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힙이든 국힙이든 힙합이 망했다는 소리는 계속 들린다. 이건 어느쪽이나 반쯤만 맞는 소리다. 힙합이 어디 뉴욕 하렘 게토에서 청소년 흑인들만 듣던 시절이나, 나우누리/하이텔에서 소수의 힙찔이(?)들만 듣던 시절에 비해, 이제 모두가 힙합을 듣는다. 그 때보다 당연히 힙합은 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힙합이 대중 음악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한국만 한정하자면, 다듀나 리쌍, 에픽하이처럼 노래를 내면 차트에 올라가고 스타가 되고 그럴 수 있었던 시절. 이 흐름을 타고 지디니 지코니 바비 같은 (말 그대로) 아이돌-래퍼가 탄생하기도 했다. 그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지금의 힙합은 망했다.
어쩌다가 국힙이 이리 되었을까?
(2)
더 콰이엇이 한 말로 기억하는데, "(쇼미 이후로) 이제 홍대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문제다. 국힙에는 "홍대"가 정말 존재할까?
미국에서 "홍대", 힙합 리스너들은 언제든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힙합은 (i) 흑인 빈민가에서 (ii) (명시적/묵시적) 차별로 아무것도 못하지만 자수성가는 하고 싶었던 청소년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했으니깐 말이다. 그들에게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는 것보다, 마약을 팔아서 돈을 벌고, 사업을 일구는 것이 '성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니 거기서 총을 쏘고, 마약을 팔고, 여자를 끼고 노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는 애들이 걷는 평범한 일상이니깐. 흑인 빈민가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미국의 홍대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한국에서는 이것이 평범한 일상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리스너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i) 거부감을 느낀다. (ii) 그냥 가사는 무시하고 즐긴다. 적어도 이 가사에 진심으로 이입해서, 가사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라 생각할 리스너는 굉장히 드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에듀가 게임 체인저다. 언에듀는 총질하고 마약하는 가사를 쓰지만, 그걸 '기믹'이라 말해 90프로의 순간은 웃기거나 별 의미 없게 듣게 만들다가도, 10프로의 순간에는 진실하게 만든다.)
(3)
한국에서 힙합 리스너는 애당초 힙스터로 시작했다. "요즘 미국에서는 이런 음악이 유행한다던데?"
그러다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힙합의 "반항/저항"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 그건 H.O.T.로 이어지고, 지드래곤이나 지코, 바비까지도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도대체 무엇에 반항하려는 것이지? 기성 세대? 이 사회? 근데 그게 실현 가능한 이야기인가? (아니 적어도 외힙에서는 마약 팔아서 사업가가 된다는 이야기가 어떻게든 가능할 확률이라도 있지만, 사회에 반항한다고? 어디 폭탄 테러라도 해서 국보법 위반으로 잡혀가거나 방구석에서 자살 생중계라도 하게?)
그러다보니 서태지 이후 차트에 올라가는 래퍼들, (10대에게나 집중적으로 먹힐 반항 테마를 유지할 수 있는 아이돌을 제외하면) 리쌍 - 다이나믹 듀오 - 에픽하이는 물론 MC 스나이퍼나 MC 몽, 마이티 마우스 등등등 모두는 일상적 이야기를 했다. 물론 힙합 같은 곤조 있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랑이라던가 사회적 서러움이라던가 뭐 다른 가요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가사의 주제가 되었고, 사운드는 대중들도 접근하기 좋게 말캉말캉 해졌다.
한국에서 힙합의 대중화는 결국 힙합의 "가요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외힙도 하는 것이다. 00년대 50센트나 칸예 웨스트나 누구나 결국 달달한 알앤비 훅에, 사랑 가사도 가끔 넣고 뭐 다 그렇게 앨범 냈다. 이게 잘못된 것도 아니다.)
(4)
이 흐름에서 힙합 고유의 멋을 가사에 담은 건, 하이라이트 - 일리네어 - 저스트 뮤직인 것 같다. 마약이니 뭐니 뭐 그런 이야기는 다 사라지고, '자수성가'라는 테마가 트랩과 함께 들어왔다. <코리안 드림>의 비프리도, <Always Awake>의 빈지노도, 도끼도, 스윙스도 모두 "가요화된" 랩이 아닌 트랩 위에서, 자수성가라는 주제로 빡센 랩을 했다.
그리고 이건 대중들에게 나름 먹혔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느정도 지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쇼미 1에서부터 쇼미 4 정도까지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세탁소 집 운영하던 아들 내미가 YG에 픽업 되어 아이돌 하러와서, 기존 래퍼들을 다 부수고 연결고리를 부르던 쇼미 3는 자수성가 - 트랩이 대중들에게 먹히며, "가요화되지 않은" 힙합이 한국 땅에서도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신호탄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이후 쇼미는 급격히 가요화된다.
