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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힙합을 사랑하는 이유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2024.04.21 12:00조회 수 4571추천수 36댓글 27

HOM 9호에 실린 글 다시 한 번 올려봅니당


https://drive.google.com/file/d/1aBoKbh2_uXAaNX9G544NrScTYiW1fty3/view?usp=drivesdk


IMG_9360.jpeg


“무슨 음악 좋아하세요?”

“아, 저는 힙합 좋아해요.”

“아…… 힙합 좋아하시는구나.”

“근데 힙합을 왜 좋아하세요?”

                                            -언젠가 했던 소개팅 대화 중에서


       ‘나 힙합 좋아해’라는 선언에는 해명이 필요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락이 좋다든지, 발라드가 좋다든지, k-pop이 좋다고 하면 서로 좋아하는 아티스트나 그룹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던 반면, 힙합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는 “왜?”라는 질문이 반드시 따라왔다. 이해는 된다. 일반 대중들에게 힙합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가사, 자기 과시적인 내용, 술이나 마약, 범죄 등의 반사회적 행동… 대중들이 힙합을 싫어하는 이유다. 그러니 이런 힙합을 좋아한다면 “왜?”라는 질문이 따라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힙합이 좋다. 그래서 이 지면을 빌려 당당히, 떳떳이,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 이유를 꺼내놓으려 한다.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힙합 곡들의 가사들이 그 아티스트가 처해 있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이런 현실성은 나에게 또 다른 체험을 제공하고, 마치 이야기를 듣거나 잘 만든 영화를 보는 듯한 감상을 준다. 예를 들어보자. 차붐은 내가 생각할 때 자신의 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래퍼다. ‘내가 좆만했을 때/ 꿈이라는 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해’ <Original>의 첫 트랙인 “안산 느와르”의 첫 라인이다. 뭐든 꿈꾸면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저 한 문장으로 담아낸 것이다. 이후 두 번째 벌스는 ‘내가 좆같았을 때’로 첫 라인을 이어받으며, 세 번째 벌스는 ‘내가 좆됐을 때’로 서사의 종지부를 찍는다. 점층적 표현으로 서사를 확장시키며 청자를 몰입시키는 구조도 감탄이 나오지만, 그 사이사이에 번뜩이는 표현들이 곡의 현실성을 증강시킨다. 차붐은 미도파, 마쎄 등 실제 브랜드의 명칭이나 아파트 옥상에 모여 본드를 부는 모습, 죽은 친구의 관을 운구하는 모습 등을 실생활에서 쓰는 표현으로 빚어내어 우리의 눈앞에 그 시절 안산이라는 동네를 100% 구현한다. 이런 구조적 장치와 현실적 표현으로 우리는 “안산 느와르”라는 곡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받아들이게 되고, 뒤에 이어질 이야기들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그 힘은 희열로 바뀌고, 그 희열은 이야기가 마무리 될 때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Original> 외에도 딥플로우의 <FOUNDER>, 레디의 <500000>, JJK의 <지옥의 아침은 천사가 깨운다> 등의 앨범들 또한 래퍼가 자신의 현실을 가감 없이, 그러나 멋지게 표현해낸 작품들이다.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솔직하기 때문이다. ‘힙합은 Real해야 한다’는 명제가 있다. 그만큼 래퍼들은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려 한다. 예를 들어 쿤디판다는 “네버코마니”에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열등감을 솔직하고 선명히 그려낸다. ‘동경과 선망의 대상/ 차마 넌 못해 언젠가 넘을 거란 생각을/ 그림자는 그늘이자 벗어내야 할 곳/ 넌 내게 그런 존재였어 언제나라도’ 곡의 맥락상 여기서 지칭하는 ‘너’는 당시 그룹 XXX로 씬의 주목을 독차지했던 김심야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김심야에 대한 경쟁 심리와 열등감 등을 소재로 당시 초라했던 스스로를 인정하고 벗어나기 위해 마음먹는 과정을 수려한 문장과 스토리텔링으로 뽑아낸 매우 인상적인 곡이다.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면 더콰이엇의 “BENTLEY 2”가 있다. 이 곡에는 그의 수많은 가사 중 명가사로 꼽히는 라인이 나오는데, ‘여태 내가 바꾼 이 게임은/ 내게 빚진 것을 갚지 못해 I'm still goin'’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자신의 위치와 위업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동시에 식지 않은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 이 가사는 더콰이엇이기에 뱉을 수 있는, 더콰이엇만이 뱉을 수 있는,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Real하고 솔직한 가사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예시는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이다. ‘나는 또 돈 벌러 가야대/ 마약을 하나 더 사야대/ 여자애들이 나 좋아해/ 근데 난 신경도 안 쓰네’ 당황스러운가? 당연하다. 이 가사는 사실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사실이었다면 언에듀케이티드 키드는 잡혀 들어간 지 오래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가사가 솔직한 가사라고 내놨을 텐데, 도대체 어떤 면에서 솔직하단 걸까? 나는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의 가사를 ‘세계관’으로 즐긴다. 마치 만화나 소설을 읽듯이 말이다. 그가 만든 세계에서 그는 마약을 팔고, 여자들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캐릭터인 것이다. 캐릭터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마약을 하나 더 사야대’라는 가사는 그야말로 솔직한 가사가 된다.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다니는 위험한 캐릭터가 자신의 범죄에 대해 말하는 것,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서 솔직한 것 아닐까? 앞서 제시한 모든 솔직함은 듣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마치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털어놓은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사족으로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의 출현 이전까지 씬에서는 진정한 Real함에 대한 논의가 꾸준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그가 나타난 이후로 Real함의 재정의가 이뤄진 듯하다. ‘그럴듯하면, 그런 거다’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장에 80%가량 동의하는 편이다.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 세 번째 이유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제, 소재를 가져올 수 있으며 다양한 장르와의 융합이 용이한 장르가 힙합이다. 그렇기에 힙합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힙합은 정말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부터 완전한 가상의 세계까지, 사실적인 내용부터 추상적인 내용까지 모두 담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그니토의 가사들은 그 특유의 비장한 추상성으로 유명한데, 마치 고대 신화에 나올 법한 표현들로 가득한 그의 가사는 듣다 보면 어느 종교의 창세기나 경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면 이센스가 사용하는 표현들은 생활 밀착형이다. 그 유명한 “비행”의 첫 라인 ‘야 내가 많이 변했냐’라든지, “MTLA”의 ‘거리낌 없이 쓰는 인생의 맛은/ 어떨지 생각해보네, Yeah 돈이란 거 참 편해/ 그런 인생의 고통이 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모자란 걸로 슬프진 않겠지’ 등의 가사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과 생각들이 그대로 담겨있다. 피타입의 <Hardboiled Café>처럼 앨범을 하나의 자전적인 책으로 설정한 앨범도 있으며, 오도마의 <선전기술>처럼 스트리밍용 앨범과 CD용 오프라인 앨범을 각각 만들어 현대 사회에서 ‘선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 앨범도 있다. 장르적인 측면에서도 락과 결합한 emo-힙합, 재즈와 결합한 재즈 힙합 등이 있으며, 샘플링 기반의 장르인 만큼 여타 장르의 좋은 요소들을 얼마든지 따올 수 있다. 따라서 조금의 노력을 기울여 디깅을 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소재를 사용하여 내가 좋아하는 주제를 노래하는 아티스트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지금도 힙합은 이런 다양성으로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으며, 매해 새로운 세부 장르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힙합이 질릴 새가 없다.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좋아할 힙합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것이 모두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 이유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또 각자의 이유로 힙합을 좋아할 것이고, 어쩌면 내가 나열한 이유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들은 내가 힙합을 사랑하는 동안 매일 같이 달고 다녀야 할 해명일지도 모른다. 힙합은 대중친화적이 될 수 없고, 대중들의 따가운 시선들 또한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고, 그렇기 때문에 해명이야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사랑할 나의 힙합,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리스펙을 보내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 이제 훈련소도 수료하고 후반기 교육 수료를 앞두고 있답니다

