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을 빛낸 피비알앤비 앨범들
알앤비 음악 시장에서 2012년 이전까지의 핵심 키워드가 '레트로'였다면 2012년은 '피비알앤비(PBR&B)'가 키워드였던 시대였다. '힙스터 알앤비(Hipster R&B)'라고도 불리던 이 장르의 명칭은, 힙스터 문화를 상징하는 맥주 상표 '팹스트 블루 리본(Pabst Blue Ribbon)'의 약자인 ‘PBR’과 해당 장르의 기틀이 되는 ‘알앤비(R&B)’가 만나면서 탄생했다. 기본적으로는 컨템포러리 알앤비와 앤비언트를 포함한 전자음악이 교배된 형태지만, 상황에 따라 다양한 장르들이 부가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음악 스타일이다. 피비알앤비는 일반적으로 몽환적이면서도 절제된 전자 음향이 배경에 흐르게 하며 특정한 무드를 형성하는데, 이는 미니멀하게 편곡된 덥스텝과 소울를 접목하며 ‘포스트-덥스텝(Post-Dubstep)’ 열풍을 이끌었던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의 사운드와도 일정 부분 상통한다. 그렇기에 피비알앤비란 장르의 분위기는 이전에 레트로 뮤직, 소울 팝, 빈티지 소울 등의 과거의 소리로 회귀하려던 움직임과는 다소 상반되는 형세를 보인다.
피비알앤비는 일렉트로팝이 알앤비 씬을 잠식해가던 2000년대 말, 2010년대 초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뿌리는 일렉트로팝과 유사했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보다는 마니아들의 음악적 욕구와 자신들만의 전유물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피비알앤비는 컨템포러리 알앤비에서 출발했으면서도, 과거에 소울 음악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었던 마니아 음악인 네오소울에 비견되곤 한다. 다소 마니아틱한 취향일 수 있는 음악이 대중음악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점도 따지고 보면 명쾌한 공통분모로 자리한다. 피비알앤비의 스타일적 출발은, 네오소울이 그랬듯 과거의 펑크 음악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공식적인 시작은 '하우 투 드레스 웰(How To Dress Well)'의 2010년도 작품인 [Love Remains]와 드레이크의 2011년도 작품 [Take Care]에서 잘 드러난다. 앰비언트의 몽환적이고 다소 우울할 수 있는 사운드에 드럼머신으로 생성해낸 드럼 소리, 그리고 알앤비로 마무리 지었던 묘한 사운드는 기존까지의 장르명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고, 결국 피비알앤비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이제 피비알앤비가 정점으로 올라섰던 2012년도로 돌아가서 한 해를 빛냈던 피비알앤비 작품들을 하나씩 돌이켜보자.
Frank Ocean - channel ORANGE
프랭크 오션(Frank Ocean)의 존재는 여러모로 화제거리였다. 프랭크 오션은 자신의 공식적인 데뷔를 앞둔 시점에서 양성애자임을 공표했다. 놀랍게도, 동성애/양성애에 대단히 적대적인 흑인음악 커뮤니티의 반응은 '너를 이해한다'였다. 한순간에 몰락을 경험할 수도 있었던 그는 이를 계기로 수많은 지지를 얻어내며 예측됐던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역전시켜버렸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의 앨범 [channel ORANGE]가 흥행했다고 판단한다면 큰 오산이다. 한해 앞서 [nostalgia, Ultra.]를 무료로 공개하며 큰 기대를 모았던 프랭크 오션은 [channel ORANGE]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200% 만개해 보였다. 사운드-메이킹도 매우 훌륭했지만, 앨범의 리릭시즘은 그간 알앤비 앨범이 갖고 있던 한계를 깨부수는 매우 굉장한 것이었다. “Bad Religion”을 통해서는 '무릎을 꿇게 하는 일방적인 신앙이라면 나쁜 종교'라는 우회적 표현으로 일방적인 사랑에 대한 아픔을 토로하기도 하고, “Super Rich Kids”를 통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부유하기만 한 아이들을 꼬집기도 한다. 그러나 앨범은 그저 어렵고 고차원적인 이야기, 혹은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가사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앨범의 타이틀 “Thinkin Bout You”에서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비쳐 보인다.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사운드 위에 얹혀진 프랭크 오션의 성찰과 철학이 가득 담긴 [channel ORANGE]는 2012년의 발견이라 할 만했다.