그토록 많은 싱잉랩들이 증명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구 자수성가를 말하던 래퍼들이 누구도 자수성가 하지 못했다는 게 주된 이유라 생각된다. 도끼는 결국 탈세 문제가 있었고, 하이라이트/일리네어/비스메이저는 CJ 같은 대기업과 쇼미와 함께 하는 길을 선택했고, 돈이 안 되자 결국 공중 분해되었다.
빈지노와 이센스 같은 죽여주는 앨범을 만들어낸 사람조차 자기 한 몸을 건사하고 가족 부양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걸 자수성가라 볼 수 있을까? 그냥, 적당히 잘 사는 중산층....이 랩으로 갈 수 있는 한계 아닐까? (이게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저 대중들의 판타지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담이지만 유일하게 이 자수성가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양반이 스윙스다. 난 스윙스가 그래서 성공했으면 좋겠다. 이 판에서도 누군가는 자수성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내가 볼 때, 스윙스 같은 충동적이고 야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퀘스트다. 힙합 정주영이 되길 바란다. 진심으로.]
힙합 - 자수성가라는 이야기가 리얼리티를 죄다 잃어버린 지금, 한국에서 "홍대"는 어딘가?
오래전부터 힙합이라는 음악에 꽂힌 리스너들뿐이다. 이들에게 힙합을 좋아한다는 것 말고 딱히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러므로 이 홍대는 절대 커질 수가 없는 구조다. 힙합 음악에 꽂혀야만 들어올 수 있는데, 어디 음악에 꽂히는게 자기 마음대로도 안 되는데, 남의 의지대로 될 턱이 없다.
스카이민혁은 여기서 시작한다.
(5)
스카이민혁에게 붙은 별명은 '노력의 천재'다. 쇼미에서 나온 엉망진창인 랩, 스윙스에게 헤드락 걸린 채 "니 세대가 싫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저 헤헤 웃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스카이민혁의 처지였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최고의 처세술이었다 생각한다.)
그리고 소년 만화의 주인공들처럼, 점점 좋아지더니 마침내 <해방>에서 자기 자리를 찾았다.
사운드는 대놓고 절대 "가요화된 힙합"은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내 방에서 나가>의 가사에서도 대놓고 말한다. 자기는 요즘 차트에서 잘 나가는 애쉬 풍의 이모든 토일 풍의 감성 힙합이든 하지 않겠다고.)(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가요화된 힙합이 나쁜 것도 구린 것도 아니다. 그냥 이건 노선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 뿌리가 10년대 자수성가 - 독립/인디 힙합이라 선언하기도 한다. 현주소에서 나온 일리네어, 저스트 뮤직, 테이크원에 대한 샷아웃이 이를 보여준다.
다만 사운드는 결이 좀 다르다. 90년대 붐뱁 스타일, 그것도 재지한 트랙(3번 Outcome이나 10번 공생)과 베이스가 잔뜩 강조된 둔탁한 트랙 (비스티 보이즈를 생각나게 하는 잔뜩 공격적인 2번 식사와 창모-페노메코가 다시 한 번 리바이벌한 서태지와 아이들/H.O.T. 바이브를 느끼게 하는 5번 현주소)부터 요근래 유행하는 멤피스(와 그걸 기반으로 결합한 드릴이나 글리치 등) 트랙이 반반이다.
굳이 평가를 하자면, 재지한 트랙들 (3번, 10번 공생, 11번 진실)은 앞부분 서사 때문에 가사가 잘 와닿긴 했지만, 랩 자체는 '죽여준다'는 생각은 잘 안들었다. (이건 내가 붐뱁을 평가하는 기준이 높아서 일지도 모른다. 외힙이든 국힙이든 나한테 붐뱁에서 안 지루하게 뱉는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뽑는다. 국힙 한정으로는 이센스 말고는 잘 기억 안난다.)
하지만 멤피스와 공격적인 사운드 앞에서 스카이민혁은 날아다녔다. 기리보이가 쇼미에서 뽑을 때 "야마가 있다."고 했던지 "무언가 있다고 했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그래 그게 있다. 목소리는 꽤 하이톤인데, 거친 발음과 성량으로 빠르게 랩을 뱉을 때는 '분노'랄까,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자신의 삶에 새겨진 기억들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베스트 트랙은 2번 식사, 4번 아버지, 5번 현주소, 7번 내 방에서 나가, 8번 파이트. 그리고 앨범을 통으로 돌린다면 11번 진실과 12번 욕심은 충분히 좋은 엔딩이다.
