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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Robert Frost, 피천득 譯, <가지 않은 길> 中
기회에는 항상 선택이 동반된다. 그 기회를 잡을 것인가, 뿌리칠 것인가? 잡는 다면,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수많은 이들이 기회를 잡고 성공했다. 그러나, 기회의 동앗줄이라 생각하고 잡았던 것이 때로는 위험한 도화선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10년 전, 비와이에게는 한국 힙합의 어느 누구보다도 거대한 기회가 있었다. 그는 전 국민이 주목했던 경연 프로그램의 최종 승자였고, 곡은 내놓는 족족 차트 정상을 꿰찼으며, 그의 이름을 딴 휴대폰이 발매되었고 그의 우상이자 한국 최고의 스타인 지드래곤과 한 무대에 서는 영광마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성공과 출세로 얻은 자신감 덕분이었을까, 그는 여러 레이블들과 거물들의 제안 대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험로를 굳이 택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그 험로는 결국 낭떠러지로 이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으로서, 두 딸의 아버지로서 비와이에게 포기라는 옵션은 성립할 수도, 성립해서도 안 되었다. 아버지는 딸들의 울음을 대신 울어줄 수는 있어도, 차마 무너질 수는 없었으니.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가는 와중에 사내는 더욱 독해질 수 밖에 없었고, [The Blind Star]가 그렸던 벼락 출세 이후의 초연함, [The Movie Star]에서 드러냈던 민족적 자부와 주인된 포부가 쓸려간 자리에는 결국 생존을 위해 사투하는 가장만이 남게 되었다.
앨범의 도입부인 "Sweet Escape"에서부터 비와이가 겪은 역경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거창히 열고 나 미비하게 닫지
비와이, "Sweet Escape" 中
네 시작은 미약(微弱)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昌大)하리라
욥기 8장 7절
의인이자 부자였던 욥이 신과 악마의 내기에 휘말려 환난을 겪었을 때, 그의 벗이었던 빌닷이 아무 죄 없는 욥을 비꼬며 이리 말했다. 말은 위로지만, 실상은 그를 죄인이라 하며 억지 회개를 부추겼던 것이다. 이 비아냥은 진짜로 정점에서 다시 바닥으로 내려온 비와이의 손에서 전복된다. 사라진 돈, 실패한 사업, 그럼에도 가족을 지탱해야하는 처절한 지금이 벌스에서 울려퍼진다. 입으로는 지금을 말하지만, 실상은 과거에 아직도 얽매여있다.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 샀던 보화들을 차마 팔 수도 없다는 고백 뒤편으로 울려퍼지는 코러스는 과거에 매달리는 건 달콤한 탈출일지도 모르지만, 이미 늦어버렸다고 비웃는다. 화려한 신시사이저와 환상적인 코러스의 프렌치 하우스로 포장된 몰락은 되려 더욱 비참할 뿐이다.
비참함은 이내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실패를 조롱하는 목소리, 실존하는 금전적인 공허, 쌓여만 가는 의심은 "머리맡에" 하나 둘 모여 비와이를 짓누른다. 한별의 소울풀한 코러스는 오히려 불안을 역설적으로 그려낸다. 현실은 고단하고, 넘어설 이상도 있지만, 이를 이룬다고 자신의 몫을, 책임을 다한다고 볼 수 있을까? 가장 이병윤은 침실에서 줄곧 번민한다. 일그러진 신스 음과 훵키한 기타와 무그 소리의 교차는 평온 속에 되려 불안으로 파고 든다.
실패와 자기부정의 와중에도 자신이 데자부 시절부터 추구해온 사운드적 기조를 되려 확장해나가는 프로덕션은 어떻게든 자신만의 고집으로 삶의 하중을 버텨내려는 투쟁과도 같다. [The Movie Star]로 완전히 궤도에 오른 전자적인 기괴함과 웅대함, 연인 - 지금은 부인이 된 - 과 함께하는 화려한 일상을 훵크라는 플랫폼으로 그려낸 [032 Funk]의 지향은 [POP IS CRYIN']에서 그야말로 완벽하게 융합된다. 사실 물욕으로부터 초연할 정도의 명예와 주체성을 꿈꿨던 비와이에게는 2016년의 센세이션보다도 그 이후의 견고해져가는 삶에 대한 애착이 더 강했을 것이다. 그 시절부터 자신이 꿈꿔왔던 사운드의 완벽한 조화로 몰락과 재건을 외치는 비와이의 모습은 일견 역설적이고, 또 그만큼 장절하다.
