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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총망라 (긴글 주의)

파블로2시간 전조회 수 926추천수 13댓글 7

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한 노래를 틀어주었다. 바로 indigo였는데, 왜 학교에서 이걸 틀어줬는지는 모르겠다. 여튼 그 노래를 듣고 그를 처음 알게 되었다. 아티스트의 앨범 전곡을 듣는 건 아직은 익숙치 않은 나는 그의 인기 많아 보이는 곡만 듣곤 했다.

그렇게 몇 커뮤니티를 전전하며 “이 사람의 곡은 앨범 째로 들어야 한다“는 속설을 들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색 없던 취향과 팔랑거리던 귀 덕택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충격적인 세계의 현현을 마주했고, 어린 나이를 이유로 다 설명할 수도, 알지도 못하는 감정의 분명한 소실과 두각의 반복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앨범은 2 MANY HOMES 4 1 KID였다.

그렇게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길을 걸을 때마다, 학교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의 음악을 들었다. 공연 영상과 인터뷰도 찾아보았다. 입시 미술을 하며 기차를 타는 여정을 겪을 때면 단순하지 않은 흥분감과 이해받지 못할 고조감을 겪었다. 나는 그렇게 음악과 더욱 깊은 관계를 걷게 되는 하나의 기점을 맞이한 것이다.

그렇게 내 유년 시절의 한 조각이었던 그는 어느 새 수많은 구설수와 이해 못할 행보,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내 삶의 고통이 깊어지는 순간 덕에 나로부터 먼 곳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내 세계를 이루는 사람은 절대로 잊지 못하는 걸까. 어엿한 성인이 되어서 어머니의 꾸중 없이도 마음대로 19금 딱지가 붙은 곡을 들을 수 있게 되었을 때도, 음질이 좋은 헤드셋을 생일 선물로 받았을 때도, 새로운 철학과 신념이 내 안에 자리 잡아서 예술에 대한 새로운 견지로 관점을 넓힐 때도, 그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소리를 퍼뜨리고 있었다.

최근은 그의 첫 번째 앨범을 자주 들었다. 한동안 잊은 그리운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였던지, 아니면 나의 근원으로부터 비롯된 무의식적 욕구를 마주하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옛적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는지. 아직도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말 정도는 확실히 굳힐 수 있다.

많이 기다렸던 앨범이 드디어 나왔다. 신기하게도 어떤 감정도 쉽사리 들지 않았다. 오로지 작은 반가움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어째서였는지는 아마 그의 음악이 대답해주겠지.

LOST IN TRANSLATION

번역 중 손실

모든 대화는 번역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다. 가족, 공동체, 시간, 흐름, 가치, 국가, 그 무엇이든, 우리는 모두 다른 곳에서 던져지고, 나타나, 흘러가고, 살아간다.

그렇게 각자만의 어엿한 자아가 생긴다. 그 자아는 각자만의 언어를 가진다. 습관, 가치관, 행동거지, 등등. 그 언어들이 부딪혀 대화하는 관계는 수많은 산물을 빚어낸다. 그것은 바로 몰이해이다. 그 누구도, 그 사람으로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이해의 노력은 일종의 충실한 번역 과정이다. 상대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도중에 과도하게 많은 의미가 손실되지 않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허나 요즘 시대에서 상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여겨지고 있을까?

급변하는 시대와 쏜살같이 흘러 들어가는 타자의 정보, 해석을 요하는 무의식, 모든 것이 맞물리자,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섬세한 솜씨 섞인 말투와 다정한 표정보다는 끔찍이도 급박한, 이해 아닌 ‘납득’만을 기계적으로 이행한다. 온 힘을 다해도 타자를 이해하기란 어렵고도 꺼려지는 일인데 경쟁과 투쟁이 넘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생존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으니 타자의 언어를 번역하려는 이해의 노력은 멍청히 여겨지는 것이다.

즉, 우리는 날마다 번역 중 손실을 겪는다. 모든 관계는 오해와 노력, 기대와 실망, 분노와 사랑, 이런 혼란스러운 내집(內集)으로 형성된다.

하지만 시대가 흐를수록 이해는 줄어들고, 험담이 늘어난다. 노력은 줄고, 쾌락만이 남는다. 사랑 없는 분노만이 나타난다. 그렇게 과열된 시대는 무언가를 부추긴다. 도대체 무엇을? 우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부추김 자체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서 등장한 저스디스의 새 앨범은 어떤 말을 전하는가? 우리는 그의 음악에 귀를 깊이, 또 섬세하게, 그리고 조심스레, 하지만 자신 있게 기울여야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면 소실되는 의미의 집합들에 또다시 무언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LOST IN TRANSLATION

 

감상평

2025년 11월 20일에 발매된 저스디스의 앨범 Lost In Translation ― 이하 LIT. 2018년경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하게 되면서 가치관에 변화가 생기는 도중, 자신의 말이 왜 누군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지에 대해서 깊이 궁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동명의 영화 Lost In Translation(소피아 코폴라 작)의 제목을 보고 영감을 받고 앨범을 만들기로 했다고.

이 앨범은 무수히 많은 구설수에 오르게 된 초대형 프로젝트이자, 힙합 팬이라면 존재 정도는 알고 있을 음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기억하기로는 약 2021년부터 이 앨범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건, 사연과 사연이 겹쳐 이제야 세상 밖에 나오게 된 이 앨범은 “실존하긴 하냐”는 말을 들으며 무수히 많은 비탄 속에 잠겨 있었다. 예고된 지 8년이라는 말은, 기대감만 고조시킨 게 8년이고 그때까지 입질만 살살 구슬렸을 뿐 내지를 않았다 이 말이니.

