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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하이 정규 8집-신발장

title: Kanye West (Vultures)Alonso20002024.07.09 17:27조회 수 1564추천수 9댓글 8

https://blog.naver.com/alonso2000/223504736651

 

 

 

 

한 사람의 환난은 잉크가 물속에 번지듯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되곤 한다. 타블로가 2010년대 초에 겪었던 끔찍한 일은 결국 에픽하이의 활동에까지도 제동을 걸었다. YG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숨이 트였음에도 이들의 상처는 쉽사리 낫지 않았고, 이는 자연스레 이들의 음악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다만, 그 투영이 매번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상처와 이에 대한 초극 그 자체를 다룬 <열꽃>은 지금까지도 한국 힙합을 대표하는 역작으로 남아있지만, YG 인하우스 프로듀서의 높은 텐션과 대중성을 활용해 슬픔을 억지로 걷어내고자 했던 <99>는 이들의 애매한 외도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시간이 약이라는 말대로, 조금 더 시일이 지나고 이들의 자신들의 반창을 제대로 마주 보고 난 이후에야 에픽하이는 비로소 자신들 커리어에서 제일 장르적인 깊이로 충만한 결과물을 빚어내게 되었다.

YG는 에픽하이에게 외부 작업실 사용을 강제했을 정도로 이들의 음악적 독자성을 최대한 보장해 주려 했고, 자연스레 투컷과 타블로의 프로듀싱 비중이 이전의 자리를 되찾았다. 이렇게 에픽하이가 자신들만의 음악적 주도권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타블로는 투컷과 '음악 듣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듣고 싶은 게 뭘까' 하며 좋아하는 노래들, 살면서 만들고 싶은 음악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토의하였고, 이들은 이내 '일렉트로니카적인 건 다 쓰지 말자. 대중성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미친 듯이 하자'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실제로 기존에 에픽하이에서 힙합적인 방향을 책임졌던 투컷은 붐뱁("RICH", "BORN HATER")부터 칩멍크 소울("막을 올리며")을 오가며 고전 지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가 하면, 팝 알앤비에 가까운 태양의 원곡을 조금 더 음울한 프로그레시브 알앤비로 탈바꿈해버리기도 하며("EYES NOES LIPS") 블랙 뮤직의 기조를 따라 과거와 현대를 성공적으로 넘나들었다. 이에 따라 에픽하이의 탈 장르적인 실험과 대중성을 담당했던 타블로 역시 재즈 샘플 기반의 무게감 있는 넘버부터("AMOR FATI") 트랩의 리듬이 반영된 경쾌한 트랙("부르즈 할리파")까지 성공적으로 주조해 내며 힙합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물론 초이스37, PK 등의 YG 인하우스 프로듀서나 피제이 등 외부 프로듀서의 조력이 없지는 않으나. 이들이 지닌 팝적인 방향, 혹은 샘플링 기반의 전통적 작법 역시 <신발장>을 지배하는 따스하고 여유로운 무드에 위화감 없이 스며든다. 그만큼 에픽하이의 전체적인 지휘는 안정적이었다.

 

 

 

 

투컷은 <신발장>이 에픽하이의 시즌 2의 시작이라 자평한 바 있다. 사실상의 새로운 챕터의 시작점에 위치한 작품인 만큼, 앨범의 게스트들도 맵더소울 시절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MYK부터 한솥밥을 먹게 되며 이미 타블로와 여러 번 협업한 바 있는 태양까지 에픽하이의 과거와 현재를 두루 아우른다. 특히, 기존에 에픽하이의 빛나는 순간들을 같이했던 보컬들과 함께한 결과물이 이전의 작품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예를 들면, "또 싸워"의 윤하는 "우산"에서의 이별담을, "AMOR FATI"에서의 김종완은 "Rain Bow"에서의 금지된 사랑, 인정받지 못한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접근이 전자 음악적 요소까지 포용한 실험 정신의 발로라는 느낌이 강하다면, 현대의 접근은 보다 장르적인 플랫폼 위에서의 조밀함에 토대를 두었다는 인상이 짙다. 새로이 합류한 보컬 진 중 특히나 눈에 띄는 롤러코스터의 조원선이 무심한 보컬로 "헤픈 엔딩"의 영화적 감정선을 채워내는 모습은 에픽하이의 빼어난 보컬 운용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거와 현대 간의 조화는 앨범의 래퍼 게스트들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개코, 얀키 등 무브먼트 시절의 옛 전우들을 불러와 신명나는 힙합 뱅어를 빚어내는가 하면, 과감히 당시 장르 씬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던 아이돌 래퍼들을 기꺼이 초빙하여 빈지노, 버벌진트와 같은 장르 씬의 베테랑들과 힙합적으로 미움과 공격성을 경쟁시키는 그림은 메인스트림에 위치해 있었으면서도 힙합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들이기에 가능했다. '힙합' 그룹으로서의 에픽하이가 지니는 정체성과 장점이 가장 응집력 있고 견고한 형태로 발산되는 것이다.