그렇다면, 그 붕괴의 단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악수"의 장난스런 디트로이트 풍 비트에 실린 비와이의 이야기는 그가 막 탄탄대로를 걸어가던 시절의 선택을 다룬다. 믹스테이프의 호평에 힘입어, 크루 메이트이자 평생의 죽마고우인 씨잼의 지지에 힘입어, 동시에 방송의 후광까지 받으며 비와이는 계속 자신의 물리적 요건을 향상시켜왔다. 라코스테에서 루이비통, 롤렉스. 동시에 지하철에서 택시, 자가용, 이 변천의 과정을 지나오던 그는 분명 한국 힙합이 바라마지 않던 새로운 거성이었다. 저스트 뮤직의 스윙스는 그를 최고의 래퍼라 추켜세우며 정상의 자리를 약속했다. 비와이의 오랜 롤모델이었던 일리네어의 도끼는 그를 한국 힙합의 희망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 진정으로 성공이 보장되어 있던 박재범의 두번의 제안마저, 그는 정중한 악수로 매듭지었다.
나도 이들처럼 될 수 있나
나도 이들처럼 될 수가 있다
그의 날개 아래에서 날 것인가
그가 나는 세상 위에서 날 것인가
비와이, "악수" 中
비와이의 선택은 의심보다는 확신이었고, 응달보다는 양달이었다. 실제로 그의 커리어는 이후 물질을 넘어선 영적 초연함이라는, 본토를 넘어선 민족적 자긍이라는 확신의 연속이었다. 데자부 그룹이라는 자신만의 레이블은 그 명징한 훈장이었다.
'나는 실패했다'라는 비와이의 자조와는 달리, 데자부 그룹이라는 레이블은 짧은 존속 기간 이상으로 묵직한 족적들을 남겼다. 쿤디판다와 최엘비는 한국대중음악상 트로피를 가져왔고, 비앙은 힙합과 전자음악을 오가며 명징한 시도를 보여줬다. 비와이가 2집 [The Movie Star]에서 선언하고자 했던 '한국을 새로운 본토로 삼은 힙합'은 레이블 멤버들의 진솔한 작가주의와 실험성에 힘입어 구체화되어 갔다. 적어도, 그가 가장 신뢰했던 어느 동료가 떳떳한 사자가 아니라 사실은 표리부동한 비겁자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 스스로가 얻은 이미지의 타격도 모자라 흰 코끼리가 되어 끝내 와해되기 전까지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장 8절
사람의 아들은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리리라 약속했지만, 비와이에게 열렸던 문이 되려 닫히고 말았으니 그는 계속 두드려야만 했다. "찾으니"는 그 끊임없는 두드림의 과정 속에서 비와이 본인의 각오와 욕망을 정면으로 형상화한다. 세계의 화폐와 시계, 자동차, 더 좋은 입지의 집을 갈망하는 것은 그간의 상실에 대한 보상이자, 가족의 안락한 삶을 위한 증표와도 같다. [032 Funk]에서 연인과의 달콤한 일상을 그리던 훵키한 베이스는 이제 가족들을 지키는 방패이자, 더 좋은 삶에 대한 갈망을 위한 디딤돌이다.
레이지 특유의 야성적인 베이스와 훵키한 기타가 기이한 조합을 이루는 "외"에서 가장으로 거듭난 비와이의 야성과 수확은 단연 빛난다. 사업이 망했으니 뻔뻔하게 더 섭외비를 올리는 모습은 잃은 만큼 더 채워서 매일 아침 수라상 차리는 부인과 자신이 새 외제차를 선물해준 아버지, 자신의 자식들까지 만족시키겠다는 야심으로 그득하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태복음 7장 9~10절
떡 달라고 하는데 돌덩이 주는 아버지라면
때려 배신
비와이, "외" 中
마태복음에서 부성애를 빗댄 명구를 뒤집은 것은, 그만큼 아버지로서 지니는 책임감이 무겁다는 역설일 것이다. 트랙 내내 반복되는 '다른 이 없어 나 외'는 상투적인 브라가도시오 이전에 이들을 배불릴 존재, 이 모든 책임감을 짊어질 존재가 자신 밖에 없다는 의무적 긍지이다. 그럼에도, 해체적이고 함축적인 가사와 뒤틀린 플로우로 쌓아올린 이 자부의 종착지가 '돌이킬 수 있다면 돌이켰을까'하는 후회인 것은 어째서일까?
