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cadelic Records의 김완준, 갱스터 랩의 탄생을 돕다
컴튼 패션 센터 내에서 만날 수 있는 북한 사람의 중고 레코드 상점은 장르 음악의 초창기이자 중요한 판매처였다.
Bobby Wilson이 김완준을 만났을 때 그는 15개의 레코드 상점을 가지고 있었다. 1994년이었다. 아무도 그의 카세트를 취급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카세트 “Comin’ From Watts”는 Wilson이 직접 감옥에서 쓰고 직접 녹음하여 발매한 것이었다. 그의 이력은 굉장했다. 오랜 기간 Grape Street Watts 내 크립의 멤버였다. 살인미수로 5년을 감옥에서 살았고, 그의 별명은 “Kill Kill”이었다. 그는 가석방으로 나오자마자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고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컴튼 패션 센터 중고 시장이었다. 50대였던 김씨는 상점의 주인이었고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약과 갱스터를 이야기하는, 혼란스러운 형제들을 지닌 어린 랩퍼들의 음악을 취급하였다. 그는 Wilson에게 기회를 주었다. “내 생각에 그는 내 투쟁을 이해했던 것 같아. 어떤 것보다 더.” 마흔 둘의 Wilson은 말한다. “그는 컴튼의 심장이야.” 이듬 해 카세트는 만 오천 장이 팔린다. Wilson은 언더그라운드 랩 스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말한다. “김씨는 내게 기회를 줬어. 그건 내 삶을 구원했고.”
세상이 아는 LA 갱스터 랩이 드러나는 모습은 20년 전 Suge Knight나 Dr. Dre, Ice Cube가 유행을 만든 거친 장르이다. 만약 이 음악이 Straight Outta Compton으로 시작한 것이라면, 그 탄생에는 김완준 씨가 있었다. LA 개척자들은 1992년 주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흑인 고객들과 종종 분쟁거리가 되는 한국인 이민자 가게 주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큰 이야기가 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갱단이거나 마약상이었어요. 난 그들과 친분을 맺었죠.” 79세의 나이든 김씨를 대신해 아들 Kirk가 통역했다. 그의 아들은 지금 라틴 음악을 다루는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아들 김씨는 1주일에 한 번 이 가게의 일을 돕는다. “그들은 나에게 모두 잘해주었고 나 역시 그들에게 잘해주었어요.”
<아들 Kirk Kim, 부인, 김완준 씨>
김완준 씨는 1950년 북한을 탈출하였다. 그는 남한으로 아버지의 어선을 타고 가족들과 귀순하였으며, 1976년에 아내인 김부자 씨와 세 아들을 데리고 LA로 왔다. 이른 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이민 1세대였다. 김씨 가족은 처음에 캘리포니아 남부 중고 시장 좌판대에서 머리핀 등을 팔았다. Torrance에 있는 Roadium Open Air Market이라는 벼룩시장에서 판매를 하던 중 김씨는 음반을 파는 것이 괜찮다는 걸 깨닫는다. 1985년 몇몇 한국인 행상인들이 컴튼에 있는 Sears 빌딩이라는 빈 건물을 임대하여 컴튼 패션 센터라고 다시 이름을 붙인다. UC Riverside의 윤리 연구 교수이자 한국 공동체 내의 중고 시장을 연구하였던 에드워드 장 씨는 이들이 캘리포니아 남부에 중고 시장을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후에 12개가 넘는 상점들이 열렸고 그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그리고 도시 안의 쇼핑몰로써 자리잡았다. 그들은 새로운 한국인들에게 은행 대출 없이 장사에 뛰어들 수 있게 해준 입구이기도 했다. “그들은 더 크고 좋은 곳을 찾았으며 주인들은 개인 행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는 매일 중고 장터를 떠도는 것 보다 더 쉬운 장사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는 컴튼 패션 센터가 상인들과 계약할 때 서열 3위였다. 그는 Z-7구역을 택했고, 그 곳은 건물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으며 월 500 달러의 임대료가 붙었다.
도매업자들은 그에게 뉴욕에서 건너온 가스펠, R&B, 훵크, 랩 음악을 팔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는 흑인 음악을 듣는 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고객들의 입맛에도 맞았다. 그의 둘째 딸인 Jinna Grace가 영어를 할 줄 알았기에 가게를 도와 일했다. 노래가 라디오에서 대박이 나면, 그는 빠르게 도매업자에게 연락을 했고 단시간 내로 구해놓았다. 그는 컴튼에 들어온 마약 매매와 같은 비즈니스에 개방적이었다. 총질이 거리에 난무했다. “몇 번의 총격이 이 곳에서 있었지요.” 김씨는 말했다.
