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25년도 마무리 지을 시기다. 올해도 참 많은 음악을 들었고, 덕분에 감탄했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아쉬운 작품들도 있었다. 매년 이 맘때 즈음이면 한 해 동안 즐겼던 음악들을 결산하고 정리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마침 브런치에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이게 된 김에 올해는 정말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흘러가는 문화일 수 있지만 내게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취미 생활 중 하나였고 정신 건강에 가장 큰 도움을 받은 문화이기에 그 감사함을 이런 식으로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럼 음악을 창작하는 모든 이에게 이 글을 바치며 써내려가겠다.
순위에 대한 글은 아니고 그저 내게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나열하며 단상을 작성하는 만큼 가볍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고 각자의 감상은 누구나 다를 수 있음을 견지해주길 바란다.
[국내 힙합]
1. Lil Moshpit X Sik-K [K-FLIP+]
(Original Sample from "Love Love Love" Epik High)
첫번째로 꼽은 앨범은 그루비룸의 휘민의 또 다른 자아인 릴 모쉬핏과 식케이가 함께 만들어낸 [K-FLIP+] 이다. 플레이보이 카티(Playboi Carti)가 돌풍을 일으킨 장르인 레이지와 한국 대중음악을 블렌딩해 만들어낸 걸작으로 처음 들었을 당시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누군가에겐 귀 아프고 시끄러운 장르일 지언정 내겐 도파민으로 샤워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릴 모쉬핏은 샘플링을 기반으로 본인의 신디사이저를 가감없이 활용해 장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뛰놀 수 있게 만들어줬고 식케이는 누구보다 그 비트를 잘 소화했다.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이며 갈수록 도파민을 자극하는 음악을 향해가는 씬(Scene)에 누구보다 대중적으로 자극적인 사운드를 선사한 앨범이 아닐까 싶었다.
2. Effie [E] & [pullup to busan 4 morE hypEr summer it's gonna bE a fuckin moviE]
Effie - put my hoodie on
Effie - CAN I SIP 담배
올해 최고의 발견은 아마 에피가 아니었을까.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내게 그녀는 그저그런 멜로디컬한 랩을 하는 여성 아티스트 정도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프로듀서 킴제이(kimj)를 만나며 환골탈태했다. 하이퍼팝이라는 장르가 부상함에 따라 그녀 또한 과감하고 거친 믹싱의 사운드를 바닥에 깔아 놓고는 그 위에 그녀가 어릴적 들었던 케이팝을 얹었다. 그런 탓에 그녀는 본인의 장르를 "언더그라운드 케이팝"이라 칭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한국에서 언더그라운드로 어디까지 가는지 보여주겠다." 라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올해 두번째 앨범인 [pullup to busan 4 morE hypEr summer it's gonna bE a fuckin moviE] 를 뉴욕 타임즈 올해의 베스트 앨범 1위에 올렸고, 해외 유명 평론지인 피치포크(Pitchfork)에서 7.6점*이라는 고득점을 받아내기도 했다. 여전히 그녀의 오토튠 활용과 과하게 자유분방한 보컬 믹싱, 가사 등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마치 게임 내 퀘스트를 해결하듯 증명해나가는 발걸음은 작은 체구의 거인처럼 보이게 했고 "MAKGEOLLI BANGER"의 가사 중 "내년에는 코첼라"라는 예언은 머지않아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10점 만점에 7.6점으로 이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점수이다. 아래는 피치포크에서 평론한 몇 안되는 한국 앨범들 중 일부이다.
파란노을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8.0
NewJeans [Get Up] : 7.6
XXX [Language] : 7.3
3. EK [YAHO]
EK - MollyWorld feat GV
이케이는 비록 파티 크루인 MBA(Most Badass Asian)의 소속이지만 개인작은 다소 진지하고 내가 알던 힙합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래퍼로서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올해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나타났다. EDM과 하이퍼팝이 섞인 고자극 댄스 음악에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가사들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눈치 안볼래. 재미있게 놀래." 라는 가사가 해당 앨범의 컨셉을 대변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나 또한 그저 눈치 안보고 재미있게 듣긴 했다. 정말 재밌게만 들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앨범의 후반부에 숨겨진 쓸쓸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재밌고 본능적으로 놀고는 있지만 그 뒤에 몰려오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어쩌면 진정한 앨범의 주제가 아닐까 싶었다.
4. 염따 [살아숨셔4]
염따 - ㄷ.R.E.A.M
플렉스 문화와 수많은 밈들을 탄생시키며 광대처럼 취급받던 염따는 쇼미더머니 출연 이후 불명확한 심사 기준에 대한 비판과 일부 아티스트들을 다른 회사로부터 몰래 빼왔다는 일명 "템퍼링" 논란으로 몇년간 나락에서 지냈다. (물론 나는 이게 정말 나락갈 일인가 싶긴 했지만) 그 사이 염따는 그동안 본인이 음악이 아닌 다른 것들에 취했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본인의 근본인 음악으로 돌아오자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운드 위에 얹어진 진정성이 내게 굉장히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마흔 둘의 나이에 부모님을 향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는 곡들, 음악을 그만 둔 절친한 형을 향한 아쉬운 마음, 인기를 누렸지만 그럴수록 사람을 향한 의심이 커지는 본인을 향한 혐오 등 극도로 솔직한 가사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돌이켜볼 수 있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5. 호미들 [CHAPTER III]
호미들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고 일명 한국의 게토(Ghetto)에 살지 않는다. 더 이상 사이렌의 가사는 그들의 삶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미지 쇄신을 꾀해야 했고 마침내 다시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태할 수 있었다. 사실 시대에 남을 걸작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정 부분 무난한 구간도 있었다. 하지만 일상에 있어서 너무 무겁지 않고 너무 신나지 않는 그저 가볍게 어깨를 흔들 수 있는 정도의 음악을 듣고 싶으면 언제나 이 앨범을 찾게 되었다. 무난함이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찾게되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6. 최엘비 [her.]