"배있길 보우"의 난해한 가사들은 그 의심의 순간을 그대로 관통한다. 가사에서 비와이는 방황하다, 혼란스러워하다 제자리에 머무르고, 그 속에서 다시 치부를 숨기고자하는, 앨범에서 제일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잃은 것에 대해 밤새도록 하는 고민에 대해 오케이션의 목소리가 대신 답한다. 마약 중독이라는 죄악을 깊이 탐닉하여 바닥까지 추락했으나 이겨내고 신앙의 품으로 돌아온 경험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전성기의 타이트한 퍼포먼스로 자아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뜻과 다르게 무너지고 또 일으켜졌다는 철저한 영적 항복 선언이다. 화장실 바닥 가장 낮은 곳까지 찾아온 은혜를 체험한 후, 오케이션은 세속적 욕심은 버리되 신이 내게 허락하신 '내 밥상'을 건드리는 자들에게는 망치를 들고서라도 맞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친다. 이 철저한 항복과 밥상에 대한 사수 의지는 몰리 얌의 코러스가 노래하는 폭풍 속의 구원과 맞물려, 나약함에 빠져있던 비와이를 다시 현실로 일으켜 세운다. 세 크리스쳔의 화합은 전자적이고 다채로운 변주를 거쳐가며 그럼에도 보호와 도움을 축원하는 간절한 기도로 승화된다.
바닥에서 진짜 은혜와 현실을 체험하고 일어선 비와이의 시선은 이제 철저한 자기 객관화를 향한다. 그 의심의 근원을 파고드는 트랙이 바로 "Am I"이다. 마약, 성적 방종, 범죄. 힙합에서는 너무도 오랫동안 익숙해져버린 클리셰지만, 비와이에게는 사실 너무도 멀리 있는 이야기이다.
내 여자의 밥상 먹어도
이년 저년 먹은 적이 없는 얘기
담배는 빨아봐도
마약 한번 빨아본 적이 없는 얘기
거짓 정신병으로
군대 뺀 적이 없는 얘기
군에서는 총 쏴도
거리에서 총 쏴본 적이 없는 얘기
탄원서는 써도
탄원서 부탁한 적이 없는 얘기
거리에서 전단지는 돌렸어도
약 돌린 적이 없는 얘기
옛 Crew 이름이 거리여도
거리 Credit 따위는 없는 얘기
그런 내 얘기
그런 내 얘기
비와이, "Am I" 中
수많은 래퍼들이 장르라는 미명 하에 전시해 온 죄악과는 달리, 비와이가 마주한 것은 부인의 산후 우울과 아이를 위한 분유 세 스쿱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랩스타인가? 나는 락스타인가?' 자문하는 모습은 자조로도, 자긍으로도 읽힌다. 그 의심의 한가운데로 스며드는 것은 언제나처럼 지금에 머무르라는, 그 경견함을 지켜야만 천국에 간다는 그런 유혹들이다.
평생을 기독교적 신앙으로 중무장해 살아온 비와이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는 언뜻 불교적인 표현을 들고 온 것이 퍽 낮설게 느껴진다. 물론,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은 동서양 모두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기에, 성경에도 비슷한 표현은 여럿 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 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욥기 1장 21절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읍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
"공수레공수거"에 등장하는 '현석이 형'은 언뜻 비와이가 겪은 실패 - 재물 손과, 레이블의 와해, 사업 실패 - 를 위로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신의 말을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하여 비와이를 세뇌하려는 또 다른 빌닷일 뿐이다.