Usher - Looking 4 Myself
어셔(Usher)는 항상 그래 왔듯, 한 데 구속된 사운드로 앨범을 채우지 않는다. 다양한 음악으로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어셔의 강점이며, [Looking 4 Myself]에서도 그는 그러한 자신의 강점을 어필해 보이려 한다. 그래서 이 앨범이 전형적인 피비알앤비 앨범의 형태를 보이고 있지는 않는다. 힙합, 일렉트로팝, 컨템포러리 알앤비 등의 다양한 음악이 혼재된 속에서 피비알앤비 사운드가 자리한다. 피비알앤비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대표적 곡으로는 "What Happened To U"와 앨범의 대형 히트 싱글 "Climax"가 있다. 그간 감성적인 컨템포러리 알앤비 트랙과 힙합, 그리고 대중들의 시선을 의식한 일렉트로팝과 같은 '트렌드'에 집착한 음악이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채웠던 것을 고려한다면, 다소 신선하게 느껴지는 "Climax"와 같은 트랙은 그가 한동안 놓치고 있던 트렌드세터의 자리로 재도약하는 데에 제법 유효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히트 싱글 “Sure Thing”, “All I Want Is You”가 수록된 [All I Want Is You]로 신고식을 멋지게 마친 미겔(Miguel)은 소포모어 앨범으로 내놓은 [Kaleidoscope Dream]으로 자신의 음악가적 정체성을 확고히 한 듯하다. 미겔의 음악이 프랭크 오션과 다른 점이라면, 음지에 위치한 듯한 우울한 사운드가 주를 이뤘던 프랭크 오션에 비해 미겔은 밝고 아름다운 소리를 표출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미겔은 비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성에도 에코 등의 이펙트를 추가로 사용해 청자들을 몽환으로 가득한 자신의 세계로 이끌려 노력한다. 앨범의 제목에 사용된 '만화경(Kaleidoscope)'이란 단어와 이를 투영한 정신분열 환자의 시각 같은 앨범 커버는 그의 음악을 잘 보여준다. 확실히 미겔의 [Kaleidoscope Dream]은 프랭크 오션이 독주했던 2012년도 알앤비 씬에서 손에 꼽을만한 대항마였다.
프랭크 오션, 미겔과 함께 ‘피비알앤비 삼대장’의 시대를 연 위켄드(The Weeknd)는 피비알앤비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아티스트다. 위켄드는 미니멀함을 유지하려 했던 여타의 경쟁자들과는 달리 때론 과격한 소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덥스텝 사운드를 포함한 다양한 EDM(Electronic Dance Music)의 활용이 그 대표적인 예다. 기존의 포스트-덥스텝에 알앤비적인 색채가 짙어진 형태이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이 피비알앤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핵심에 자리하는 까닭은 그런 사이에서도 적재적소에서 드러나는 몽환적인 사운드 메이킹을 포함한 여러 피비알앤비의 요소들 때문이다. 위켄드의 [Trilogy]는 그가 한 해 앞서 무료로 배포했던 믹스테입들([House of Baloons], [Thursday], [Echoes of Silence])을 리마스터링하고 신곡 세 곡을 추가하면서 3 CD로 발매한 앨범이다. 내게 아무런 이득도 안 생기는 홍보는 하고 싶지 않지만, 세 장으로 구성된 앨범을 한 장 가격으로 판매해준 것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JMSN - Priscilla
피비알앤비라는 장르는 보기에 따라서는 ‘흑’과 ‘백’이 만난 사례지만, 기틀이 흑인음악이 되는 만큼 이를 향유하는 뮤지션은 대체로 흑인 알앤비 뮤지션들이다. 그래서 그 사이의 JMSN은 다소 희귀한 존재다. 이번 기획기사에서 언급하는 뮤지션들에 비해 관심도는 낮지만, 그는 장르 음악의 특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음악을 통해 적절히 표출해낸다. 굉장히 절제된 음악 속에서 관능적인 분위기를 도출해내는 JMSN의 음악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의 음악을 다른 아티스트들에 빗대어 말하자면, 프랭크 오션과 위켄드의 사이다. 그리고 위켄드 쪽으로 조금 더 기운 형태를 보인다. 아직까지 여타의 피비알앤비 뮤지션들에 비해 이렇다 할 경력을 쌓지 못했지만, 게임(The Game)의 “Pray”에 객원으로 참여했고, 곧 앱소울(Ab-Soul)과의 콜라보 앨범 [Unit 6]를 발표할 예정이라 하니 기대를 해보도록 하자.
