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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지 못한 이의 더없이 아름다운 작열 | 《독립음악》 감상문

이명준2025.07.19 18:13조회 수 400추천수 7댓글 5

                                            D8C4F0yXCQtmrsmk94_e2npliLg58Mn4CXVkf5Heiz0aJo7_O0_kWPQxSO-KBBXltrXwDsvPDeS5AW_T-h12pu6Crgc_H8BhxYQejVhK0W-og9yKREJE2os2b5.webp

 

 

[이 글은 온전히 음알못의 관점에서 쓴 앨범 감상문임을 알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열등감',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

 

 열등감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 나를 빗대어 볼 것이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남보다 못한 부분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열등감에 무던해질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것마저 쉽지 않아 보인다. 

 

 나 역시 평범한 사람이기에 열등감을 느낀 적이 많았다. 계속해서 남과 나를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고, 승리하면 기뻐하고, 패배하면 슬퍼하며, 언젠가 그렇게 살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는 시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를 사랑하기보다는 비관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던 그때, 우연히 최엘비의 《독립음악》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었다.

 

 본작을 듣기 이전의 나는 최엘비라는 사람을 전혀 몰랐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최엘비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봐야 하나 싶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첫 트랙인 "아는 사람 얘기"에서부터 최엘비 스스로가 자신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이건 내 친구 중 하나의 얘기

걔랑 또 다른 친구 둘 총 셋이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같이 했나 봐

걔 크루 이름이 뭐 섹시스트릿

아무튼 꽤나 잘 나갔지

걔 말고 걔가 속한 크루 말이야

아니 그 크루라고 하기보단

걜 제외한 나머지 둘이 더 맞다

 

그 둘은 참 반짝거렸어 항상

어디를 가던 주목을 받아

회사도 가고 쇼미도 나가

1, 2 등 자리에 나란히

서있는 거를 그 나머지 한 명은

티브이로 봤었지

걔도 같이 나가 예선 탈락한 그 방송을

방에 처박혀 티브이로

 

보는 걔 기분이 어땠을까 싶어

근데 걔는 굳이

슬퍼하지 않으려 했어

그늘이 익숙했거든 더 숨어 깊숙이

 

~

 

근데 걔가 더 븅신 같은 건

그 역할에 만족했다는 점

나도 꼭 저렇게 되고 말 거라는

머릿속 야망의 스위치를 껐지

 

~

 

이건 또 아까 그 친구의 얘기

걘 이제 음악을 하는 게 재미가 없나 봐

생각이 들어 ‘난 괜히 음악을 시작해가지고

폐 끼치는 게 아닌가 엄마 아빠한테’

 

~

 

이건 그 친구의 마지막 얘기

걷잡을 수 없게 커졌지 괴리감은

 

~

 

걔 얘길 더 해보려 해

항상 조연으로 살았던 애

여기서만큼은 주인공 해보라 하지

뭐 좀만 더 들어줄래?

듣고 싶다면 얘 이름은 알려주고

시작해도 나쁘진 않겠지

내가 여태까지 말했던 아는 사람은

이렇게 불렸어 최엘비.

 

- "아는 사람 얘기"에서 최엘비

 


4분 가량의 곡에서 최엘비는 현재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또 어떤 마음인지 가감 없이 이야기한다. 잘나가는 친구 두 명에 비해 잘 풀리지 않는 자신의 처지와 그에 따른 의욕 상실, 부모님을 향한 미안함, 이상과의 틈에서 생기는 괴리감까지, 누군가에게 선뜻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오디션 형식을 빌려 '최엘비'라는 배역 속에서 이야기하며 끝에는 이 이야기가 자신의 것임을 고백하며 트랙을 마무리한다. 내가 최엘비를 이해하는 데에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오직 이 트랙 속의 가사와 최엘비의 목소리에서 배어 나오는 진심만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2번 트랙 "마마보이"는 엄마와의 전화 통화로 시작한다.


 

"어, 재성아"

"여보세요?"