성경엔 나와 돈은 일만 악의 뿌리
부자되는 것은 악에 빠지기 유리
가난한 자는 복 있고 그들의 것이지 천국이
딱 내 상황을 말하는 것 같아 났어 눈물이
예수께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게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데
주께선 나를 천국에 보내기 위해
날 악의 길에서 멀리 하셨다는 게 신기해
'현석이 형', "공수레공수거" 中
물론, '현석이 형'이 하는 말들은 모두 성경에 나와 있지만, 이는 모두 철저히 왜곡되어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읍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악의 뿌리는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돈에 집착하는 것이 악하다고 말했지만, 돈 그 자체가 사악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절
예수가 산상에서 말한 '가난'은 물질적인 부분이라기 보다도 심리적인 것이었다. '현석이 형'은 의도했던 의도치 않건 '마음'을 지웠다. 가족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 실패에서 다시 도약하겠다는 기상까지도.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 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읍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9장 23~26절
중요한 것은 마지막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진정 떳떳하게 가족들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를 신은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비와이에게는 있다. 예수도 단지 '어렵다'고만 했을 뿐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지는 않았다. '현석이 형'은 자신의 무기력함의 핑계로 성경의 이야기들을 자기 마음대로 끌어들인 다음 비와이에게도 미끼로써 유혹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말들은 언뜻 익숙하고 달콤해보이나 빈 수레의 요란한 말들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비와이는 자기 부정과 자기 긍정의 대조라는 장치를 앨범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믹스테이프의 "자화상" - "So What"이 그랬고, 1집 [The Blind Star]도 이 자기 긍정으로의 회귀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The Movie Star]에서는 아예 과거의 자신에 대한 부정을 기반으로 지금의 자신을 긍정했다. [POP IS CRYIN']의 이야기도 결국 이 범주로 환원된다. 다만, "알면서도"의 극복은 유독 날카롭고 그만큼 더 당당하다. 물론 비와이도 알고 있다. 자신이 거둔 수확을 무덤까지 가져갈 수는 없으리라고. 그러나, 그의 수확은 사후를 위함이 아니라 생전을 위함이다. 그가 부귀를 버림은 곧 그 부귀로 먹고사는 처자를 죽이는 것이니, 더더욱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커리어 내내 스스로를 다윗에 비유했던 비와이가 '내 통장에는 다윗이 가졌던 재산의 만분의 일도 없다'라고 일갈하는 모습은 위선으로는 야심을 대신할 수 없다는 선언과도 같다.
낙타가 바늘귀에 드가는게 부자가 천국에 드가는거보다 쉽다고?
그렇담 주시지 낙타보다 큰 바늘 Bust down 아리가또
비와이, "알면서도" 中
마태복음의 그 유명한 비유가 뒤집히며 버스트 다운 시계로 대표되는 힙합적인 브라가도시오로 전환되는 순간, 그는 실패자가 아니라 실패를 딛고 가정을 먹이며 수호한 승리자로 일어서게 된다.
앨범 내내 반복되어온 '아버지'의 모티프는 이내 "아비가"에서 모인다. '아들이 아비가 되었다'는 직관적인 메시지에는 나는 성인(聖人)은 못된다는 부정(否定)과 그럼에도 이겨내고 가족을 위해 투쟁하는 부정(父情)이 두루 교차한다. '훵키한 기타와 일그러진 전자음과 베이스'라는 사운드적인 컨셉트는 "머리맡에"와 공유하지만, 이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비와이는 더 이상 자신을 "Too stained to be that Saint"라며 자책하지 않는다. 그에게 "아들이 아비가" 되는 과정은 무거운 아기띠를 메고 파김치와 스테이크를 준비하는 현실 그 자체가 되었다.
위치의 전환은 이제 예술적 전환으로 확정된다. "SOUTHSIDE FREESTYLE"는 '2.0 비와이'라는 새로운 자아의 탄생에 대한 선포와도 같다. 사실, 앨범에서 가장 먼저 공개된 트랙이니 만큼, 비와이는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논란이 될만한 상징들을 곳곳에 심어놓았다.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이승만,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단파 라디오 방송 中
굳이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육성을 삽입한 것에 대해 여러 말들이 오갔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한미동맹을 이룩한 공만큼이나 권력욕으로 인해 부정선거와 학살, 독재를 주도했다는 과 또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기 때문이리라. 가사에 '멸공'이라는 논쟁적인 단어를 놓고 블러 처리 한 것 역시 논란을 키운 한 원인이었다.