그 외에도 구설수는 많았다. 쇼미 욕하고 쇼미 나가기. 자기가 욕했던 루트 그대로 따라가기. 아이돌 웃음. 잘생긴 척. 찌질함. 군대 면제. 이상하게 저스디스가 디스했던 대상과 내용은 그게 아닐 텐데, 왜인지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되었다. 말 한 마디 잘못해도 물어뜯기는 상황에서, 자신이 뱉은 말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하고, 가사 몇 줄을 떼 와서 “뱀새끼”, “1.8진” 같은 프레임을 씌우는 꼴이었으니. ‘어느 정도는 본인의 실수가 자초하기야 했다만 왜 하필 저스디스에게는 이 정도로?’ 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름 쿨한 태도를 견지하며 유머를 잃지 않고 음악을 계속 하던 저스디스가 목소리를 내주고, 좋은 음악을 내줬으면 하는 기대감 때문에 또 욕을 먹은 게 아닐까. 이른바 사랑의 회초리.

그렇게 이찬혁 디스와 함께 무려 8년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는 듯한 앨범 선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인들에게 선공개, 벌스 공개, 라이브 공개, 인터뷰 영상 쇄도 ― 하지만 절대로 공개 날짜는 알려주지 않았다. 미친놈. 마케팅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드디어 11월 20일, 앨범이 공개되었다.

허나 공개 직후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뜨거운 기대감이 팍삭 식은 꼴이다. 여전히 강력한 하드웨어와 세련된 사운드, 클래식과 트렌드를 적절히 섞은 듯한 리듬감 배열. 그리고 그 중추가 되는 촌철살인의 가사.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할 뿐이었다. 잘해봐야 수작, 운 좋은 업그레이드5, 기대 이하, 오글거리는 자기 이야기 등등. 하지만 이상한 점은 반응이 뜨거운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야 있다는 거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기에 이렇게 극단으로 갈리는 걸까?

그 이유는 바로 기대감에 있다. 당연히 예고된 때부터 몇 년이나 기다려왔으니, 응당 시간에 대해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기대감도 있다. 그것은 바로 1집의 저스디스, 예전의 허승, 모두가 공감할 법하면서도 울림을 받을 법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술적으로 혁신적인 모습 말이다.

그렇다고 앨범의 어떤 외적인 점이 혁신적이냐? 그런 것은 또 아니다. 확실한 건 ‘기술적 혁신’에 초점을 잡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LIT의 음악적 디테일은 기괴할 정도로 엄청나다. 들을 수록 새로운 것들이 나온다. 하지만 한 번 듣는 것으로, 그리고 이지리스닝으로는 쉽게 찾기 힘들다. 또한, LIT은 음악적 기술이 메시지를 따라오고, 메시지는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 형식의 앨범이다. 문제는 감정이 지나치게 전면에 나서는 반면, 그 감정을 묶어줄 메시지가 모호하게 들린다는 점이다. 메시지가 흐려지면, 그 메시지를 보조하는 음악적 장치들 역시 제 힘을 다 보여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단순히 표면적 서사와 표현에만 집중하면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다. 전반부는 적어도 명료한 흐름 정도는 있기에 표면적 가사에만 집중해도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후반부는 그냥 ‘승이가 싫어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일기쯤으로 들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조금 더 깊이 말해보자. 이 앨범은 CD1과 CD2로 나뉘어져 있다.

CD1에서는 고백과 성찰의 성격이 강하다. 음악적으로만 봐도 ‘완벽한 깔끔함‘을 취한다. 1번 트랙은 강렬하고 웅장한, 하지만 클래식한 느낌으로, 완벽하게 LIT의 시작을 알린다. 고백의 서사가 드러나는 2번, 3번 트랙에서는 몽환적인 비트와 가벼운 질감의 드럼이 들어온다. 이내 4번 트랙은 마치 잔인한 서커스를 보는 듯하다. 그러한 장난기 섞인 분노가 5번, 6번 트랙에 곧게 전달된다 ― 5번 트랙에서 비웃는 듯한 말투를 넣는다거나, 6번 트랙 후반부 아웃트로에서 마치 상대를 조롱하는 듯이 흘리는 부분. 그리고 7번 트랙에서 유머러스한 사회 통찰과 가족 단위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받쳐주는 가벼운 비트, 8번 트랙의 몽환적인 과거 회상, 9번 트랙의 아프로 비트 기반 자기 고백.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서사와 음악적 성취다.