고난으로 지독하게 벼려졌던 만큼 에픽하이가 평소에 보여주었던 문학적인 필력 역시 이전보다 몇 갑절로 견고해졌다. 특히 그간 겪었던 고난에 대한 이야기("막을 올리며"), 혹은 어느덧 되어버린 가장에 대한 책임감("신발장") 등의 개인적인 테마가 청자에게 있어 상당히 거대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부("RICH"), 개인적 지향과 종교적 신념의 충돌("AMOR FATI"), 인터넷과 SNS 상의 폭력과 극단주의, 선동("LESSON 5 (타임라인)") 등의 무거운 테마부터 심장 저릿한 연애담("헤픈 엔딩", "스포일러", "또 싸워", "EYES NOES LIPS"), '힙합'에 잘 어울리는 브라가도시오와 까칠함("부르즈 할리파", "BORN HATER")에 이르는 앨범의 언어들은 언제나처럼 타블로의 섬세한, 때로는 재치 넘치는 타블로의 능력으로 구축되었다. 물론, 팀의 퍼포먼스의 나머지 반이라 할 수 있는 미쓰라진의 슬럼프로 인하여 앨범의 작사의 대부분을 타블로가 짊어진 부분이 '팀'으로서의 에픽하이를 기대하고 좋아하던 이들에게 있어서는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10년 넘게 함께한 이들의 팀워크 덕분인지, 아니면 한 작사가의 필력으로 끌고 가는 일관성 덕분인지 이들의 음악적 응집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AMOR FATI"에서의 종교에 대한 거대한 성찰부터 "부르즈 할리파"에서의 통쾌한 자신감, "헤픈 엔딩"의 쓸쓸한 이별 이야기, 이 모두의 정교함과 예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에픽하이의 제일 큰 자산 중 하나다.

서구권에서 누군가의 신발을 신는다는 말의 의미는 그 누군가의 입장에 서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앨범 소개 문구의 '새 신발의 설렘과 헌 신발의 반가움이 공존하는 12개의 신발 상자'라는 의미는 다시 말해 에픽하이가 12가지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 시선에는 고단했던 지난날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있고,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어가는 힙합 씬에 10년 넘게 버텨낸 데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며, 거대한 담론과 가슴 저미는 멜로가 있다. 우리는 에픽하이가 마련해 준 12켤레의 신발을 갈아 신어가며 이들의 관점을 따라간다. 그 관점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때로는 반박해가며 청자들은 각자의 생각을 그려내고, 이내 다시금 자신만의 신발을 신발장에서 꺼내든다. 신발장에 선 우리는 문을 열면 기다릴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와, 오랜 익숙함에 대한 편안함, 안온함을 아울러 느끼게 된다. 집에 머무를지, 아니면 새로운 길로 나아갈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설령 길을 걷다가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우리는 불안하지 않다. 우리가 시작했던 곳, 그래서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이 존재함을 알기에. 다시 돌아가서 새 신발을 고르고 신발끈을 조인 다음, 또다시 나아가면 되기에.

Best Track: 부르즈 할리파 (Feat. 얀키, 개코), AMOR FATI (Feat. 김종완 Of 넬), BORN HATER (Feat. 빈지노, 버벌진트, B.I, MINO, BOB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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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 title: Kanye West (Vultures)Alonso2000글쓴이
    1 7.9 17:28

    https://drive.google.com/file/d/13mIVqLBRmHdH3Jkf-JDcQTJXJ_57Bsnw/view

     

    본 리뷰는 HOM#14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1 7.9 17:49

    확실히 이 앨범 기점으로 에픽 앨범 곡들이 상당히 안정적인 감성 무드로 이어지기 시작했죠. 그때문에 자가복제 아니냐는 소리도 듣긴했지만..

  • 7.9 23:01

    김종완 Rainbow -> let it rain? 인가요?

  • title: Kanye West (Vultures)Alonso2000글쓴이
    7.9 23:08
    @ch64

    사실 IF 곡이기는 한데 프로듀싱 피처링 다 보더라인 곡이라......

  • 7.9 23:41
    @Alonso2000

    오호.....처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들어볼게요

  • 7.10 08:38

    개인적으로 들으면 들을수록 막을 올리며하고 신발장이 좋더군요 (딱 첫곡과 마지막곡이네요)

  • 7.10 15:44

    이야 이것도 10년전 앨범이네 ㄷㄷㄷㄷ

  • title: Kanye West (Vultures)Alonso2000글쓴이
    7.10 16:21
    @Dkkkfk

    시간이 참.....

     

    저 힙합 입문할 즈음에 본헤이터가 빡떠서 기억이 크게 남았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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