How to Dress Well - Total Loss
'하우 투 드레스 웰(본명: Tom Krell)'은 아마도 본 기획기사에서 언급하는 뮤지션들 중 가장 힙스터스럽고, 피비알앤비 음악의 전형인 음악을 들려주는 아티스트일 것이다. 2010년에 발표했던 [Love Remains]로 데뷔하며 피비알앤비 탄생의 중심에 있었던 그는 [Total Loss]로 다시 컴백을 했다. 이번에도 그의 소리에는 변함이 없다. 그 누구보다도 진한 앰비언트 소리가 짙게 깔리는 비트 위에 알아먹기 어려울 정도로 녹아 붙는(?) 그의 음성은 여타 피비알앤비 음악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몽환적이다. 특정 장르를 한 가지 스타일로 정의하는 것이 무모하고 멍청한 짓이겠지만, 하우 투 드레스 웰의 [Total Loss]는 앰비언트 사운드를 적극 사용한 피비알앤비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더드림(The-Dream)의 [Terius Nash: 1977]은 무료로 선공개했던 [1977]을 리마스터링하여 정규 앨범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위켄드의 케이스와 유사하다. 그간 ‘Love’를 제목에 붙인 앨범 시리즈를 내며 밑도 끝도 없이 달콤한 알앤비만을 고수해온 더드림이었기에 굉장히 절제되고 음침한 분위기가 감도는[Terius Nash: 1977]의 사운드는 다소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의 4집 앨범은 피비알앤비가 아닌 그의 음악의 연장선에 놓인 [Love IV MMXII]가 될 뻔했지만, 발매가 연기되면서 [1977]를 내놓았고, 운 좋게 주류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물론 본작은 완벽한 피비알앤비 앨범의 성향을 띠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비트의 분위기가 피비알앤비의 성향을 상당 부분 머금고 있기 때문에, 해당 장르의 팬이라면 청취해 볼 만한 작품이다.
Solange - True
흔히 자신에 비해 대성한 형제를 동료 뮤지션으로 둔 아티스트들은 그들을 협력자로 여기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열등하게 보이게 하는 하나의 장애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알앤비 디바 혹은 아이콘으로 떠오른 비욘세(Beyonce)를 언니로 두고 있는 솔란지(Solange)의 경우에는 그 격차가 너무 큰 나머지 딱히 영향도 받지 않고 있는 듯하다. 두 아티스트 간의 인지도의 차이도 차이지만, 스타일의 차이도 굉장하다. 앞선 디바들의 계보를 잇는 시원시원한 가창력에 힙합 비트까지 소화해낼 수 있는 대중적인 스타일을 갖춘 언니 비욘세에 비해 솔란지의 스타일은 상대적으로 마니아틱하다.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다양한 음악을 시도해온 그녀는[True]라는 EP를 통해선 피비알앤비의 분위기를 차용한 소리를 들려준다. 다른 아티스트들이 극도로 힙스터적인 소리를 들려주는 데에 반해 솔란지는 피비알앤비의 소리를 활용하지만, 팝적인 색채를 내비친다. 물론 "Looks Good With Trouble"은 피비알앤비의 표본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전형적인 형태를 보인다.
Dawn Richard - Whiteout
여성 알앤비 그룹 데니티 케인(Danity Kane)의 멤버로 성공을 맛봤고, 그룹의 해체 이후엔 디디(Diddy)가 이끈 '디디 더티 머니(Diddy - Dirty Money)'의 일원으로 활약한 던 리차드(Dawn Richard)는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다. 그는 누군가의 보조 역할보다는 중심에 서길 갈구했다. 그렇게 그는 디디의 품을 떠나 2012년에만 두 장의 EP 앨범을 발표한다. 시작은 2012년 3월에 공개된 알앤비와 힙합적인 요소가 잘 적재된 [Armor On]이었다. 그러나 연말에 다시 발표한 EP 앨범 [Whiteout]을 잘 살펴보면, 그녀는 그러한 흐름을 이어가기보단 알앤비 정세를 살피는 데에 더 노력한 듯하다. [Whiteout]은 넓게 퍼지는 소리의 활용과 몽환적인 사운드를 빌려 피비알앤비를 느끼게 하는 앨범이다. 딱히 새롭게 느껴지는 구석은 없지만, 피비알앤비 특유의 몽환적인 사운드, 그리고 덥스텝을 활용한 알앤비 넘버 "December Sky (EDM Remix)"까지 5곡이라는 소박한 구성의[Whiteout]은 2012년의 피비알앤비를 잘 집약한 작품이다.
글 | greenplaty
알앤비같긴 한데 뭔가 많이 해체, 분리한 느낌이 들어서요.
싱글로 고르자면 Climax, 앨범은 프랭크 오션 걸 제일 좋게 들었네요.
글 잘봤습니다 ^^
삼대장 앨범만 들어봤고 다른 앨범들은 못들어봤는데
차차 들어봐야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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