하지만 CD2에서는 혼란과 분노의 성격이 강하다. 거의 쌓아 올린 서사를 무너뜨리는 느낌. 스산한 분위기에서 아슬아슬한 고립감을 형성하는 10번 트랙이 지나면, 왜인지 따스한 분위기인데도 절절함이 숨겨진 듯한 11번 트랙이 지나간다. 12번 트랙부터는 혼란 일색이다. 누군가를 저격하는 듯한 비트와 가사. 13번 트랙은 가히 외국 힙합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비트인데, 그 위에 쌓아올린 저스디스와 포티몽키의 퍼포먼스가 마치 희극처럼 느껴진다. 의도된 블랙코미디 같기도 하다. 14번 트랙의 완성도 높은 붐뱁을 지나면 15번 트랙의 끔찍한 분노가 또 혼란을 자아낸다. 16번 트랙에 와서야 뭔가가 확실히 무너지고 있음이 느껴지고, 17번 트랙에서 고조점을 찍는다 ― 이 곡에서의 음악적 성취와 고조를 위한 점진적 과정은 놀라울 정도다. 18번 트랙 특유의 나레이션과 절절한 슬픔이 뒤섞여 어딘가 모를 감상이 드러나면, 19번 트랙에서 갑자기 이모(Emo)와 인디 락, 얼터너티브 힙합을 가져와 부르짖고서 공허함을 남긴다. 그리고 20번 트랙이 가져오는 충격을 마무리로 앨범이 끝난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면 청자들은 청취 이후 필연적으로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의문감과 불쾌감, 즉 “혼란”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누구를 향한 비판인지 모르겠고. 강렬하긴 한데 당최 무슨 감정인지, 하지만 뚜렷하게 말하는 것 같긴 하고. 해석은 힘들지만 귀에 들리는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으니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며 듣는다. 그리고 답을 찾으며 해독하던 과정 중 앨범은 끝나있다.

이 점에서 저스디스는 확실히 성공했다. 우리에게 자신이 느낀 혼란을 주고 싶다고 했으니. 그는 혼란스러운 미로를 앨범에 확연히 드러낸 것이다.

이 혼란 앞에 청자들은 두 갈래의 길에 놓인다.

아티스트가 사회 비판만 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혼자 분위기 파악 못하고 화만 낸 앨범으로 생각하는 길.

혹은 아티스트가 앨범으로 그린 미로 속에 무언가를 숨겨 놓았음을 느끼고, 조심스레 그 미로의 끝에 도달하는 혼란스러운 여정을 감행하는 길.

나는 후자의 길이 충분히 가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함께 미로를 더듬어 안으로 가보도록 하자.

LOST IN TRANSLATION

 

심층분석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크게 두 가지였다. 굉장한 앨범이라는 것, 하지만 너무 위험한 앨범이라는 것.

첫째로는, 단언코 한국 힙합에서 찾아보기 힘든 ― 어쩌면 거의 전례가 없는 시도를 자행했고, 그 시도가 내게는 성공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로는, 이 앨범은 오해되는 순간 변질되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평가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 모두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비롯된다. 바로 ‘치밀한 암호화’ 때문이다.

이 앨범은 솔직한 상징들로 도배되어 있다. 게다가 상징들의 추상적 형태가 너무 강력해 상징에 휘말리면 번역이 불가능해진다.

또한 너무 자극적이다. 분노의 형태로 똘똘 뭉쳐서 비판적인 언어로 부딪히고 마찰되어 서로 파괴되는 순간에 나타나는 파열음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들린다. 그리고 그 상징을 뱉는 화자의 감정. 이것이 가장 크다. 버티기 힘들 정도로 너무 솔직하다. 쉽게 피로해질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심지어 랩이라는 장르에서, 상징들이 가지는 정보량이 너무나도 많다면 어떨까? 꾸준히, 또 많이 듣지 않는 이상 상징들을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혹자는 이 앨범이 너무 피로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연하다. 당최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명백하지도 않은데, 피상적인 사회 비판이나 늘어놓는 꼴처럼 보이니.

물론 저스디스가 아예 사회 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표면적으로 이루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사회의 이면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범법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을 테니.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앨범을 홍보하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청취를 유도하고, 그 속에서 마약 유통과 중독, 원나잇, 쾌락 도피 등의 문제를 아주 선연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내면에 드리운 그림자는 단지 분노가 일방향이라는 오해를 완전히 뒤엎어버린다.

Dont cross에서 그는 누군가를 향해 끔찍한 비난을 장난스럽게 열거하는 듯하다. 그 뒤를 잇는 Curse에서는 명백히 누군가의 저주가 되겠노라 말하는 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THISpatch, THISISJUSTHIS Pt.3에서는 당최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애매해진다. 사회 비판인가? 하기에는 또 너무 명확하면서도 방향이 모호하다. (Cant quit this shit은 좀 낫다, 이건 확실해 보인다.) Wrap it up은 중독성 있는 훅과 비트, 그리고 벌스에서 정말 대놓고 외국 어떤 래퍼, 혹은 양산형 래퍼를 따라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혼란스러운 칼질은 16번 트랙 친구에서 조금 명확해진다. 수도 없는 칼부림 후에 외로움을 말하는 그의 나약한 이면은 싸움에 지쳤다기보단 그저 누군가 자신 곁을 지켜주길 바라는 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17번 트랙 내 얘기에서 모든 의심들, 추론들, 모호하면서도 끊임없이 혼란스러운 분노의 방향들이 확실해진다.

마치 트랙의 가사에서 읊게 되는 모든 말이 곧 자신의 경험담인 것처럼 말하게 되면서 스스로의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내밀한 부분에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키가 더 필요하다. 바로 5번 트랙 Dont cross에서 나타난 ‘여자’.

16살에 만난, 재혼한, 낙태한 여자? 그런 여자와 만난 래퍼가 있다고 스닉 디스 할 거면, 그리고 그 대상이 빈지노일 것이라면 이렇게 꽁꽁 숨겨놓을 이유도, 명분도 없다 ― 게다가 이미 그는 여러 번 빈지노를 존경한다고 했으니.

그럼 이 여자는 누구인가? 바로 ‘힙합’의 은유적 상징이다. 그는 여러 번 인터뷰에서도 힙합을 여자에 비유하곤 했다. 그에게 있어서 여자와 힙합은 사랑의 대상이자 가끔 그것을 수단화하게 됨으로써 자신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는,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는 누군가이다.