 

엄마 난 밥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

웬일이긴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아무 일도 없으니까 하지 마 걱정은

아, 할 말 있는데 나 10만 원만 빌려줘

 

~

 

보고 싶어 많이 돈을 받아서가 아니라

엄마 내 마음 알지 이제 작업해야 하니까

끊을게 난 우리 엄마밖에 없어 역시

전화가 끝나고 거울에 비친 건 병신

 

- "마마보이"에서 최엘비"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감정을 겪지 않았을까? 오늘 하루,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았는데도 주머니는 비어 있어서 부모님께 손 빌릴 때 드는 죄책감,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심임에도 용돈을 받는 상황 때문에 그 마음이 가식적이어 보이지는 않을까하는 불안감, 그렇게 돈을 받고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느끼는 한심함까지, 이번 트랙에서는 앞선 트랙 "아는 사람 얘기"에서 보인 열등감 반대편에 자리 잡은 부모님을 향한 미안함을 더욱 조명한다. 

 

 3번 트랙 "섹스"에서는 "아는 사람 얘기"의 '걜 제외한 나머지 둘'이 누군지 밝혀진다. 


 

누가 찾아왔지 이름은 씨잼이래

나도 랩하는데 네가 한 거 들려줄 수 있냬

뭐, 안 할 이유는 없지 바로 복도로 나가

생각해 보면 완전 영화 속 한 장면이잖아

 

“난 독재자 마치 김정일이나 히틀러

총, 핵, 칼 대신 마이크를 휘둘러”

이딴 가사들을 꽤나 진지하게

뱉어댔지 옆에 빗박해준 앤 비와이래

 

~

 

그때도 씨잼하고 비와이는 멋졌던 기억

 

둘이 만든 노래를 들려줄 땐 그렇게

사람이 빛날 수도 있다는 걸 난 느꼈네

나 자신과 비교해 ‘나도 언젠가는’

그 생각은 10년이 흘렀는데도 하네 암튼

 

우린 스무 살이 됐고 씨잼은 찍었어 에이요

비와이는 타임 트레블 레이지 본즈는 뭐 했지

 

~

 

쇼미 5 1차 예선 탈락하고 집에 가

씨잼하고 비와이는 붙었대 뭐 예상한

결과 어릴 때부터 남달랐으니까 걔넨

 

어쩌면 당연해 못 따라잡는 게

노래방에서 가서 걔네가 마이크를 잡을 때

부터 이미 지고 시작한 걸지도 몰라

그때부터 내 스탯은 찌질 열등감에 몰빵

 

- "섹스"에서 최엘비

 


물론 이전에도 이해가 안 된 건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듣고 나서는 최엘비가 느낀 열등감을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같이 랩을 시작한 친구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씨잼과 비와이라니. 열등감이 안 생기는 게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는 최엘비가 나는 대단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좁은 나였으면 일찍이 음악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참고로 트랙의 제목인 "섹스"는 최엘비, 씨잼, 비와이가 속한 크루 '섹시스트릿'의 줄임말이다.)

 

 나는 여기까지가 본작의 1부라고 생각한다. 1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최엘비의 과거'정도가 될 것 같다. 4번 트랙인 "주인공"부터는 최엘비 자신의 내면이 무대가 된다. 

 


 

물론 하고 싶지 나도 주인공은

하지만 내가 쓴 시나리오는

감독의 맘엔 들지 않았나 봐

내가 봐도 누군 국힙원탑에

누군 빌보드 진출을 꿈꿨지만

나는 여전히 빛나는 조연이라도 되는 걸 원해

 

~

 

누구는 꾸준히 해도 묻혀지고

누구는 꿈 깨듯 현실에 부딪혀 부서져

누구는 만들어 영화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결과물의 주인공들은

왠지 나를 보는 것만 같아

별 볼 일 없어도 각자의 삶이 있듯이 말이야

 

난 너를 알아

너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잖아

가끔 세상은 널 외면하는 것만 같아

너도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는데 말이야

그게 너무 화나 ‘왜 넌 나한테만 그래?’

세상은 대답해 주지를 않아 질문에

‘씨잼하고 비와이가 쟤 친구래’ 라고

말하는 목소리엔 동정이 몇 그램

섞여 있는 것만 같아서 난 망설여

나를 소개하는 거조차

 

그렇다면 나를 소개하는 첫마디에

크루 이름을 빼보는 건 어떨까 싶다가도

근데 그럼 아무도 날 몰라

그래, 언젠가는 나도 서고 싶어 혼자

 

~

 

손에 잡히지 않을 걸 쫓을 시간에

다른 걸 했다면 난 주인공이었을까?

