나 처절하고, 일렉트로닉이라 칭하기엔 너무나 둔탁하며, 락이라 칭하기엔 너무나 고요하다. 드넓고 포괄적인 용어로 요약한다면 나른하고도 여유로운 다운템포의 얼터너티브 정도가 마지노선으로 보인다. 무엇인들 어떠할까. 앨범 커버에 담긴 자체 제작한 단편 영화 [To Kill A Dead Man]의 스틸컷처럼 공허함 속에 몸을 뉘인 채로 얌전히 받아들여야 할뿐인데 말이다. 가히 '트립'에 비견하는 그 몽환적인 흡인력이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과연, 멜랑콜리의 미학이란.


여느 예술가의 사명과 스테레오타입이 그렇듯 우울의 집요함은 곧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 엔진의 기름때를 그저 썩 메스껍다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독특한 향기가 아쉬울 따름이다. 수천 년 전의 환상 속 괴생명체가 오늘날까지 구전되는 이유. 흑빛 과실이 빈곤의 성지에서 탐닉의 상징이 되는 이유. 피와 눈물을 끓인 레시피가 달콤하기까지에 이르는 이유. 본작이 블랙뮤직 매거진에서 당당히 클래식의 자리를 꿰차는 이유. 그 수많은 이유만이 곧 <Dummy>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Beth Gibbons - Portishead.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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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8.15 00:09

    masterpiece

  • 8.15 09:41
    @DannyB

    예아 롸잇

  • 8.15 09:35

    사실 Dummy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어서 리뷰 올라온 김에 처음 들어봤는데 특유의 우울하고 침체된 분위기가 인상깊네요.

    나른하고도 여유로운 다운템포의 얼터너티브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특히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8.15 09:41
    @Satang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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