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 힙플
1. 지난주부터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던 이 글을 이제서야 쓰는 것은, 힙합 음악에 대한 이론적 정립의 필요성과 이미 다 알 법한 사실을 제가 직접 다시 쓰는 귀찮음 사이에서 망설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 알 법한 사실'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여러분들은 이미 다 아시는 사실들이란 얘기입니다. 지금부터 쓰는 이야기는 피타입과 VJ가 약 10년전에 이미 끝낸 논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프로로서 활동하고 있는 대다수의 래퍼들은 이미 이 내용을 숙지하고 내재화한 내용들입니다. 다만 아직도 모르는 소수의 분들과, 후에 혹여라도 힙합 음악을 '글' 이해할 필요가 계신 분들을 위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랩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다중적인 리듬의 형성입니다. 이는 세가지 층위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는 곧
1) 비트의 리듬. 곧 4박자 리듬
2) 라임의 배치를 통한 리듬
3) 라임과 라임 사이의 리듬
그러므로 랩의 미학이란 이 각각의 리듬이 서로 '같고' 또 '다른' 것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같다'는 것은 조화를 의미하고 '다르다'는 것은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서대로 상술하도록 하죠.
2. 첫번째는 비트의 리듬입니다. 힙합 비트는 아시다시피 대부분 4박자 비트입니다. 그리고 현대음악의 트렌드가 그러하듯 2박과 4박에 강세를 두죠. 약 강 약 강의 흐름이 한 마디를 이루게 됩니다. 서양고전음악에서 말하는 강 약 중간 약과는 강세가 다릅니다. 이는 서양고전음악의 4박자 리듬은 심장소리와의 동화를 통한 '안정감'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현대음악에서의 4박자는 투포리듬을 통한 불안정함을 의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힙합 비트만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동시대 음악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이상으로는 딱히 상술한 부분이 없습니다.
3. 두번째는 라임의 배치를 통한 리듬의 형성입니다. 라임을 넣을 위치는 피타입이 전에 말한대로 '스네어 사운드와(2박 또는 4박) 일치시킨다' 가 정석입니다. 그 이유는 비트에 깔린 4박자 리듬과 '같음'을 위함입니다. 라임이 2박 또는 4박에 오게 되면 MC가 형성하는 육성의 리듬과 드럼의 리듬이 일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루브가 형성이 되지요.
MC가 랩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비트와의 '다름'이 형성이 됩니다. 또한 빠르게 흘러가는 비트와 랩의 템포에서 MC가 자기가 하고싶은 말을 내뱉으면서 비트의 강세 또한 제대로 맞추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MC는 흘러가는 비트 속에서 어떻게든 라임을 형성하면서 MC가 형성하는 리듬의 마디 하나를 끝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MC의 리듬이 끝나는 위치와, 비트의 4박자 리듬이 동시에 끝날때, 즉, 라임이 정확히 스네어 위치에 박혀 들어갈 때, 청자는 일종의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힙합의 가장 기초적인 그루브입니다.
그러나 라임이 언제나 2박과 4박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어느 2박과 4박에 오느냐에 따라서 리듬의 형성이 달라지게 됩니다. 라임이 스네어에 와야한다고 주장했던 피타입의 트랙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다음은 피타입 1집 수록곡 '힙합다운 힙합'의 도입부 가사입니다.
unorthodox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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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힙합다운힙합
난 의문이다.
가죽의 줄무늬가 같아질 수는 없음을, 한 숨을 쉴 뿐이다.
너의 그 게으른 입술이 거짓을 이제껏 묵인했으니
그 눈엔 이슬이 맺혀있으리.
이를 4박자 리듬에 맞추어서 재구성하면
난
의/ (문이다.) / 가죽의 줄/ (무늬가)
같아질 수는/ 없음을,/ 한 숨을 쉴/ (뿐이다.)/
너의 그 게으른/ (입술이) /거짓을 이제 /껏 묵인/
(했으니) /그 눈엔 이/슬이 맺혀/ (있으리.)
와 같은 형태가 됩니다.