 

그래, 그냥 내가 내 영활 찍기로 해

내 일그러진 과거들을 여기 기록해

나랑 같은 누군가가 언젠가는 나를 찾고

내가 봤던 영화처럼 내게 뭔갈 느낀다면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완성

이게 돈이 될 거라 생각 안 했지 한 번도

죽기 전엔 남겨야지 좋은 영화 한 편은 지켜봐

내가 주인공이 되는 장면을

 

- "주인공"에서 최엘비

 


 최엘비는 여태 직접적으로 비추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을 보여준다. 자신도 '주인공'이 하고 싶다고. 하지만 세상이라는 감독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보지 않는다. 여기에서 최엘비는 자신의 관점을 전환한다. 세상이 만드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할 바에, 또 별 볼 일 없는 조연에 만족할 바에, 자신의 영화, 독립영화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5번 트랙인 "독립음악"이 본작의 하이라이트일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본작에서 가장 중요한 트랙을 뽑으라고 한다면 "주인공"을 뽑을 것이다. 최엘비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나아가는 방식이 달라지는 시발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트랙이 참 인상 깊었다. 가사에서는 처음부터 바로 '나는 너를 알아, 너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잖아'라고 시작하지만, 그만큼 솔직해지고 또 그 마음을 직접 입 밖으로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성찰을 했을지를 헤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본작의 하이라이트인 5번 트랙 "독립음악"이다. 이 트랙에서 최엘비는 "주인공"에서 바뀐 관점과 태도를 한 층 강화하며 지금까지 고조된 감정을 쏟아낸다. 


 

내 음악은 독립해

그 밑엔 엄마 아빠 돈이 쌓여있어

난 그 위에서 고립돼

이 탑을 내려가는 법을 찾고 있어

 

그냥 뛰어내려 버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단 걸 알고 있어

엄마 아빤 맨 밑에서 버티기에

빨리 다 내려놓고 쉬게 하고 싶어

 

~

 

내 음악은 독립해

그 밑엔 과거들의 재가 쌓여있어

무너지지 않게 조심해

내 기억들의 잔해들을 찾고 있어

쓸만한 걸 찾아 조립해

날 닮은 음악을 만들어 가고있어

만약 내가 내일 죽어버린대도

내 음악은 내 유언처럼 남아있을걸

 

근데 하지만

엄마는 슬퍼하겠지

내가 못 갚은 빚 때문이 아니라

날 사랑해서겠지

 

난 일어서야 해

난 일어서야 해

살아가야 해 

 

- "독립음악"에서 최엘비


나는 이 트랙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정을 잊지 못한다. 솔직한 가사와 울분을 토하는 듯한 랩핑을 곁들여 모든 걸 인정하면서 다시 한 번 일어서려는 최엘비의 모습에 정말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마지막의 '만약 내가 내일 죽어버린대도 내 음악은 내 유언처럼 남아있을걸 / 근데 하지만 엄마는 슬퍼하겠지 / 내가 못 갚은 빚 때문이 아니라 날 사랑해서겠지'에서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내가 겪는 열등감, 죄책감, 불안함으로 어느 순간 부모님이 베푸신 것을 '부모님의 사랑'으로 보지 못하고 '갚아야 할 무언가'로 보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게 이 곡은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금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정말 고마운 곡이다.

 

 다음은 "독립음악"의 마지막 가사인 '살아가야 해'를 되뇌며 시작하는 6번 트랙 "살아가야해"이다. 


 

내 친구 너랑 같이 봤던 한강이 떠올라

수면 위로 빌딩 불빛이 반사돼 데칼코마니처럼

우린 한동안 말없이 그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었지

 

넌 내게 물어 저걸 보면 뭐가 떠오르는지를 말이야

난 대답해 저 빌딩에서 살려면

얼마나 부자가 돼야 할까

너무 속물인가 하하 난 작아지고 있었지

 

넌 대답했지

‘난 때론 저것들이 무서워 밤 늦게 도록

잠에 들지 못하는

괴로운 사람들이 나열된 미술관 같아서’

 

‘저 직사각형 안에는 각자의 고민들로 꽉 채운

불빛들이 새어 나와

외로움이 서울의 밤을 장식하고 있어’

 

우리는 살아가야 해

 

- "살아가야해"에서 최엘비

 


최엘비는 과거에 친구와 한강을 바라보며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내 친구 너를 봤던 장례식장이 떠올라

