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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쉬베놈 정규 1집-얼

title: 박재범Alonso200020시간 전조회 수 406추천수 1댓글 1

https://blog.naver.com/alonso2000/224000314024

 

 

 

 

얼'이라는 말은 익숙한듯 낮선 말이다. 가끔씩 '민족의 얼'이 어떻다 하는 말이 들려오고, 정신나간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 '얼간이'라며 혀를 차기도 하지만, 과연 무엇이 '얼'인지는 조금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과연 '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때보다도 민족의 정신, 시민들의 얼이 위협받았던 일제 강점기, 그 시기를 견디며 살았던 어느 역사학자는 얼을 이렇게 정의했다.

 

 

'얼'은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니오

사람이면 반드시 사람의 '얼' 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람이오

사람의 '얼'이 없으면 이는 사람이 아니다.

(...)

'저는 저로서'가 이른바 '얼'이니

여기에 무슨 심오함이 있으며

무슨 미묘함이 있으랴.

정인보, <조선사 연구> 中

 

 

모두가 날 때부터 지닌, 자신으로서 살아가려는 마음이 곧 사람의 '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파에 밀리거나 지치다보면 자기를 지키기는 난망해지기 마련이다. 결국 계속 스스로를 찾아가려는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낸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의 얼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머쉬베놈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로컬한 감성을 지닌 구수한 캐릭터와 이를 뒷받침하는 예상 외의 기본기의 절묘한 조합은 그에게 여러 미디어에서의 성공을 안겨주었다. 이센스부터 사이먼 도미닉에 이르는 베테랑들이 그의 음악을 주목했고, 방송에서도 맹활약하여 준우승에 이르렀으며, 게임과의 협업으로 해외에까지 밈으로 널리 퍼지며 대중적 인기의 꼭대기에 있던 그 순간, 머쉬베놈은 홀연히 - 물론 기존 앨범의 선공개 싱글로 내놓은 곡의 난해함으로 인한 대중의 호오도 감안하여야 겠지만 - 자취를 감췄다. 그 이후 몇 년,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그는 음악적인 방향에 대한 검토와 수정을 조용히 거쳐왔고, 그 절치부심이 길어지며 대중들에게 그 이름은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뒤, 머쉬베놈은 또다시 홀연히 나타나 '얼'을 내걸었다. 그는 어째서 오랜 시간 잠시 사라졌던 걸까? 긴 사라짐의 끝에 그가 마주한 자신의 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얼>이 과연, 이 질문들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얼>의 전체적인 그림은 힙합 정규라는 플랫폼에서 30분 10트랙이라는 최대한 압축된 볼륨으로 팝 트렌드의 고금을 한국식으로, 이를 넘어 자기식으로 재해석해냈다는 인상이 짙다. 머쉬베놈 혼자서 앨범을 이끌어가는 중후반의 프로덕션에서 이는 더욱 짙게 드러낸다. "띵띵땡땡"과 "오늘날"에는 트랩에 멜로디와 사이키델릭이 더욱 짙어지는 최근의 시류가 적극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이 트렌드의 종착지인 레이지 넘버 "빠에"로 이어진다. 라틴을 위시한 월드 뮤직에 대한 관심 또한 "날다람쥐"에 이식 되었고, "모나리자"와 "얼"에는 모던 록과 이모 랩의 영향이 또한 강하게 느껴진다. 원체 다양한 영역을 자유로이 오가는 앨범인 만큼 머쉬베놈으로서도 이 모든 것을 능숙히, 실험적으로 구현해낼 만한 지원군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랬던 만큼 노 아이덴티티(No Identity)와의 협업은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바밍타이거에서부터 DEAN, 림 킴 등 얼터너티브한 지향을 지닌 아티스트들, 더 나아가 에스파 등 케이팝 씬의 핵심들까지 두루 협업한 경험치는 <얼>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유효하게 작동한다. 테크노와 드럼 앤 베이스를 오가는 "몰러유", 트랩에 기반한 경쾌한 변주가 돋보이는 "띵띵떙땡"의 변칙적인 전개부터 "빠에"의 과격함, 거북이부터 코요태에 이르는 2000년대의 대중음악 스타들을 적극 기용한 "오랫동안"과 "오토매틱"의 대중적인 접근, 심지어 '신바람' 이박사의 뽕짝과 작금의 하이퍼 팝이라는, 과거와 현재가 가장 극명히 교차되는 인트로인 "돌림판"에 이르는 폭넓은 전개는 노 아이덴티티가 지닌 마이너한 감수성과 이를 메인 스트림 음악에 접목해낼 줄 아는 영리함이 없었다면 필요 이상의 설득력을 확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머쉬베놈의 퍼포먼스 역시 이러한 프로덕션적 발전에 맞춰 충청 방언의 재치넘치는 억양을 랩의 문법에 적용시킨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려는 시도가 여실하다. 장기간의 은거 중 머쉬베놈은 언어적 변천에 대한 여러 서적을 탐독하며 랩 퍼포먼스의 발전 방안을 고민하였고, 그 성과는 앨범 곳곳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돌림판"에서는 잰말놀이를 차용하여 기이한 운율감을 통한 사운드적 쾌감을 설게하였고, "날다람쥐"에서는 한국어를 스페인어 억양에 가깝게 처리하며 라틴 팝에 자연스럽게 적용하는가 하면, "모나리자", "얼"로 이어지는 엔딩 구간에서는 처연한 멜로디 구축에도 능숙한 모습을 보인다. 정석적인 라이밍에서는 묘하게 어긋나는 모습을 보일 때도 가끔 있지만, 탄탄한 발성에 과 유쾌한 톤, 기이한 억양에서 기인하는 능청스러움은 이마저도 그저 웃어 넘기게끔 하는 마력이 있다.