문제적인 인물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특정 인물에 대한 옹호라기 보다는 일종의 상징으로 독해해야 옳을 것이다. 적어도 식민지로서의 억압으로 고통받던 민중들에게 있어, 궐기와 재건을 촉구하던 라디오 방송은 피폐해져버린 지금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비와이의 지금과도 맞닿아 있으니. '멸공'의 의미, 낫과 망치앞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 또한 분배를 강요하는 태도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강경한 지양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념적 색안경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재건과 책임을 웅변하는 격렬하고 야성적인 트랩 뱅어일 뿐이다.
"STIGMATA"는 가사로보나, 사운드로 보나 정확히 "SOUTHSIDE FREESTYLE"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레이지의 영역에 위치한 장엄하고도 기괴한 전자음은 비와이가 겪어온 역경마저 영광의 성흔으로 승화시킨다. 배신과 속임수의 와중에도 비와이는 여전히 믿음 안에서, 처음(A)과 끝(Ω)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신앙의 중심에서 그는 신이 허락한 지고의 자유를 쟁취하려 투쟁한다. 가족의 성공을 위한, 결핍을 만회하기 위한 의지 앞에서는 청빈하라 말하는 혓바닥도, 이는 아편 혹은 엑스터시일 뿐이라 조소하는 마르크스와 김정은도, 나눔을 강제하는 공산주의마저도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고난의 십자가가 끝내 영광의 기치가 되었듯, '2.0'의 비와이는 이제 붕괴와 재건을 모두 당당히 거머쥘 수 있는 스스로의 그리스도 - 구원자 - 가 되었다. 거듭남의 순간은 이내 앨범에서 가장 뜨겁고 거대한 뱅어의 형태로 폭발한다.
다시 얻은 두번째 삶의 순간을 비와이는 무엇보다 환하게 그려낸다. 앨범 내내 교차해온 훵크 기타와 인더스트리얼한 전자음 위로 보이스 샘플이 올라타는 "M.O.L.T"는 지금의 밝은 일상을 그려내지만, 그 이면에는 계속되는 의미의 전복과 어두웠던 유년의 경험이 교차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 39절
마태복음의 이 유명한 강령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네 몸과 같이'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는 타인에게 베풀 사랑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가난을 비관해 손목을 그을까 고민했던 비와이는 다시 부귀와 가난의 사이클을 지나며 역경을 가로지른다. 흘린 보혈마저도 프라다의 붉은 선(Linea Rossa)이 되나니, 그가 존경했던 임마누엘과 같이 그는 죽음어린 고난 뒤에서 아비로서의 두번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확신으로 가득찬 두번쨰 삶에서 다시 갈림길이 주어졌을 때, 비와이는 어떤 선택을 할까? Frost의 시에 나온 화자는 되돌아 갈 길을 고민하며 자신의 선택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 했지만, "2wayS"의 비와이에게는 당당한 확신만이 남아있다. '하거나 말거나', '성과 쇠'. 비와이의 선택지는 당연히 전자이다. 가난한 경건함 대신 부귀한 남아로서, 아무리 지저분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책임을 끝까지 지는 것이 비와이가 고른 길이다. 일렉 기타 루프와 가스펠 리듬이 함께하니 그가 택한 바는 축복으로 물든다. 감미로운 싱잉 랩으로 깜짝 등장한 언텔도 비와이와 같은 길을 걷는다. 누군가의 눈에는 나쁘게 비칠 지라도,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버킨과 루이비통을 골라 선물할 수 있는 삶, 부귀가 빛어낸 찬란함으로 언텔은 비와이가 걷는 길의 새로운 붉은 융단이 되어준다. 그래서, 비와이의 이 오랜 재건담은, 끝내 자신이 되찾아야 할 부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으로 끝난걸까?