너랑 어울리지도 않는 꽃들이 데칼코마니처럼

너의 이름 앞에 붙어있는 ‘故’가

내 앞에 현실을 깨닫게 해줬지 그 무엇보다

 

너 사진이 묻는듯해 뭐가 떠오르는지를

널 담은 액자와 비슷한 모양의 불빛들을

보면서 우린 살아가야 해라고 말했던

네 목소리가 선명해지면서 눈앞이 탁해져

 

사는 게 뭔지 누구에겐 예뻤을 장면이

누구에겐 저건 얼마고 누군 저게 무서우니

밤새 뒤척이다가 잠들지 못하고 불을 켰지

나도 야경의 일부가 된 거야

 

내 고민도 멀리서 보면

그저 작은 불빛으로 보이겠지

창문 속 아무도 몰랐던 너의 아픔을

이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어

 

- "살아가야해"에서 최엘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눴던 친구가 죽고 친구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때 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린다. 그 친구가 야경을 무서워했던 이유가 그 친구가 자신을 그 야경의 일부로 보고 있었기 때문을 깨달음과 동시에 최엘비 자신도 역시 그 야경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나오는 후렴.


 

난 살아가야 해

세상이 나를 때리는 것보단

죽는 게 훨씬 아플 테니까

그 누구보다 널

사랑했어 너한테 받은 사랑은

언젠가 다 갚을 테니까

거기선 아프지 않게

살면 돼 비록 네가 없는 세상은

날 아프게 만들었지만

난 살아가야 해

살아가야 해

 

- "살아가야해"에서 최엘비

 


난 마지막 '살아가야 해'라는 가사가 여러 가지 의미로 들린다. 앞서 죽은 친구가 '우리는 살아가야 해'라고 말한 것을 살아있는 최엘비가 다시금 마음에 새기는 걸로 들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을 직접 느낀 최엘비가 그 아픔을 자신이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않게 하려고 다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자신의 음악을 하겠다고 다짐한 "독립음악" 뒤에 '살아감'을 생각하게 만드는 "살아가야해"를 배치한 게 참 좋았다. '삶'의 다른 모든 것들은 삶으로써 가치가 생기듯이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려는 것도 결국 살아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살아가야해"가 "독립음악"을 바로 뒤에서 단단히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한 본작의 2부이다. 과거와는 다르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나아가려는 최엘비의 모습을 정말 잘 담아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7번 트랙이자 인스트루멘털 트랙(보컬이 존재하지 않는 트랙)인 "WYBH save my life but..."에서 잠시 쉬고 마지막 3부로 넘어간다. 

 

 8번 트랙 "최엘비 유니버스"는 현재의 최엘비가 과거의 최엘비 두 명을 만나는 이야기로 나는 살짝 뭉클하기도 했다.


 

안녕 20대 초반의 최엘비

아니, 이렇게 부르는 게 맞겠다 LAZYBONES

넌 열등감의 우주를 헤매고 있을 거고

그 과정은 너한테 있어 PAGE ONE

 

~

 

우리 영화는 멋있지 않아

누가 이걸 봐 열심히 살아

근데 할 말이 하나 있어

좀만 더 버티다 보면 아마

 

들어가 기리보이 형의 크루

그게 네 인생의 페이지 투

걘 뭐 하고 있을까 궁금해

같이 만나러 가보자 우주비행

 

안녕 20대 초반의 최엘비

너도 왔구나 지금의 최엘비

난 싸우는 중이야 더 이상 랩이

재미가 없어지려 하거든 

 

~

 

내 친구들이 찍는 영화의 규모는

블록버스터지만 내 거는 다큐고

이것마저 기리형 이름을 빼면

아무도 안 봐줄 거 같아

열등감이 날 때리는 건 아파

빌런한테 지고 있는 영상만 찍는데

이걸 누가 좋아할까

 

얘들아 걱정 마 너희가 남긴 영상으로

만들고 있어 내 독립영화를

너희도 찍고 싶었지 블록버스터나 누아르

간지가 나는 하지만

내가 이 나이를 먹고 나서야

깨달은 거 하나

꼭 대단하고 멋진 사람의 인생이

나오는 건 아니야 영화로

 

~

 

그렇게 현재

이 가사를 적네

너희가 아니었다면

지금 내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 너희가 끝까지 버텨서

난 지금 여기에 서 있네

 

- "최엘비 유니버스"에서 최엘비

 


최엘비는 우주비행(최엘비가 속한 또 다른 크루로 가사에도 언급되듯이 기리보이가 있으며, 7번 트랙 "WYBH save my life but..."의 WYBH이 우주비행(Would You 비행)의 이니셜이다.)에 들어가기 이전의 최엘비와 들어가고 나서의 최엘비를 만나 힘든 시기에 버텨주어서 고맙다고 말한다. 지금의 자신이 있는 건 과거의 너희들이 있어서라고 말한다.