16살 때 만난 그녀 = 16년도의 저스디스(1집 발매)

낙태 = 쇼미더머니 촬영, 피처링 쇄도, 행사, 아이돌 롤플레잉, 방송 참여

재혼 = 그럼에도 힙합을 떠날 수가 없음

이런 마음에 그는 두 가지 자아로 분열된다. 6번 트랙 Curse의 첫 번째 벌스에서는 두 가지 목소리가 함께 랩을 한다. 변조된 목소리는 곧 진실을 대변하고, 영혼 팔지 않으며, 힙합을 사랑하는 저스디스(트랙 초반을 잘 들어보면 자신을 배신한 거냐는, 영화 달콤한 인생의 대사가 나온다). 원래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리고 나약하지만 동생들과 가족들을 사랑하는, 그러나 힙합도 여전히 사랑하는 허승.

변조된 목소리는 허승을 공격한다.

“진지하자며 XX 넌 어디로” = 영혼 안 팔겠다던 허승, 너는 뭐 하냐?

“개처럼 벌어 나는 허승 아냐 정승” = 차라리 돈이나 벌어야 뭐라도 남지 왜 아직 진심인데?

허승은 나름대로 자기 방어도 한다.

“목에 깁스한 동료들 뻔뻔” = 아이돌 작사로도 잘 벌어먹고 사는데 나는 왜 안 돼?

“내가 구라친 거 있어? XX 목 떼이쇼” = 내로남불이라 욕먹는 거 ㅇㅋ. 근데 난 적어도 구라는 안 침

그러면서 함께 목소리가 합쳐지는 부분.

“이 XXX들아 어떻게 내 발라드랑 저 새끼들 발라드 랩이랑 퉁 쳐”

저스디스의 발라드 시도는 일종의 사업적 노선 변경이었고, 그것은 밥 한 끼 먹여주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힙합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는 아예 반항이라도 하듯이 엿을 들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오는 끔찍한 가사.

I hope your mama’s pretty

I hope your sisters are pretty

I hope you have your daughter soon

They can have my baby

I hope your son hates me

I hope your pops hates me

But I’m poison to your family

Curse

(차마 번역할 수 없음…)

이 목소리도 두 자아가 합쳐져 있다. 즉, 자신에게 밥 한 끼 안 먹여주던 힙합에 대한 애정 섞인 분노로 자아가 통합됨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일관된 방향을 가진다. 표면적 의미만 봐도 명확하다. 실제로 미성년자와 만나는 래퍼, 낙태시키고 당당한 래퍼, 힙합을 사랑하는 척 이용하는 래퍼. 그들의 저주가 되어주겠다고 하는 가사이다.

그러나 단순한 ‘혐오 표현’이 아니라 가족을 들먹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저스디스는 자기 가족 건드린다고 분개했던 자가 아니던가? 또 내로남불인가?

여기서 두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첫째, 가족의 의미.

둘째, 혐오의 방향.

먼저 가족의 의미에 집중해보자.

저스디스는 이 트랙 이후에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더욱 심층적으로 접근한다. 이 앨범에서 말하는 가족이란 아주 작은 단위의 공동체이자 한 인간의 평생을 짓는 소우주이다. 예술가는 평생토록 자신의 어린 시절을 팔아 먹는다고 했던가. 그는 가족으로부터 형성된 자신의 자아를 깊게 들여다보고, 자신의 아주 작은 부분도 가족으로부터 왔음을 깨닫는다(유년).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국가와 공동체가 자신을 억압했던 시기와 자유를 찾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그 욕망으로는 모두 완벽하지 않음을 본다(VIVID). 그리고 그 해답은 언제나 화합과 사랑. 그곳에 빛이 있음을, 희망이 있음을 붙잡고, CD1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예술을 알아봐주지 못하는 과거의 심정에서 벗어나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전환점이 생긴다. 그 시초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온전하고 고립된 ‘나’는 없고, ‘너’도 없으며, 우리는 모두 서로를 형성하고, 빚고, 만들고 있었다는 것.

내 삶의 중심에서, 이제 너에게로

VIVID(feat. 인순이)

하지만 왜 저스디스는 갑자기 또 희망찬 이야기는 저 멀리에 두고 다시 분노를 입에 담는가. 그것이 바로 ‘분노의 방향’과 ‘책임 소지의 불명료함’에 대해 그가 느낀 혼돈이었을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분노의 방향이다.

저스디스는 ‘내로남불’, 즉 상대에게 요구한 잣대가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다며 끊임없이 욕을 먹은 래퍼이다. 몇몇은 오해이겠지만, 몇몇은 진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스디스가 다다른 결론은 바로 분노의 방향이 단지 일직선이 아니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 솔직하고,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때로는 그 말이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칼날은 항상 자기를 향하고 있었다 ― 방향만 다르게 보였을 뿐. 어느 순간 저스디스는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깊이 들여다보면 드러나는 진실이란 곧 스스로를 향한 혐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그는 상대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끝내는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증오의 혈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대중들의 눈에는 그의 태도는 항상 ‘쿨한 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대중들은 그가 앨범을 통해 뱉어대는 말들이 또 누군가를 향한 말이겠거니, 혐오는 멈추라면서 또 혐오는 퍼뜨리는 중이라거니, 내로남불 뱀새끼니, 이런 식으로 이해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앨범을 통해 드러낸 저스디스의 의도는 정반대이다. 이제 그는 누군가를 향해 칼침을 놓음으로 자신을 향하게 두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렇게 자신을 수도 없이 찔렀음을, 그리고 그런 자기 자신을 본인도 알고 있음을, 자신이 끔찍하고 별 볼일 없는 인간임을, 내면의 구석구석까지 직접 털어서, 피를 쏟아내듯이 선연하게 보여준다.