그러나 혼란 가운데 몇 친구들이 비좁은 아파트나 차고에서 테이프를 만들었고, 유명한 뉴욕 랩퍼들처럼 샘플링을 하고 랩을 했다. “그들은 레이블과 계약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냥 자기들 주변에 음악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죠.” 컴튼에서 자라 BG Knocc Out이라는 이름을 쓰는 Arlandis Hinton이 말했다. “그것이 그들이 했던 거죠. 컴튼 중고 시장에서요. 그는 최초의 배급업자였죠.”
마약 밀매와 거리의 삶이라는 주제들은 갱스터 랩을 강렬하게 논란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많은 레코드 가게들은 먼저 다루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음악은 중고 시장이라는 소자본주의 세계와 만남으로써 팔리기 시작했다. 이후 음악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컴튼 랩퍼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결과물을 줬고, 그는 그들 모두에게 “Pops”라고 알려졌고 그의 부인 역시 “Mama”라고 알려졌다. 갱스터 랩으로 번 돈은 김씨의 딸들의 클래식 피아노 레슨 비용에 쓰였으며 그의 가족들은 한인타운에서 Gardena로, Orange County로 이사하였다. “모든 곳에서, 모두가 왔어요. 아티스트도, 구매자들도. Riverside에서도, Pasadena에서도.” 김씨는 말했다. “도매업자들과 가까워지면서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들을 언제든 굉장히 빨리 받을 수 있었죠. 나는 그걸 운영했고 팔았어요. 우리는 따로 뭘 주문하거나 물건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죠.” Ruthless Records를 시작한 Eric “Easy-E” Wright 역시 그의 그룹 N.W.A.의 음악을 녹음해 김씨에게 12인치 싱글로 가져왔다. 아내인 김부자씨는 랩퍼들을 자신의 아이들 대하듯 대했고, “Eric, 바지 좀 올려 입으렴!”이라고 야단치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흑인들은 컴튼을 떠나기 시작했다. 갱스터 랩 역시 지역의 것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장르가 되었다. Eazy-E는 에이즈로 죽었다. 마약과 갱단의 총격전은 Cycadelic Records를 통해 처음 앨범을 내는 수많은 랩퍼들의 삶에 있다. 그러나 Bobby Wilson은 살아남아 Cycadelic Music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그는 지금 Lancaster에서 비둘기를 키우며 새에 관한 잡지를 내고 있다. “그 카세트들을 위해 그는 나에게 돈을 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모두를 위해 문을 개방해 놓았고, 그것이 힘겨운 일이었어요.” Wilson은 말했다.
Cycadelic은 또한 남부 캘리포니아 인근의 의뢰인들 덕분에 씬을 꽉 붙잡았다. 최근 김씨의 아들 Kirk는 페이스북과 이베이를 이용하여 세계로 음반을 팔고 있다. 그는 Lil G, Ms Krazie와 같은 랩퍼들이 있는 치카노 갱스터 랩 섹션 역시 취급한다. 컴튼의 최근 유행을 반영한 것이다. 무료 다운로드와 함께 세일즈는 Kirk의 아버지의 전성기 당시의 상황과 멀어졌다. 그러나 그는 Montana에 보내는 것 만큼 쉽게 홍콩에 물품을 보낸다. 또한 아직 랩퍼 지망생들의 데모를 받는다. 현재 그의 유일한 바람은 이들을 일본으로 홍보하여 더 큰 곳에서 잘되어서 Cycadelic Music을 전설의 이름으로 남기는 것이다.
컴튼 패션 센터 내에 개발된 큰 중고 시장은 아직 한국인의 소유로 잘 남아있으며 Inland Empire로 확장하고 있다. 다른 것들은 Central Valley와 Las Vegas로 확대되었다. 한국 이민자들은 어마어마한 한인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으며 첫 직장과 비즈니스 기회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의 은행과 회사들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김완준씨는 그의 상점에 1주일에 하루 들른다. 이 곳에는 김씨와 부인이 당시 어렸던 DJ Quik나 고인이 된 Mausberg와 같은 간판 랩퍼들과 찍었던 옛 사진들이 있다. 여기에는 1993년 앨범 [Shaq Diesel]을 냈던 샤킬 오닐도 있다. 매장에서는 형편없이 팔렸지만 김씨는 그를 애정을 담아 기억한다. 그러나 일생의 절반을 팝 사상 가장 선동적인 장르를 파는 데 보냈지만 김완준가 가게를 스쳤던 랩퍼들을 얼마나 이해하는지는 의문이 남아있다. “난 이 음악 별로 안 좋아해요.” 아들을 통해 김씨는 말했다. “그러나 전 그들이 어디서 오는지는 이해해요. 그들은 그들의 심장으로부터, 그들의 마인드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을 하죠. 그건 이해해요.”
출처 | LA Times
이지이 바지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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