 

 나는 어른들께 '지금 하는 일이 힘들어도 언젠가 다 써먹을 날이 온다.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열심히 살아라.'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 트랙의 최엘비가 그 말이 사실이란 걸 잘 보여준다. 힘들었지만 버텨낸 그때의 인생이, 결국에는 지금 이렇게 멋진 앨범을 만드는 데에 있어 자양분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도 언젠가 최엘비처럼 과거를 되돌아봤을 때 그때의 내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 

 

 9번 트랙 "슈프림"은 과거 씨잼, 코드 쿤스트와 했던 대화로 시작한다.


 

기억나네 씨잼이랑 살 때

코쿤형이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서로 가지고 있는 목표에 관해

한 명씩 얘기했고 돌아왔어 나의 차례

 

고민 없이 사고 싶어 슈프림 옷

그거 하나 사면 내 한 달은 죽음이었거든

 

~

 

네모난 shape 안에 슈프림이라는 글자

이거 하나 붙는다고 무지 티가 금값처럼

올라가 원래 돈을 번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내 의식은 대체 어디까지 흐를까

 

~

 

난 두려웠지 목표를 크게 가지는 거조차

같이 살던 씨잼 뒤 꽁무닐 계속 쫓아

아까 얘기했던 슈프림과 대입해 볼까

 

난 씨잼 비와이 친구 빼면 무지 티에 불과했지

그게 내 독립이 늦춰졌던 이유

주목을 받기 위해 내가 붙였었던 이름

섹시스트릿 우주비행 안 입었지 최엘비는

성공한 내 주변 친구들의 옷을 껴입은 기분

 

이걸 다 벗어던지기는 그렇게 쉽지 않더라고

하지만 이대로 내 가치를 벗은 채로 살 거라면

난 평생 누군가의 밑에

수많은 수식어를 떼고 최엘비로 독립해 

 

- "슈프림"에서 최엘비

 


나는 이런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일상 속의 작은 것들로부터 의식이 확장되어 내 삶에까지 적용하는 이야기. 이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는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국 깨달음을 얻어 그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난다면 나는 언제나 그 사람에게 응원을 보낼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자신의 슈프림인 '섹시스트릿'과 '우주비행'을 떼고 끝내 독립하는 최엘비의 모습에 나는 역시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슈프림"에서 마침내 독립을 이루어낸 최엘비는 10번 트랙 "잘먹어/걱정마"에서 바로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혼자 살지만 혼자 사는 거 같지 않은

독립이란 단어가 약간은 애매한 듯

하지만 날 일으킨 건 가족과 주변 사람들

이라는 사실이 내게 주는 아이러니함은

 

세상을 좀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어

그때마다 내가 쥔 대본을 다음 장으로

넘길 때마다 대사가 점점 늘어나는 건

내 기분 탓이 아니지 조연에서 감독으로

 

물론 두려웠지 이걸 누가 볼까

성공한 래퍼들의 돈 자랑이 쏟아져

나올 때 난 옷 브랜드 이름을 가사로 채우기는

싫어 너무 비싸서 사지도 못했지만

 

내걸 좋아하는 사람도 생겨 이젠

의식주 중에서 식은 해결한 듯 뷔페가

돼버린 배달 앱 가끔 피규어의 시세에

따라 메뉴가 바뀌지만 어쨌든 EAT WELL!