심지어는 이젠 직접 자신을 찔러댄다. 원나잇 중독자이며, 우울증 환자고, 약 복용자였으며, 가족을 사랑해서 힙합을 버리고 끝내는 자신의 자아가 스스로를 죽이려고 드는 상태에 있다는 것까지.

동시에 메타포는 확실하다. 가령 “Mary Jane”과 “떨”, “대마초”라는 키워드가 반복되는데, 이는 저스디스가 중독된 대상에 대한 메타포이다. 동시에 4번 트랙의 서두에서 ‘황색 스파이더맨’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스파이더맨의 연인이 메리 제인 - 대마초의 은어 - 임을 생각하면, 4번 트랙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대중들의 광기에 몸을 맡기는 저스디스를 보였는지도 모른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영웅의 가면을 썼지만, 대중들의 웃음을 위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

이는 앨범 초반에서부터 짐작 가능한 내용이다. 2번 트랙에서의 엇나갔던 과거의 중독에 대한 고백과 영향력에 대한 죄책은 아름답도록 솔직하다. 동생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건강을 팔아 예술을 하던 자신의 오만. “너희까지 우울하게 만들었기에”라고 말하며 자신의 우울증이 세상에 좋지 않은 영향력을 퍼트렸다는 겸손한 성찰을 이어간다. 그렇게 그는 앨범 초반부터 자신을 낱낱이 드러내기로 마음 먹고, 신이 되고자 했던 옛적의 자신을 해체하며 자신에 대한, 당신에 대한, 세상에 대한 고백을 시작하는 것이다. (‘유년’에서 하느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마음, ‘VIVID’에서 억압 당한 힘, ‘돌고 돌고 돌고’에서 자신의 안에 있던 폭력 등)

이제 그가 CD2에 담은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I just speak my truth

당신들과 가까워지려고

비록 뱉을 때마다 멀어졌더라도

이번은 다를 거란 마음으로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돌고 돌고 돌고(Feat. Ra.D)

분노는 대물림된다. 가정에서 주고받은 상처들은 또 퍼져나간다. 그렇게 분노는 사회로 번진다. 점점 커져가는 분노는 주체할 수 없게 된다 ― 그리고 분노한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 또한 분노로 인한 것이다. 거대한 분노를 주축으로 삼아, 결국은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상대를 향한 것인지, 세상을 향한 것인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인 분노의 투사와 현현” 속에서, 한 인간인 허승은 혼돈을 느낀다.

자신을 비웃는 가족들에게 화를 낸 허승. 하지만 정도 없이 매를 든 엄마. 누가 잘못인가?

외모 컴플렉스를 가진 허승. 하지만 외모지상주의를 말하는 사회. 누가 잘못인가?

대마초를 입에 대고 유통한 걸 목격한 허승. 하지만 그것 말고는 돈 벌 길도 없는 힙합. 누가 잘못인가?

외로움에 뒤덮여 길을 잃고 무언가에 중독된 허승. 하지만 사랑을 주지 않은 세상. 누가 잘못인가?

누군가를 향한 말이 혼란스럽게 폭발하는 순간이 바로 17번 트랙 내 얘기이다. 표면 그대로 여자와 만났던 허승의 이야기인지, 혹은 돈이 궁해 힙합과 멀어져 결혼식에서 쇼미 프로듀서인 척하며 사랑했던 힙합을 저 멀리에 두고 와야 했던 저스디스의 이야기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허나 그는 지금 가장 선명하고 뚜렷한 증세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지금껏 이건 다 내 얘기였다고.

그렇게 마지막으로 허승과 저스디스는 대화한다.

너가 느끼는 걸 지금 나도 느껴

그래 내가 느끼는 걸 지금 너도 느껴

우리는 흐느껴

서로의 상처가 다 보여

근데 아물어도

다시 깨어나면 벌어질 상처도 보였어

우린 여기까지인가봐

실망 마 내 입 한마디도 못해

미안하다하면 그게

거짓말인 것도 보일테니까 이 미안함

내 얘기

사랑했던 여자가(힙합이) 딴 남자의 아이를 밴다(변질된다). 이 관계에서 더러움에 책임을 지고 있는 허승, 그리고 저스디스. 그들은 진심으로 힙합을 사랑했으나 밥 한 끼 먹여주지 않는 현실 앞에 상처 받고, 둘로 나뉜다(“괜찮아 니 상처, 그게 결국 분리시켰잖아 XX과 널”) 하지만 그 둘은 여전히 그녀를(힙합을) 떠날 수 없는 그 사랑 안에서 마주한다. 서로를 비난하다 증오에서 하나 된 이전과는 달리, 사랑 안에서 서로 만난다.

