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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감싸는 붉은 손, 에이트레인 [POVIDONE ORANGE] 앨범 리뷰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3시간 전조회 수 99댓글 0

https://m.blog.naver.com/alpha314/224032789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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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트레인 [POVIDONE ORANGE]

2025.09.27

1. 불기둥 (feat. Rani Bober)

2. LOVE IS THE ANSWER (feat. 신설희)

3. POVIDONE (feat. 단편선)

4. 짠 (feat. 담예)

5. DISTOPIA

6. BROKEN HILL

7. UTOPIA

8. 돈이 안 돼도 해 (feat. Ben T Kadar)

9. 딸꾹질

10. SELL FISH

11. 낡은 사랑과 집에 두고 나온 늙은 개

12. 나도

삶의 구석구석에 지옥이 깃들어 살고 있다. 붕괴되기 직전인 공동체, 젊은이들 사이를 기웃거리는 고독, 무신경함으로 점철된 사회, 서로 조롱만 일삼는 멸망론만이 가득한 미래. 염증처럼 곪아 언제든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 세상이라는 상처는 아물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희망을 기대하지 않는다. 50년 내로 인류 사회가 멸망하리라는 예고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계속되었다. 현대인들에게 미래란 언제 올지 모를, 당장 나의 오늘과는 상관이 없는 그들의 내일이다. 치료가 필요하다. 치유가 필요하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이 시대는 치유가 필요하다. 

최근 디스토피아물, 피폐물이라 칭해지는 장르들에 대한 수요가 부쩍 늘어났다. 현재 생산되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 제작된 작품들까지 재조명 받으며 인기를 구가한다. ‘정병’이니 ‘멘헤라’니 하는 키워드들도 우후죽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중 어떤 것들은 이제 밈화되어 사람들 사이에 농담거리로 소비되고 있다. 20년 전 까지만 해도 인간 문명 멸망의 원인이 환경파괴로 지목되었지만, 이젠 환경 파괴가 아니라 인류 사회 붕괴가 당장의 시급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세대간, 성별간, 종교간, 국가간, 갈등은 아마도 환경보다 먼저 인간을 파괴하게 될지도 모른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디스토피아물과 피폐물에 대한 수요는 이러한 세태를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에이트레인 또한 이러한 세상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작 [PRIVATE PINK]에서 자신의 과거와 관련한 상처의 속살을 드러냈던 에이트레인. 그는 어느 순간 상처는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 나의 상처가 있는 것처럼 그들의 상처가 있다. 더 나아가, 현대는 상처라는 단어로 치환 가능할 정도로 모두가 상처받고 있는 시대다. 이제까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노래했던 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세상으로 돌리게 된다.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하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이 흘리는 피를 그저 흘려보내지 말자. 이야기를 쓰자. 나와 그들의 피로 우리만의 이야기를 쓰자. 피로 쓴 이야기로 세상의 상처를 치유해보자. 그것이 바로 [POVIDONE ORANGE]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정규작은 ‘P로 시작하는 단어 + 색깔’을 컨셉으로 제목을 짓고 있는 만큼 이번 앨범 또한 그 컨셉을 따라간다. 앨범 제목에서 볼 수 있는 포비돈은 알다시피 대표적인 소독약의 이름이다. 아이오딘이 대표 성분으로 붉은 빛을 띈다. 가정에 하나씩은 비치해두고 사용하는 아주 대중적인 약인데, 성능도 훌륭해 예전부터 꾸준히 쓰여왔다. 상처를 소독하고 새 살이 돋게 도와주는 붉은빛 소독약. 우리 사회에도 이런 약이 필요할 듯 싶다. 상처받은 모두의 마음에 바를 수 있는, 상처에서 흐르는 피보다 진한 붉은빛의 포비돈 말이다. 

앨범에서 에이트레인의 스탠스는 그저 단순한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식의 평면적 위로가 아니다. 먼저 그는 현실을 직시한다. 첫 트랙 “불기둥”에서 불기둥은 처음에 ‘저기’ 있는 것으로 인식되나 어느 순간 화자는 불기둥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불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산소와 탈 물질. 태울 것이 사라지면 불도 사그라진다. 불은 끊임없이 주위를 집어삼키며 커지지만, 결국 모든 것을 태우고 나면 사라질 운명이다. 불은 자기파괴로서 존재한다. 주변을 불태우며 모조리 잡아먹는 불기둥과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는 어찌 보면 매우 닮았다. 자기파괴로 인한 공멸, 이것이 현대의 삶을 한 문장으로 설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덮어놓고 사랑이 답이다, 라는 결론을 내려본다.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안이 없으니 아마도 답이 될 것이다. 실제로 지금 세상에 사랑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은 간단히 사람을 죽이고,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기를 그만두었다. 그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만 매몰되어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들 살아남기에 급급한 상황이니, 남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긴급하게 처방할 수 있는 약은 결국 사랑일 것이다. 당장 어떤 구체적인 구제책은 찾지 못하더라도,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하다못해 안아주기라도 할 수 있으니까. 일단은, 사랑. 