 

- "잘먹어/걱정마"에서 최엘비

 


정신적 독립을 이루어낸 최엘비이지만 여전히 미래를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이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도 보여준다. 여태까지 앨범을 들은 사람이라면 최엘비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 친구 널 기억해

넌 진 게 아냐 절대로

우리들을 무섭게 쫓아오던 현실과

이제는 나란히 걷기에

난 이제 도망가볼게

네 짐은 내가 맡을게

그래서 어디 가는 데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대답은 못 해

 

도망가

 

~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는

낙원은 없는 거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사실은 이 길에 도착이란 건 없어

우리는 끝없는 과정에 놓여 있어

이 정도 하면 뭔가 보일 줄 알았는데,

또 현실이 닥쳐온다

뒤는 내가 맡을게 일단 가

엘비야 돌아보지 말고 하나 둘 셋 하면

 

도망가

 

- "도망가!"에서 최엘비와 브로콜리 너마저

 


 본작의 마지막 트랙이자 유일한 피쳐링 곡인 "도망가!"이다. 피쳐링으로 "아는 사람 얘기"에서 언급되었던 최엘비가 좋아하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가 참여한 것이 흥미롭다. 이제 남들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들로 채워나가는 그의 음악에 '브로콜리 너마저'는 아주 제격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현실과 가까워지는 순간에 최엘비는 도망을 치기로 한다. 그의 도망은 자신이 세운 이상을 향한 질주다. 그 이상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최엘비는 이제 더 이상 어느 것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은 진정한 독립을 이루어낸다. 

 

 이렇게 《독립음악》 감상문을 써보았다. 사실 본작은 내게 특히 의미가 깊은 앨범이다. 힙합이라는 장르를 진지하게 듣도록 만든 앨범이기도 하고, 처음으로 앨범 단위로 들은 앨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지금 내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에 있어 큰 뿌리 역할도 하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 힘이 들면 가끔 다시 찾아와서 최엘비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낸다. 이 앨범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은 만큼 앞으로도 최엘비의 앞날이 밝았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화에서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바라며, 이만 《독립음악》 감상문을 줄이겠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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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공지] 회원 징계 (2025.06.21) & 이용규칙 (수정)3 title: [회원구입불가]힙합엘이 2025.06.20
인디펜던트 뮤지션 프로모션 패키지 5.0 안내1 title: [회원구입불가]힙합엘이 2023.01.20
화제의 글 일반 엘이맥아 잘 지내냐1 멋없으면죽어야만해 18시간 전
화제의 글 리뷰 공기보다도 가볍고 후련하게, 염따 <살아숨셔 4> 리뷰7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 23시간 전
화제의 글 그림/아트웍 염따햄 숨샤 피규어 만들고 있습니다2 Djdejddl 10시간 전
291903 음악 Slay! MV yeocloud 2025.07.19
291902 음악 그래도 한국 정도면 아시아 권에서는 꽤 씬이 크다고 생각합니다.4 title: 박재범Alonso2000 2025.07.19
291901 일반 17-18 스윙스 진짜 간지나네요1 title: VULTURES 1LESLES 2025.07.19
291900 음악 궁금한게 있는데 던밀스 신보 진지하게 좋다고 하는거 밈인가요?24 grsh 2025.07.19
291899 일반 본토 애들이 국힙 안듣는다 이건 별 의미없음 ㅇㅇ19 그래침착 2025.07.19
291898 일반 국힙에서 누가 제일 옷 잘입는다 생각하시나요?14 2025.07.19
291897 음악 창모 anthem 샘플링한 곡 있지 않나요 차배 2025.07.19
291896 음악 샤보토 molly 진짜 이상하네1 추첨 2025.07.19
리뷰 별이 되지 못한 이의 더없이 아름다운 작열 | 《독립음악》 감상문5 이명준 2025.07.19
291894 일반 힙o) 오싹오싹 고교괴담10 title: Jane Remover너도밤나무 2025.07.19
291893 일반 요즘 붐뱁 신인 누구 있나요3 쥬드벨링엄 2025.07.19
291892 일반 소신발언) 2426 명반은 절대아님11 title: 2Pac왕의존재 2025.07.19
291891 음악 국힙이 충분히 매력있는이유5 title: NWTSBigsflw 2025.07.19
291890 일반 선우정아가 말하는 저스디스 이름 생전 첨들어봤는데 피처링 해준 이유 ㅋㅋ2 E센스 2025.07.19
291889 일반 형님 누님들 펜타포트 관련 질문 드려봅니다4 title: 팔로알토ITYWTD 2025.07.19
291888 음악 퓨쳐리스틱 스웨버 새 앨범 나왔어요3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 2025.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