허나 그들은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한다. 진실과 멋을 지켜야 하는 힙합의 대변자 저스디스. 가족을 사랑하기에 뱀이 될 자신이 있는 허승. 과거의 발언으로 드러난 두 자아는 서로를 끊임없이 찌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찌르고 찔리는 투쟁의 혈흔은 LIT 후반부의 잉크가 된다. 여태껏 그가 비난하던 존재는 자신이었고, 타인이었으며, 타인에게서 비친 자신이었으므로, 곧 우리였다. 그렇다, 이건 우리의 이야기다. 분노가 전가되고, 증폭되고, 솟아오르는 데에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그저 우리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18번 트랙, XXX. 배우 박정민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는 자아는 이제 확실히 저스디스다. 힙합의 대변자였던 저스디스는 끝내 발라드를 부르며 돈을 벌겠다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허승이라는 한 인간은 아직도 힙합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그렇기에 저스디스는 힙합을 버리는, 허승은 힙합을 선택하는, 아주 역설적인 길에 들어선다.

허나 그가 여태껏 걸어온 길은 끔찍한 진흙탕이었다. 이 진흙탕 같은 투쟁에서 결실은 없었다. 분노는 분노를 낳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분노하는 듯이 자신에게 분노하고, 그 분노는 가정으로, 공동체로, 사회로,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사랑은 사라지고 공허만 남는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목적은 없어진 채로, 불명료함, 오로지 불명료한 세계의 혼란스러운 실체만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18번 트랙의 XXX의 뜻은 전여친이 아닌 “ㅆㅅ끼”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분노와 우울에서 지울 수 없는 자신의 책임이라는 흔적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19번 트랙에서 허승이 마지막 가사를 읊으며 미로의 여정은 끝난다. 사랑을 잃은, 외로움을 품어줄 친구를 잃은, 힙합을 사랑했으나 변해버린 자신을 잃은 허승은 다시 또 미로로 향한다. 여전히 우리를 처절하도록 절망적이게 하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분노가, 소실점도 보이지 않는 미로로.

그리고 마지막 트랙, HOME HOME.

이 푸르고 작은 별에서 벌어지는 혐오의 굴레, 정신을 좀먹는 세계의 터전에서 얼추 감이 잡힐 법한 사명감으로는 뱉을 수 없는 고백의 탄원.

그의 첫 번째 앨범에서는 청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앨범에서는 청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곳이 집임을 말한다.

X같지만 내가 사는 곳으로 오라는 말을 했던 허승인데, 이제는 X같지만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허승이 되었다.

이제야 앨범의 본질이 명확해진다. 그 본질은 애시당초 사회 비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증오 뒤섞인 언어의 난잡한 흐름 속에 숨겨져 있는, 해석 너머의 한 인간이 수놓은 혼란스러운 미로 끝에는 기이한 것이 있다.

바로 사체다.

그것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찔러 죽여버린, 아직 부활하지도 않았으며, 여전히 미로 끝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 사체가 미로에 있다. 이미 부패가 시작하여 썩은 심장을 도려내지도 못한 채 피를 흘리며 발자국에 찍힌 순박한 붉은 색으로 청자들의 길을 인도하는 자가 바로 이 앨범을 만든 허승이다.

힌트는 수도 없이 많이 있다. 그중 가장 명료한 힌트 하나는 바로 2번 트랙 시작 부분이다. 왼쪽에서는 ‘너도’라고, 오른쪽에서는 ‘우리’라고 한다. 그리고 곡에서는 ‘나도’라고 운을 뗀다. 이미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곧 타자의 이야기임을,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임을 알고 있다. 자신의 시체를 박제한다는 것은 가장 세련되고 잔인한 방법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이다.

또한, 앨범의 컨셉이 미로라는 점에서, 마치 미로를 더듬듯이, 1번 트랙과 19번 트랙에서 반복되는 구절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 의도는 명백하게 드러난다.

I’m lost in translation

걍 할 뿐이야 display를

뭐야 무신론자 앞에 예수

So lie or 해 경배를 It’s LIT

LIT, Lost Love(Feat. Dut2, Street Baby, 009)

언젠가 허승이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 앨범을 통해 허승이라는 자아와 저스디스라는 페르소나는 통합될 것이다”라고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전혀 통합된 것 같지도 않은 채로 저스디스라는 자아가 허승을 떠나는 것이 결말이라니. 하지만 19번 트랙에서 1번 트랙으로 다시 돌아오면 답이 명백해진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죽이는 방법으로 통합의 여정을 걷고 있었다.

그러므로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듣고 다시 듣게 되면 이 가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가사로 들린다. 바로 자신의 사체를 박제하여 보이는 것(display, THISpatch에 찍힌 사진) ― 마치 예수처럼 ― 그것이 그가 이 앨범을 만든 본분이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 본분 하에, 1번 트랙은 자신감 넘치는 선포가 아니라 내면의 끔찍한 이면들을 모두 떨궈버리고 마지못해 쏟아내버리겠다는, 가히 구역질을 자극하는 고백이 된다.

또한, “무신론자 앞의 예수”라는 말은 곧 자신의 박제가 뻔히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도대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이들에게 예수의 시체를, 그것도 부활하지 않은 단지 힘없이 쳐진 육체에 지나지 않을 뿐인 몸을 보여준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는가?

허나 복음서에서 예수는 부활했고, 그를 믿지 않은 자들은 거짓말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믿은 자들은 곧 예수를 경배했다.

이 둘의 차이는 바로 예수의 부활을 경험했냐, 아니냐로 갈라지지 않는다. 바로 “그들이 어떤 메시아를 기대하는가”였다.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길 바랐던 자들은 예수를 죽이고 여전히 신을 믿으며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정작 진정한 메시아로 다가온 예수는 거부한 “무신론자”가 되어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자 한 이들은 그를 경배한다.

