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에서 돌아온 비공식소년, <AT THE HIGH CASTLE> 리뷰

이수린, 엄기호 <AT THE HIGH CASTLE> 

2025.08.08

이수린이 돌아왔다. 이름도 바뀌고, 신분도 바뀐 채로. 2020년부터 2024년 1월 입대 직전까지 그가 보인 허슬은 당시 래퍼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Drugonline>은 이제까지 본 적 없던 새로운 트랩을 제시했고, <그물, 덫, 발사대기, 포획>은 세련된 복고 스타일로 많은 리스너들을 충격에 빠뜨렸으며, <이수린ackermann>은 그가 가진 스펙트럼의 지평을 넘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런가 하면 <철한자구>로 먹통붐뱁을 시도했고 <MYEdrugonline>에서 다양한 장르를 재료로 자신의 한계를 실험했으며, <TRUE>에서는 내밀한 이야기들을 가지각색의 비트에 담아냈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작업물을 쏟아내던 그는 24년 1월, 소리 소문 없이 군에 입대한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군대라는 집단과 군 생활이라는 시간은 당연하게도, 한 사람의 인생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온다. 이는 이수린 또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AT THE HIGH CASTLE>은 군에 있는 동안 숙성되고 정제된 이수린의 예술성이 고스란히 담긴 앨범이다. 제목의 High Castle은 그가 복무한 22사단이 있는 강원도 고성高城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군대 중 가장 힘든 곳을 꼽을 때면 빠지지 않는 그곳에서 이수린은 무슨 생각들을 하며 지내고 있었을까. 우리는 또한 군대를 갔다 온 아티스트들이 비약적인 실력 상승을 보인 전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입대 전에도 상당한 폼을 보여주던 이수린은 과연 전역 후 얼마나 발전된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해줄 것인가. 기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전작 <TRUE>에서도 함께했던 프로듀서 엄기호와 합을 맞춘 이번 앨범은 굉장히 오묘한 첫인상을 지닌다. 첫 세 트랙은 진한 붐뱁의 향기가 난다. 마치 <철한자구>의 이수린을 보는 듯하다. 오프닝 트랙인 "COME BACK"은 예상보다 차분한 분위기로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제공한다. 장난스러운 붐뱁 비트에서 춤을 추는 이수린의 랩은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날 것의 플로우를 보여준다. 박자를 밀고 당기거나 발음을 일부러 흘리는 모습은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주던 똑 떨어지는 랩과는 또 다른 맛이다. 이 간극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이번 앨범을 제대로 맛보기 꽤나 어려울 것이다. 

"HIGH CASTLE"부터 이수린이 군 생활을 보내며 했던 생각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해당 곡의 가사는 꼭꼭 씹어 먹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와 나 갇혀 보니 원래부터 갇혀 있었지’, ‘꿈도 사랑도 변하는데 돈 앞에 늘 일편단심’, ‘나와 내가 맺는 promise 새끼손가락을 걸지’과 같은 가사들은 그가 군대에서 속으로 조금씩 다듬어온 생각들을 담아내고 있다. 군대가 한 사람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말은 고독에서 오는 성찰에 그 가치를 둔다. 성찰은 성장을 가져오고, 고독과 고뇌가 밑거름이 되어 내면의 성장을 이룩한다. 이수린의 내면에서도 일련의 과정을 통한 성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이어지는 "ANYTHING"까지의 트랙들은 그의 진솔한 마음을 담은 몇 장의 편지들이 되었다. 앨범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을 가져간 "NEXT TO U"의 여자 친구를 향한 애절한 가사들이 특히 눈여겨볼 만한 포인트다.

반가운 얼굴인 릴타치와 함께한 "우리들이사는방법"부터 분위기는 다시 한번 전환된다. 펌핑된 베이스와 함께 한껏 어둑해진 분위기를 연출하는 비트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시작됨을 알리는 듯하다. "WELCOME TO THE PARTY"는 음울한 보이스 샘플과 빈티지한 드럼이 비장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JUNKIE BUSINESS"는 이 앨범에서 처음 등장한 트랩 비트로 앨범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구간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다. 후드쉽을 강조하는 해당 구간에서 릴타치가 두 번이나 피쳐링으로 등장하는 것은 꽤나 의미가 크다. 본인의 작업물은 보기 힘들지라도 이수린의 작업물에서는 꾸준히 모습을 보여왔던 릴타치는 이제 이수린의 작업물에서 생존신고를 하기에 이른다. 이수린이 릴타치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MORNING PAPER"에서 앨범은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로 돌아선다. 늘어난 피쳐링진들과 함께 마치 펀치라인 놀이를 하듯이 가사를 던지고, 페이크 래퍼들을 조롱한다. 피쳐링진 중에는 디보가 꽤나 눈에 띄는데, 여유롭게 박자를 가지고 노는 모습이 마치 영화에 카메오로 등장한 중견 배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막바지까지 갈수록 드는 생각은 프로듀서인 엄기호의 스펙트럼이 정말 넓다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비슷한 비트가 없으며, 곡마다 쓰인 비트들은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이런 다양한 비트들은 그만큼이나 스펙트럼이 넓은 이수린과 함께 강력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AT THE HIGH CASTLE>은 그간 잠재워둔 이수린의 창의력이 폭발한 작품이다. 아티스트로서 이수린은 끊임없이 도전과 발전을 거듭한다는 크나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디스코그래피를 훑어보더라도 어느 것 하나 비슷한 작품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 그 어디에도 구속될 일 없는 그가 앞으로 어떤 도전을 할지, 그 도전의 결과물을 어떻게 우리 앞에 내보일지 점차 기대하게 된다. 이수린처럼 계속해서 변화하는 아티스트는 그 변화를 감히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상당한 재미를 제공한다. 그 누가<Drugonline> 이후에 <그물, 덫, 발사대기, 포획>을 내리라 예상했을 것이며, <철한자구> 다음으로 <MYEdrugonline>을 내리라 예상했을 거란 말인가. 새로운 이수린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까. <AT THE HIGH CASTLE>은 그의 창의력에 담겨있는 수많은 재료들 중 일부를 꺼내 놓은 것에 불과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