(라임에 괄호를 쳤다고 알러지 반응을 보이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갯수를 세자는게 아니어요)
첫번째 두 마디와 두번째 두 마디는 전혀 다른 리듬구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트박스 기호로 표현하자면 KSKSKHHS 와 KSKHSKHS 같은 차이 입니다. 사실 이렇게 기호화하거나 괄호를 치고 슬래쉬를 긋는 유치한 짓을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또한 그 다음에 나오는
난 언젠가부터 끊어진 노래를 (불렀지.)
쓰러진 대중은 모두 고개를 (들었지.)
의 라임배치와도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형성하는 리듬과도 다릅니다.
똑같이 4박자 리듬 위에 라임을 배치하더라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MC가 형성하는 그 리듬의 형태는 아주 달라지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MC는 a)비트와의 다름과 b) MC가 기존에 형성한 리듬과도 다름을 구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마지막에는 4번째 박자(스네어)와 라임의 위치가 일치하게 되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같음'을 다시 한번 형성하게 됩니다. 긴장감의 형성과 긴장감의 해소입니다.
현재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MC들은 라임 위치의 변환을 통해 형성할 수 있는 긴장감과 그 해소에 대해서 대부분 잘 알고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인상깊게 들었던 랩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2012 cypher의 개코 verse입니다.
ㅊ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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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가요대전 2부 오프닝 The Cypher 2012
난 g /a / ek / (o)
믿음직한/ (오) /승환 /(글러브)
솜방망이/농락/하는 나의 묵
/직한 /(돌) /직구 /(flow)
음악이란/ 놀이에 /미친 /(놈이야)
난 거부/할게/ 자기복제 /(포비아)
시대의 /흐름을 /흡수하는 /솜이지만
꽉쥐면 /흐르는건 /노력의 /(땀이야)
빼빼마른 /몸매/에서 /깊게 /
뻗어/나오는 /(강/ 단)
행동발달 /상황은 /근면/성실
성적표는/ 매번 /차트에서 /(상단)
각각 형성하는 리듬이 다르다는건 들으시면 아실 겁니다.
특히나 세번째 문단의 (강 단) 같은 경우는 사실상 라임이 7번째 박자에 옵니다.
하지만 그 뒤의 라임인 (상단)의 경우 라임이 다시 8번째 박자에 오죠.
그것을 통해서 개코는 자칫 지루해질수 있는 라임 배치에 세련된 포인트 하나를 줍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개코가 무언가 대단하거나 시대를 초월한 개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리듬의 시야가 넓고 변용을 잘 넣는 MC들은 수도없이 많습니다. 이제는 상당히 보편적인 개념인 것이죠.
이것이 바로 '작사'를 통해서 구현 가능한 리듬의 형성입니다. 랩 작사는 결코 리듬형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4. 세번째는 라임과 라임 사이에서의 리듬의 형성입니다. 네 바로 'flow'입니다. 같은 가사로 랩을 해도 MC마다 만드는 결과물이 다릅니다. 심지어 겨우 한도막을 읽어도 다르죠. 그것이 바로 flow의 차이입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고, 굳이 설명을 하자면 또 상당히 어려워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충 예시 하나만 들고 넘어가겠습니다.
다이나믹 듀오 5집의 '월광증'의 각 verse가 끝날때마다 '두고봐라 몸치처럼 절던 니 리듬이 다시 박잘 탈꺼니까'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한줄짜리 가사이지만, 그 트랙에 참여한 개코, 최자, flow가 어떻게 다른지 아주 확연하게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동영상을 재생할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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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UMC나 Mad Clown이 하는 것은 랩이 아니다. 라임이 없고 리듬감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것에 대한 반론을 여기에서 하는 것도 괜찮다고 해서 별첨합니다.
UMC의 경우 2번째 리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임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UMC의 랩은 2000년대 초반의 여타의 랩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똑같이 라임 없는 랩이지만 어떻게 그 둘이 형성하는 리듬이 다른지 보여드리고 싶네요. 먼저 2000 대한민국 수록곡입니다.