저스디스는 곧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다가도(LIT), 자신은 예수가 아니라고 하고(내가 뭐라고), 다시 자신은 예수와도 같다고(친구) 한다. 그의 예수 컴플렉스와 겸손에 대한 깨달음이 동시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속에는 개인적인 기대로 자신을 억지로 번역하는 자들을 향한 실망과 사랑 받고 싶다는 외로움이 나타난다. 그 중심에는 십자가에 박혀 들어올려진 예수의 최후와도 같은 자신의 박제가 있다. 결국은 그도 어느 순간부터 예수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저스디스는 이 메시지를 증폭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대중 친화적인 길을 걸었다. 그렇게 앨범에 대한 관심과 대중들의 스포트라이트가 커리어 상 최고점으로 도달했을 당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앨범을 내던진다. 피로 무뎌진 미로가 서있는 앨범. 연예계의 더러움을 낱낱이 드러낸 앨범. 니들이 좋아하는 언니 오빠들 전부 내가 이렇듯이 더럽기 짝이 없다는 앨범. 기대하지 말라고, 네가 원하는 ‘신’은 적어도 여기에 없다고 말한다.

허나 청자들은 저스디스에게 날카로운 랩을 기대한다. 빈지노가 너를 스닉 디스했으니 맞받아치라고. 이찬혁 디스를 이어가라고. 너도 혐오의 사회가 이상하다고 하면서 디스 계속 하지 않냐고. 어서 참여하라고. 그 증오의 게임에서 너도 피를 흘리고, 칼을 꽂으라고.

그렇기에 기대한다. 킬링벌스와 피처링으로 곡들을 사방팔방 찢어놓던 20년도 이전의 저스디스를. 단신으로 VMC를 피터지게 패던 18년도의 저스디스를. 지하방에서 들끓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세상의 멸시에 대한 복수를 끊임없이 자행하던 16년도의 저스디스를.

저스디스가 누구에게 칼을 꽂을까?

저스디스가 어떤 놈을 죽여줄까?

저스디스가 어떻게 찢을까?

저스디스가 또 뭐에 빡쳐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LIT에서 발견한 것은, 스스로 찌르고 찔러 피범벅이 된 사체로 박제된 허승 뿐이다.

그의 디스에는 항상 힙합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 한국 힙합 팬들과 대중들이 자주 잊는 디스의 어원은 dis-respect이다. 즉 ‘존경’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는 힙합을, 사회를, 문화를, 공동체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에 열병을 곯는 자, 혹은 대놓고 멋이 없는 자, 그들을 향해서 “증오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존경을 멈추는”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한 번은 저스디스가 팔로알토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래퍼들은 진정 순수한 사람들이라고. 뭔가 다 이상하게 흘러가는 와중에 래퍼들이란 “야, 다 비켜봐. 니네 존나 멋없어 지금.”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순수한 용기는 자기 오만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자신을 설명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서 비롯된 예술가의 본분을, 그는 가히 잔인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이행하고 있다.

남은 생, 예술가로서 내 역할 다 하리

아직 얘기하기에는 일러, 모든 이야기

Diss-a-point

예술가란 특유의 예민하고 섬세한 시각으로 바라본 세계를 고유한 특색의 삶으로 직관하고, 해석하여, 나타낸다. 그렇게 나타난 하나의 신비로운 세계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세계에 울림을 준다. 즉, 타자의 세계를 넓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예술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이 예술의 본질로써 나타나는 그의 본분은 바로 진흙탕에 빠져서 자신의 상흔과 벗겨진 피부, 끊임없는 굴레, 그에 대한 자신의 책임, 사악함, 연약함, 모두 드러내는 것이다. 수도 없이 자신을 난도질해 피부처럼 엉겨붙은 가면을 벗겨내자, 그곳에는 허승이라는 한 사람을 통과한 세계가 드러났다. 마치 미로 같은 세계. 누구의 분노도, 누구의 책임도, 누구의 잘못도, 그저 모호해져버릴 뿐인 세계. 끊임없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세계. 탈출할 수도 없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굴레의 세계.

그러나 우리가 밟을 딛고 살아야 하는 세계.

허승은 이제 1집에서 보였던 고독하고 배고픈 예술가의 길에서 벗어났다. 그는 저스디스를 자신 안에서 지우며 미로 바깥을 걸어가기 위해 마지막 트랙을 남겨두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곧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임을 알고 있다. 그것들이 난잡하게 뒤죽박죽 섞여서는 단 하나도 명료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집이다.

아래에선 동경해, 위에선 두려워해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다시 또 아래로

씹새끼, 돌고돌고돌고(Fear.Ra.D)

넌 네 입을 열었고

이제 그 얘기는 네 얘기에서

모두의 얘기가 됐어

걔넨 입을 열었고

이제 그 얘기는 네 얘기에서

우리의 얘기가 됐어

난 내 입을 닫았고

이제 그 얘기는 네 얘기에서

내 얘기가 됐어

그 얘기는 내 얘기가 돼

이제는 노래가 됐어

내 얘기

1집의 마지막에서는 자신의 집에 초대했지만, 2집의 마지막에서는 자신의 미로에서 쫓아내고 우리의 집, 더욱 거대한 미로에 우리를 밀어 넣는다.

쉽게 말하자면,

1집의 마지막은

“여기 어때 보여? 이상하지? 내 집이야. 여기서 살아볼래?”

2집의 마지막은

“여기 어때? 이상하지? 우리 집이야. 여기서 살아야 해.”