하지만 품어주는 것만으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상처의 치유는 고통스러운 소독이 우선한다. 거즈를 붙이고 붕대로 감는 것은 그 다음이다. 아프다고 소독을 안 한다면 상처 또한 곪고 덧나기 일쑤다. 에이트레인은 고통의 반영으로 상처를 소독한다. 고통의 반영이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다. 어찌 보면 단순하지만 ‘평범’에 대해 생각해보는 순간부터 이 욕망은 매우 복잡해진다. 평범함이란 무엇인가? 남들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가 고통받는 이유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도, 넓은 집에 살고 싶어서도, 누구보다 빛나는 삶을 살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저 주위 다른 사람들이 사는 정도만, 그들과 같이 소소한 행복을 즐길 수 있을 정도만 살고 싶어서 고통받는 것이다. 에이트레인의 가사는 이런 평범함의 동경을 담는다. 오손도손 가족을 이루고 싶은 욕구, 나와 당신을 닮은 아이를 보고 싶은 욕구,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었으면 하는 욕구 등등. 그가 반영한 욕구들은 우리의 욕구와 다르지 않기에 마주보면 아프다. 이 아픔에서 발상한 공통의 정서가 상처를 치유한다. 

“나도”는 이런 평범함의 동경이 가장 진하게 담긴 곡이다. 편지 형식으로 쓰인 곡은 남들처럼 살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을 단순한 프로듀싱으로 그려냈다. 단순한 곡으로 그려낸 단순한 삶의 욕망. 이 곡은 앨범의 마지막에서 실린 감정만큼이나 긴 여운을 남긴다. 두 가지 꿈을 꿨지만, 우선순위로 밀려난 또 하나의 꿈은 가능성으로 남은 채 말라붙었다. 선택의 갈림길은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을 남기고, 살아보지 못할 삶은 상상으로만 남는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로 살게 되는 가족 그리고 지금까지 그를 살렸던 자신의 음악.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면서도 이 또한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다 듣고 나서 감히 어떤 낱말도 덧붙일 수 없도록 하는 이 곡의 처절한 무게감은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앨범은 중간 지대인 Broken Hill을 기준으로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로 나뉜다. 앨범에서 말하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는 기존의 개념과 반전되어 있다. 디스토피아는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공감과 사랑의 유대로 채워진 공간이다. 반면 유토피아는 원칙으로 세워진 차가운 현실에 개인의 희망이 점점 꺾여가는 갈등과 좌절의 공간이다. 디스토피아는 모든 이와 소통할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이지만 유토피아는 안전하지만 굳게 닫혀 있는 폐쇄적인 공간이다. 앨범은 손잡은 모든 이들과 함께 디스토피아에서 고통받을 것인지, 작지만 안전한 유토피아에서 홀로 보호받을 것인지 묻는다. 삶에 지옥이 깃들어 있대도 내 삶의 천국은 내가 찾아낼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천국을 찾아갈 것인가. 

꿈꾸며 살고 싶다는 욕망, 과연 이기적인 욕망인 것일까. “SELL FISH”는 앞서 스킷으로 쓰인 성 베드로의 일화와 이어지며 꿈과 현실 사이 흔들리는 자신을 그려낸 곡이다. 내가 꿈을 좇는 동안 죽어간 그의 꿈에는 나의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확신이 없다. 이렇게까지 해서 꿔야만 하는 꿈인 걸까. 그런데 당신은 나를 믿는다. 나도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를 확신하는 건지,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장에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 당신만 허락한다면. 현실이라는 불기둥은 계속해서 우리를 태우고 당신은 그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고, 내가 나의 고기를 낚아 올리는 동안 당신은 나를 살리고, 포기하고, 책임지고, 또 나를 살리고… 단지 당신은 나를 사랑해서 계속해서 그렇게…

“SELL FISH”-“낡은 사랑과 집에 두고 나온 늙은 개”-“나도”로 이어지는 파트는 꿈과 사랑을 주제로 엮어낸 앨범의 하이라이트다. 맛은 씁쓸하다. 여느 앨범처럼 달콤함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SELL FISH”에서 흔들렸던 그가 “낡은 사랑과 집에 두고 나온 늙은 개”에서 삶의 이유를 다시금 확인하고, “나도”에서 꿈을 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씁쓸히 받아들이는 과정은 삶의 틈바구니를 붙들고 버텨내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흔들렸다가도 바로 서고, 바로 섰다가도 다시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꿈을 걸어가는 것이 삶이다. 에이트레인은 흔들리고 무너지면서도 또 다시 일어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를 그의 삶으로 응원한다. 삶에서 흘린 피는 살아가며 치유하는 것이라고, 함께 상처받고 함께 치유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POVIDONE ORANGE], 5년 간의 깊디 깊은 그의 여정을 마무리 짓는 작품이자 그의 상처 3부작 중 가장 광활한 마음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시대의 고통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이 앨범은 현대의 또 다른 십자가가 되기에 충분해 못지 않은 작품이 되리라 생각한다. 

피 흘리는 모두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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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온 알앤비 앨범 중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정말 좋은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들어봤다면 들어보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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