담달 발매될 매거진에도 참여했으니 많관부~~~~

그럼 다들 행복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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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7
  • 힘을내는게Best베스트
    3 4.21 13:41

    ‘나 힙합 좋아해’라는 선언에는 해명이 필요하다.

    이 말이 너무 공감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네요...

  • title: HeartbreakkegunBest베스트
    3 4.21 12:46

    언젠가부터 힙합은 우리나라에서 음악이 아니라 쓰레기로 취급받음....

    머니스웩이나 마약 이런걸로 일반화하는 게 너무 큰것같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4.21 12:02

    '근데 힙합을 왜 좋아하세요?'

     

    이거는 새삼 명문입니다 ㅋㅋㅋ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4:32
    @Alonso2000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4:32
    @도둑은오만하고낙천적이다
  • 3 4.21 12:46

    언젠가부터 힙합은 우리나라에서 음악이 아니라 쓰레기로 취급받음....

    머니스웩이나 마약 이런걸로 일반화하는 게 너무 큰것같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4:32
    @kegun
  • 2 4.21 12:57

    사실 머니스웩,마약 그런거를 예술적이게 본인언어로 다룬다면

    너무 재밌고 그렇더라고요.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4:32
    @김종호
  • 4.21 13:20

    이유 하나하나 다 너무 공감되는 내용들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4:33
    @Brolly
  • 3 4.21 13:41

    ‘나 힙합 좋아해’라는 선언에는 해명이 필요하다.

    이 말이 너무 공감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네요...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4:33
    @힘을내는게
  • 4.21 14:20

    저는 힙합 안듣는 여자는 곁에 두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4:34
    @K드릭라마

    그런 몹쓸 결단을…

  • 4.21 15:30

    문학적인 표현을 오글거리다로 퉁쳐버리던 것처럼 힙합의 자기과시도 자랑질 따위로 퉁쳐버리는게 너무 아쉽네요.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5:58
    @로어셰크
  • 4.21 17:09

    ‘나 힙합 좋아해’라는 선언에는 해명이 필요하다.

    서론이 좋다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7:51
    @Wassup
  • 4.21 17:28

    글 잘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7:51
    @BKNNETS
  • 4.21 17:35

    나에겐 솔직함이 가장 큰 매력이었음

  • title: Dropout Bear (2004)Writersglock글쓴이
    4.21 17:51
    @Asayake
  • 나 그녀랑 헤어졌어 그녀가 힙합이 아니어서

  • 4.22 11:11

  • 4.22 11:45

    이 글이 그냥 "힙합"

  • 4.22 13:39

    좋은글 개추

  • 4.24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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