그의 가장 빛나는 미덕인 솔직함은 단지 사회가 어떻다는 현상 설명 따위가 아니다. 그는 이제 퍼뜨리던 분노가 결국 모두 자신을 향한 혐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극단까지 일으켜 올린다. 또한, 분노의 원천은 단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 곧 가족, 공동체, 사회, 그 속에서 서로 주고 받음으로써 순환되고 모멸되며 증폭되어서는 이미 이 세계의 원리 ― 곧 미로의 벽 ― 가 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곧 자신의 내밀한 치부까지 모두 벗겨내어 드러내면서 동시에 세계의 진실까지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태도가 모순적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렇게 단지 한 명의 고독한 예술가, 힙합의 대변자, 혹은 가족의 피해자가 아니라, 구조적 가해자임과 동시에 상처를 주고 받았던 한 명의 인간, 그야말로 처절할 정도로 모멸되었으며 소모되었고, 또한 가증스러운 자신의 분노에 뒤덮인 나약한 존재임이 나타난다. 분노의 굴레 속에서 행방과 방향을 알 수 없이 여전히 뒤덮여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여러 디스전, 아이돌 육성 프로그램 참여, 희화화된 이미지에 대해서 스스로 “이건 행위예술이다”라고 말한 것도 납득이 간다. 자신을 구조적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사실의 형태를 극도로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의 상황을 극단까지 밀어 넣은 수준이니까. 의도적으로 뱉은 말을 지키지 않고, 분노에 휩쓸리며, 돈 앞에 영혼을 파는 모습. 의도적으로 스스로 망가뜨리고, 그 후에 자신이 망가졌음을 끔찍하게 고백한 이 앨범은, 한 명의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힘을 가히 극단으로까지 끌고 갔다는 수준으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이 정도로 자기 파괴와 행위예술을 통합해 앨범 단위로 밀어붙인 시도는, 최소한 한국 힙합 씬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렵다.

이런 해부와 해체에 가까운 스토리텔링과 폭발에 가까울 정도의 분노는 무엇을 담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라는 게 기이하게 느껴진다. 너무나도 역설적이다. 이런 거대한 분노 아래에서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바로 그 메시지는 “사랑을 잃은 나, 사랑을 잃은 시대”로 드러난다. 그래도 사랑이 있을 거라며 희망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되레 반대이다. 아무리 현실이 차가워도, 끝내는 모든 게 무너져도, 분노가 우리를 잡아먹어도, 그 모든 비극이 존재하는 이곳이 우리의 집이라고. 여기서 살아야 한다고. 이 모든 게 내 이야기이고,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이고, 굴레 속에서 끊임없이 처절한 몸부림을 쳐야 한다고. 그곳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말들은 서로 전달되어도 각자의 언어로 번역하는 도중에 손실이 일어날 것이다. 각자의 세계가 부딪힘으로 인하여, 오해, 실망, 증오, 우울, 분노, 분노, 끝없는 분노가 남아도, 우리는 상대의 암호 같은 말을 이해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무언가라도 확실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상대를 자기 멋대로 번역할 뿐인 가해자이기에. 혹은 번역된 피해자이기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난잡스럽게 얽히고 섞인 이 세계에서, 허승이라는 한 인간은 혼란 끝에 사랑을 우리에게 남겼다.

허나 그 사랑의 원형은 어렵다는 말로 흩어진다. 입대 여부와 한낱 작은 도덕성, 번쩍이는 외모, 말투와 행동거지, 편견들에 사라질 뿐이다.

그 중심에는 번역 없는 손실만이 존재하고 있다.

이 푸름으로 서린 우울한 생명의 별에서 우리는 살아야 한다.

노력해도 실패한다.

번역은 손실되고,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서로가 따라가는 쾌락에 휘말린다.

그렇게 서로를 도구처럼 부린다.

비극적인 삶의 고통에 뒤쫓겨 안길 품을 바란다.

하지만 그곳에 사랑은 없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뀐다.

실망은 절망이 된다.

절망은 냉소가 된다.

냉소는 오해를 정당화한다.

서로 이해하지 않는다.

번역은 본능적인 방어의 도구가 되었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혹, 그저 누군가의 이야기인가?

당신 책임은 정말 없는가?

이제 서로 분노할 차례다.

원나잇을 하고,

약을 코로 들이쉬고,

자식을 때려 패고,

성형을 해서 안기고,

대마초를 말고,

가족을 버릴 차례다.

당신의 완전무결함으로

타인의 유죄를 판결하며

대중의 이빨로 마녀를 씹고

신을 죽인 피 아래에서

쾌락으로 춤 출 차례다.

이곳이 우리의 집이다.

죽어도 바뀌지 않을

우리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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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 2시간 전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해석의 적절성과 무관히, 한 편의 글로서 너무 좋은 글이었습니다.

  • 2시간 전

    글이 슬프네 잘읽었음

  • 2시간 전

    읽었던 LIT 관련 글 중에 제일 좋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 1시간 전

    이앨범은 디스 같기도 아닌거 같기도

    대부분 이중 구조를 띄고있습니다

    사실여부는 모르지만 디스도 자기이야기도

    모두 맞을거같습니다

    그정도가 아니면 섣부른 표현들이 설명안됩니다

    마치 단어들을 정해놓고 쓰는 프리스타일처럼요

     

     

     

     

  • 1시간 전

    잘 읽었습니다

  • 1시간 전

    잘 읽었습니다. 저 또한 앨범을 통으로 돌리는 재미를 투매니를 통해서 느꼈기에 공감되는 내용이 많네요

  • 6분 전

    명문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앨범에 대한 깊은 고찰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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