두개 중 해, 후회 아님 무대
비와이, 2wayS 中
아무리 정당성을 되새김질하고 무대에 오르려 해도, 후회는 어쩔 수 없이 남는다. 재건해야 하는 것은 실패로 상실한 물질도 있겠지만, 배신으로 얼룩진 영혼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랬기에 앨범의 피날레인 "Shosanna"는 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물질들을 지나온 자신의 진심에 대한 이야기여야만 했다. Quentin Tarantio의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쇼샤나 드레퓌스는 나치의 가혹한 학살로부터 도망쳐 '에마뉘엘(Emmanuelle)'이라는 성스러운 가명 아래 자신을 가두고 극장을 운영한다. 성서적으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지고의 거룩함을 뜻하는 이 이름은, 그러나 그녀에게는 생존을 위해 뒤집어쓴 위선과 위장막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어찌보면 비와이도 지난 날의 자신을 그런 속임수 속에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2017년의 비와이는 일시적인 성공을 넘어서는 영원을 말했고, 2019년의 비와이는 본토를 뛰어넘을 새 본토의 주인공으로서의 아성을 외쳤다. 그러나 이 모두를 위선으로 가득찬 극장과 함께 불사른 이 쇼샤나의 손에 남은 건 생존을 위해 달리느라 깊이 배어든 돈내일 뿐이었다.
아니, 남은 것은 돈내 뿐만이 아니다. 삶이 비와이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함 없이 묵묵히 육과 영에 새겨져온 성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지탱하느라 생긴 영광된 흔적들이다. 불꽃의 세례 가운데서, 비와이는 끝내 상처입은 자신의 거울 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44절
난 의로운 사람 맞네
날 잃어가며 널 사랑하기에
난 거룩한 사람 맞네
날 상처 주며 널 사랑하기에
난 깨끗한 사람 맞네
난 난
원수 사랑하라매
그걸 못 지켜 나는 날 사랑 안 해
비와이, "Shosanna" 中
베풂을 위해 자신을 저버리는 걸 죄악시 했던 [POP IS CRYIN']의 비와이는 마침내 자신이야말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했지만, 비와이는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을 몰아세운, 원수 같은 자기 자신을 끝내 용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거듭되는 후회의 가운데서, 비와이는 용서를 넘어서는 용납을 택한다. 용서는 단순히 과오를 지워낼 뿐이지만, 용납은 과오마저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낸 '돈내'와 '상처'의 악수는, 세속의 영화를 꿋꿋이 거부했던 과거의 '악수'와는 결코 같지는 않을 것이다.
실수에 난 들어 새 잔에 새 축배
난 들어왔을까 두드렸던 문에
비와이, "Shosanna" 中
잔이 엎어졌다면 다시 채워내면 된다. 결국 두드렸던 문은 열렸다. 지켜내고 싶었던 가족들의 안온 한 삶을 함께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와이의 선택은 실수는 있었을지언정 실패는 없는 것이다.
[POP IS CRYIN']은 한없는 부정의 끝에 남은 자신에 대한 긍정이다. 실수로 잘못된 길을 지나 낭떠러지로 떨어진 뒤, 한 없이 상처 입으며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냈던 자신에 대한 단호하고 담담한 다짐이다. 앨범을 치장하는 실험적이면서도 화려한 소리샘, 어느 때 이상으로 해체적이고 기계적인 퍼포먼스는 그 맹세 하나하나를 비와이 자신만의 우직함으로 새겨낸다. 가족을 위해, 그 이전에 자신을 위해 이뤄지는 육과 영의 재건은 앨범에 녹아든 종교적, 역사적, 심지어는 정치적인 레토릭조차 넘어서 그저 하나의 반석과 같은 고고함으로 남게 된다. 전복되며 이어지는 가치 가운데서 얻어낸 구원은 비와이의 유산이 결코 벽돌과 모르타르 덩어리 따위가 아님을 말해준다. 오히려, 계속 넘어지고 넘어지더라도 끝내는 일어나 구원해내리라는 명확한 확신을 지금의 우리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명징하게 심어주는 것이다.
다시, 기회에는 항상 선택이 동반된다. 물론 선택의 끝이 낭떠러지 일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주저앉을 수는 없다. 목숨이 허락하는 한, 다시 기회는 올 것이기에, 다시 선택하며, 잘못된 선택을 했던 자신마저 끌어안으며 나아가야 하기에.
Best Track: 배있길 보우 (Feat. Okasian, Molly Yam), 알면서도, STIGMATA





본 리뷰는 HOM#38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hausofmatters.com/magazine/hom/#38
박스도덕박거손 ㄷㄷㄷㄷ
개인적으로 비트랑 가사에 비해서 랩이 재미없어서 듣기가 힘들었던
비와이 특유의 긍정서사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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