 

 

 

 

프로덕션과 퍼포먼스에서 복고적인 기풍을 적극 가져온 만큼 가사의 여러 레퍼런스 또한 과거에 집중되어 있다. 서태지의 가사를 방정맞게 받아치는 모습에서는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빅뱅과 <박하사탕>, < TV는 사랑을 싣고>와 같은 향수를 자극하는 매스미디어의 파편들은 직접 인용되며, 때로는 표현 안에서 뒤틀리며 머쉬베놈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전기로 작용한다.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앨범 곳곳에 6.25 전쟁과 파독 광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IMF 구제금융 등 한국 현대사의 곡절이 단편적으로 스펴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정인보 선생의 말을 가져와 보자.

 

 

본심은 감통(感通)에 의해 살고 간격(間隔)으로 인해 죽는다.

만약 생민의 아픔과 고통이 곧 나의 아픔과 고통이 되며

생민들의 괴로움이 곧 나의 괴로움으로

그 감통이 나의 몸에 존재함과 같다면

스스로 분주하게 돕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 몸은 거꾸러졌더라도

본심은 살아 있다.

이것은 몇몇 사람에게 하늘이 부여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모두 같이 감통되는 것이다.

정인보, <양명학연론> 中

 

 

역사의 질곡에 같이 감동하고 아파하다 보면 끝내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게 되고, 마음에는 자연스레 몸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머쉬베놈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유달리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품었던 조부모의 경험을 톺아갔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겪었던 고난과 승리를 모두 마음에 품었고, 그로써 얻은 감격이 끝내 자신의 개성과 조화되며 주목할 만한 아트 폼을 남기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품었던 한과 얼이, 몇몇 곡에서 민요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서도 강하게 통감된다. 하물며 앨범의 끝자락에서 머쉬베놈의 입에서 나온 그 노래는,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며 그리워하는 상여노래가 아니었던가. 그동안 자신에게로의 깊은 탐구를 끝내고 다시 돌아와 보니, 그동안 돌보지 못한 가족과 벗들이 끝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 한량없는 죄송스러움으로 앨범이 끝나는 것은, 그 슬픔마저도 그가 짊어지고 나아가기로 한 자신의 단편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칩거 중의 깊은 탐구는 옛날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 자기 본위의 음악적 실험으로 이어졌다. 머쉬베놈은 이 과정에서 마주한 '촌티'나 '뽕기', 세련되고 정돈된 것과 멀리있는 부분에 대해서 굳이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자신의 색으로 덮어 지금의 음악적 유행과 영리하게 섞어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앨범의 게스트들이 장르 씬 외부에 있는 과거의 사람들인 것이 선뜻 납득이 된다. 주류의 음악을 포섭하되, 오히려 주류의 정서를 비껴가며 자신의 색을 확보하려한 것이다. 물론 이런 부류의 감성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청국장찌개를 모두가 좋아하기는 힘든 법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에는 자기다움과 지난 날의 향수에 대한 헌정이 섞인 얼큰함과 깔끔함이 있다. 물론, <얼>이 2025년 최고의 한국 힙합 앨범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2025년 한국 힙합의 주류에서 불쑥 튀어나온, 가장 개성적이고 흥미로운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결국 머쉬베놈만의 이단적인 감성이 또 한 건 해낸 셈이다.

Best Track: 몰러유, 오토매틱 (feat. 코요태),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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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title: 박재범Alonso2000글쓴이
    20시간 전

    본 리뷰는 HOM#28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hausofmatters.com/magazine/hom/#las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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