(그리고 4번 아버지에 피처링한 권기백을 주목해야 한다. 예전에 권기백이 한국에서 제일 먼저 카티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 사실이 될 지도 모르겠다. 막 뱉고, 뭉개지고 뱉지만 전혀 안 지루하다. 카티와 다르게, 펑크락/트랩 메탈쪽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여하튼 미래가 기대되는 래퍼다.)
(6)
스카이민혁은 '노력의 천재'라는 자기의 서사 위에, 국힙의 역사를 살짝 겹쳐놓는다. 이게 대중에게는 먹힐지 안 먹힐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국힙을 들으면서 자라온 리스너들에게는, 즉 국힙의 "홍대"에서는 모두가 느낄 만한 앨범일 것이다.
역대급 명반일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사실 역대급 명반은 앨범 자체의 퀄리티보다는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게 이후 국힙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얼마나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고 뭐 그런 것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빈지노, 이센스, AP 컴필보다 좋은 앨범이었다.
나는 스카이민혁이 이 앨범으로 충분히 돈을 벌고, 홍대라는 범위를 지금의 곤조를 지키면서 더 넓혔으면 좋겠다. 진짜 자수성가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실 이래라저래라 하기 조심스럽지만, 사운드 자체가 지금보다 팝적인 - 듣기 좋은 것은 굳이 엄청 거부할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마지막 트랙의 이모 느낌은 상당히 좋았다. 자수성가 가사도 팝적인 트랙 위에 올라가면 대중성이 있다는 것을 호미들이 보여주지 않았던가? 세상과 싸우는 것은 멋진 일이긴 하지만, 싸우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밥이 이왕이면 오마카세면 기분은 더 좋을 것이다.)
좋은 앨범 만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퇴고를 안해서, 글이 좀 난잡하긴 할 텐데, 그래도 글을 주저리주저리 쓴 건, 리스너로서 플레이어가 한 노력에 대한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피쓰.




동감추
좋은글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싱잉랩은.. . 하지 말았으면...
싱잉이 아니여도 팝적으로 갈 방법은 꽤 있을듯합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좋은 보컬리스트한테 훅을 부탁하는거고, (지금 시장에서 가요를 듣는 대중들에게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리쌍, 코드림 비프리, 뱃사공 같은 좀 더 락킹한 사운드로 갈 수도 있겠죠. (이게 사실 본문에서 팝 어쩌고할 때 머릿속에 있던 사운드이긴 했습니다.)
아니면 아싸리 밴쿠버2나 한요한처럼 팝펑크/그런지/이모락 어딘가에 있는 사운드도 인기가 있으니, 이걸 좀 더 더티하고 거친 트랩 메탈의 형태로 가서 되나 안 되나 시험해볼 수도 있고요. (어차피 이번 앨범 멤피스에서 트랩 메탈까지는 엎어져서 코닿을 거리니깐요
)(덴젤 커리처럼요.)
또 하나는 드럼 앤 베이스/저지클럽 같은 BPM 빠르고 댄서블한 트랙을 시도하는 방안도 있을거고.
또 뭐가 있을까요? 마지막 이모 트랙처럼 좀 더 로파이하고 텐타시온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단 지금의 거칠고 날 것의 느낌이 남아야함. 싱잉랩처럼 너무 잘 부르면...안 됨.)
마지막으로 한국 사람들이 유구하게 좋아하는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창모처럼 도전해보는 것도 아주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나다.
홍대 부분 조금만 더 설명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홍대로 돌아왔다는게 잘 이해가 안되서 말임다. 귀찮으시면 무시하셔도 만사 오케이입니다 !
글이 지지부진해서,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하실거에요.
일단, 제가 생각했던 "홍대"는 그냥 멜론 탑 100을 듣는 대중이 아닌, 힙합이라는 것을 좋아하고 듣는 사람들의 총체 정도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홍대란 어찌되었든 (흑인으로서의 문제를 다루는 외힙과 다르게) "국힙을 들어왔던 리스너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리스너들은 (대중 가요 - 가요화된 힙합과 구분되어서) 힙합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자수성가"라는 (국힙이든 외힙이든 공통된) 레퍼토리 때문인 듯합니다. (일명 요근래 자주 나왔던 워딩인 '긍정적인 공격성' 같은 것이겠죠.)
스카이민혁은 이러한 에티듀드 그리고 이 에티듀드에 어울리는 사운드 (멤피스, 붐뱁)를 통해 이 "홍대"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저 노선의 차이인)(대중에게로 다가가는 서동현/한요한 등과 다르게) "홍대"로 돌아왔다고 표현했습니다.
너무 좋은글 잘봤습니다 ㅎㅎ 문체에서 법학전공자의 향이 느껴지네요 ㅋㅋ
캬 글의 공감 여부를 떠나서 너무 좋은 글이네요.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별개로 힙합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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