최엘비 - 킹오브인프피
한국에서 찌질한 감성의 스토리텔링을 최엘비보다 잘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앨범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유기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기가 막힌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했던 비와이와 씨잼의 성공을 보며 열등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2021년 [독립음악]을 내기 전까진. 그러나 해당 앨범은 소위 대박이 터졌다. 그렇게 그는 돈을 벌었고 사랑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상처도 받았고 그래서 앨범을 완성할 이야기거리도 생긴 듯 하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는 앨범의 유기성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그런가. 무슨 얘길 하고싶은 진 알겠으나 다소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나쁘진 않은데. 더 좋을 수 있었을 것 같아 아쉬운 부분이 크다.
7. 김상민그는감히전설이라고할수있다 [Invasion(Deluxe)]
김상민그는감히전설이라고할수있다 - HARARI FLOW feat GGM Kimbo
이름부터 컨셉의 끝판왕이다. 어느 누가 저리 긴 문장을 활동명으로서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가 내놓은 첫 정규 앨범은 제목과 구성도 컨셉츄얼하다. 일반 버젼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일부 곡들이 추가된 버젼을 뜻하는 "Deluxe"가 붙어있기도 하고 앨범 중간에 앨범의 마지막을 뜻하는 "Outro"가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들은 곡들에도 녹아있다. "사피엔스도 아닌데 구타를 유발 하라리" 같은 가사들은 실소를 터뜨리게 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앨범의 구성에 있다. 앨범의 초반부에 힘을 잔뜩 줘서 이런 유머와 에너지를 쏟은 나머지 후반부의 곡들도 신남에도 불구하고 다소 감흥이 덜해진다. 안타깝지만 일부 곡들만 골라서 듣게 되었다.
8. G2 X UGP [Human Tree]
G2 X UGP - Get Money feat Mike B & Jaeyoung
한국 래퍼에게 쇼미더머니란 양날의 검이다. 잘 쓰면 내 가치를 한껏 띄워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지만 잘못쓰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어버린다. 지투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매 라운드 마다 가사를 잊어 일명 "치매래퍼"가 되어버린 그는 어떤 앨범을 내든 그런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새로운 도전인지 그는 본인이 태어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커리어 전반으로 함께했던 프로듀서 유지피와 합작 앨범을 만들어냈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재즈풍의 편안한 바이브 속에서 그는 유영하듯 랩을 뱉는데 이게 굉장히 편안하게 들린다. 누군가 하는 일이 쉬워보이면 그 사람이 엄청난 장인이라던데 지투에게서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
9. Don Malik X DeVita [사랑은 노래와도 같이 : Love is a Song]
Don Malik X DeVita - 오 와우
둘의 합작 앨범이라니. 굉장히 의외였다. 접점이 없어보였을 뿐더러 앨범 발매 전 마치 실제로 썸을 타는 듯한 프로모션은 던말릭은 물론이고 스스로 양성애자라며 커밍아웃한 드비타에게서도 예상할 수 없었던 행보였다. 그런 그들이 합작 앨범을 낸다고 했을 때 나는 자연스레 어쿠스틱한 악기들을 활용한 재즈 힙합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것 또한 보기좋게 빗나갔다. 808 드럼 기반의 트랩곡들이 많았고 적어도 내 기준에선 본인들이 가진 기술적 화려함을 드러내는 곡들도 많았다. 그래서 재밌었다. 뻔한 사랑 노래나 예상 범주 내에 있는 재즈풍의 힙합 곡들이 즐비한 앨범이었다면 금방 넘겼을텐데, 그렇지 않아서 흥미롭게 들었고 그 안에 편안함도 챙겼기에 굉장히 만족스럽게 들었다. 날이 추워진 요즘에 더욱 잘 어울리는 앨범이니 특히 추천한다.
10. Potty Monkey [Stairs]
최홍철. 적어도 내가 알기론 과거 신태일과 같이 막장 인터넷 방송을 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힙합을 한다고 했을 때도 나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그저 유머스럽게 몇 번 하다 말거라는 생각으로 그를 바라봤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는 힙합에 진심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냈고 이번 앨범은 특히 더욱 그랬다. 트랩 비트 위에서 그가 타는 박자라던지, 시적인 가사 만큼이나 주목받는 유머스러운 가사라던지 여러 구석에서 그가 힙합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앨범은 그가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쓰는 표현들이 음지의 그것들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편견을 바꿔준 그이기에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됐다.




이 글은 브런치에 올리고 싶어서 쓴 글을 옮겨온 거라 읽는 사람의 기준을 저희처럼 딥하게 듣지 않는 사람들로 잡았다는 거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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