MBCk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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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ublic of Korea - Beautiful 21C, 2000 대한민국 - 아름다운 21C, Music Camp 20000122
'아름다운 21c' 라는 곡입니다. 이게 13년 전의 랩의 수준입니다. 이걸 듣고 이제 UMC의 XS denied를 들어보시...면 좋겠는데, XS denied는 19금 트랙이라서 링크가 없더군요. XS denied를 들어보시거나,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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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이걸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유엠씨는 비록 라임은 없지만, 자기 나름대로 라임 없이 3번과 1번의 조화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이는 UMC의 랩이 어떻게 하면 라임 없이 좋은 리듬감을 형성할 수 있을까에 대해 치밀하게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UMC의 1집(2005년 발매)은 라임 없는 랩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말인 즉슨, 라임을 사용하지 않고는 그정도가 한계일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음수율이나 음보율 등 한국시의 전통적 방법을 통한 리듬감의 구현은 2004년도 이전에는 유효한 방법론이었지만, P-type이나 VJ, 그리고 MC meta를 필두로 한 Soul Company가 2004년에 한국어 라임이론을 완성한 뒤로는 그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라임이 없이 만들어낸 리듬보다도, 라임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리듬이 아주 명백하게 리듬감이 더 살기 때문입니다. 2004년(혹은 2005년. 2005년에 발매된 그 작업물들은 대부분 2005년 전에 작업한 것이기에) 이전의 UMC는 인정할 수 있지만, 1집 이후의 UMC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Mad Clown이 하는 것이 랩이 아니라는 비판 역시 Mad Clown이 겸허히 받아드려야 할 지적중 하나입니다. 아니, 받아드려야 '했던' 지적입니다.
그동안 Mad Clown의 랩은 인상적인 특색은 가지고는 있지만, 너무 화려하고 스킬풀한 랩을 보여주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라임의 위치가 제각각이었던 점이 있었습니다. 라임이 스네어에 안박히거나 빼먹고 가는 것이 독특한 리듬의 형성이 아니라, 리듬을 아예 형성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다름'에 치중하다가 '같음'을 잃어버린 경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들은 Anything Goes 1집의 작업물들에서 대체로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플로우를 구사하는 배치기의 taktak36 같은 경우 이 비판을 여전히 피할 수가 없습니다. 탁 같은 경우 역시 가사에서 라임을 빼먹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두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형성하는 리듬의 시야가 넓거나, 라임의 중요성을 잘 모르거나 입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가 이센스입니다. 이센스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라임을 쓰는 경우도 많지만, 아예 라임을 정해진 위치에 안박고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센스의 랩이 대단한 것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라임을 제 위치에 박지 않고도 리듬을 계속 이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청자들은 이센스가 길게 이끌어나가는 리듬에 동화되고, 이센스는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라임을 박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다음 마디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리듬은 끊기지 않기에 청자들은 이센스의 랩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긴장감이 극적이기 보다는 되려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해소되는 경우입니다. 그게 이센스가 잘한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하였듯 배치기의 taktak36는 이 비판을 피할수가 없습니다. 탁의 플로우는 리듬을 깹니다. 라임이 없으면 그 부분을 잘 처리해서 청자들을 자신의 리듬으로 끌고와야하는데 그걸 못하고 아예 긴장감을 깨어버린다는 겁니다. 거기에 청자들은 배치기의 랩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나올듯 공포를 조성하다가 영화를 아예 꺼버리는 느낌입니다. 발로 공을 통통 튀기다가 공을 놓쳐버린 격입니다. 능력 이상으로 기교를 부리다가 떨어진 줄타기꾼의 모습입니다. 배치기의 랩이 구리다고 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 '무엇이 잘하는 랩'인가 는 논란이 많은 주제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잘 표현하는 랩이 잘하는 랩이다' 같은 말을 할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이야기죠. 거기에서는 '무엇이 잘 표현하는 랩인가' 라는 질문이 파생되기도 하죠.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게도 각자의 '주관'이 필요한 부분들이기 때문에 논쟁이 생길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 글에 쓴 내용들은 사실 앞서 말하였듯 10년전에 VJ와 P-type이 끝낸 논쟁이고, 몇년 전에는 이ㅇㅇ님이나 다른 힙합플레이야의 현명하고 박식하신 분들이 쓰셨던 내용들입니다. 다만 그 내용을 제 언어와 제 표현, 그리고 조금 더 형태있는 모양으로 다시 쓴 것들 뿐입니다. 피드백은 모두 환영합니다. 다만 1) 글을 읽고 2)매너를 갖추어주세요. 매너는 단순히 존댓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존중을 의미합니다.
간만에 글 쓰니깐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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