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alonso2000/223184379285
이현도는 메인 스트림의 정점에 있던 90년대와 2000년대에도 언더그라운드를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 블랙 뮤직의 주요한 선구자 중 하나였던 만큼 이현도에 대한 후진들의 존경과 지지는 두터웠고, 이현도 역시 <完全 Hiphop>(2000)과 <The new Classik… And You Don’T Stop>(2004)에서 마스터 플랜과 적극 협업하며 이에 화답했다. 이현도가 무려 19년 만에 내놓는 앨범 단위 작업물인 <Dry Season>의 파트너로 딥플로우가 등장하는 것이 선뜻 이해 가는 이유다. 최근의 한국 힙합에서 보기 드물어진 노장과 베테랑의 조합인 만큼, 이 앨범 역시 과거의 자장에 머물 것이라 예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베테랑의 화학 반응으로 생긴 에너지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뜨거움과 무게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고정된 색을 추구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장르 씬의 트렌드를 빠르게 흡수하여 연출하는데 능했던 이현도인 만큼, 이번 앨범에도 소위 '네오 붐뱁'으로 불리는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새 조류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이현도는 딥플로우가 소개해 준 그리셀다 레코즈(Griselda Records) 류의 사운드에 깊은 영감을 받았고, 이는 딥플로우의 육중한 라임들이 세워지기 딱 좋은 건조한 프로덕션으로 이어졌다. 다만, 프레디 카소나 선 진 등 한국의 기존 네오 붐뱁 프로듀서들과 비교해 보자면, 확실히 더 담백하고 간결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느린 BPM, 재즈, 혹은 블루스 샘플을 통한 어둡고 건조한 분위기, 때로는 드럼마저 거세되는 변칙적인 리듬이라는 네오 붐뱁의 특성이 물론 충실히 구현되어 있으나, 이를 최소한의 악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효율적이고 유려하게 구현해낸 것이 귀에 들어온다. 이를테면, "Ice Break"에서 잔향처럼 퍼지게끔 늘어진 LP와 같이 조정된 건반 샘플이라거나, 웨스턴 무비를 연상시키는 "Cactus"의 기타가 대표적일 것이다. "Fizz"에서의 재지한 프로덕션, 저스트 블레이즈(Just Blaze)나 디플로맷츠(The Diplomats)를 방불케하는 "Dry Alert"의 위압적인 피아노와 신시사이저, 소울 샘플을 통해 칩멍크 소울에 가까운 분위기를 연출한 "Supplement" 등 고전적인 음악에 대한 탁월한 재해석 내지는 최신식 변주도 <Dry Season>의 프로덕션에 있어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Cactus"나 "Humidifier"에서 비트 스위칭을 통해 극적인 부분을 형성하기도 하는 등 이현도는 그간의 관록을 통해 고전에 기반한 최신의 음악을 가장 세련되게 구현하였다.
언더그라운드에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보여 온 이들의 조합인 만큼 이현도의 디스코그래피 가운데서도 가장 젊고 마이너리티한 게스트 편성이 이루어졌다. 딥플로우가 특히나 빨리 작업해 줄 수 있는 게스트를 원했던 만큼 그의 새 동료들인 서리(30) 크루가 게스트의 주축을 이룬다. 특히 디젤의 호쾌한 듯 단순무식한 타격감이 훅과 벌스 양쪽에서 크게 맹활약 하며 앨범이 지닌 뜨겁고 건조한 에너지에 크게 한몫한다. <DOUBLECROSS MUSASHI>(2023)에서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와 날선 블랙 유머와 고도의 압박감을 다시 한번 선보이는 손 심바와 기존의 예리하고 역동적인 맛을 후반부에 새겨넣는 쿤디판다의 활약도 상당히 인상적이지만, 보다 견고해진 랩으로 비트를 격하게 죄여오는 오하이오래빗의 벌스는 단연 발군이라 할 만하다. 서리 크루 이외에도 현재 한국에서 네오 붐뱁을 자주 시도해온 이들인 에이체스와 영 잔디스가 앨범에 색다른 타격감을 추가로 부여해 주기도 하는데, 특히 하이 톤의 쫄깃한 플로우로 등장한 에이체스는 단 8마디 만으로 앨범의 여러 걸출한 게스트들 가운데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성공적으로 각인시켰다. 여기에 영 잔디스의 러프한 둔탁함이 더해지며 발생되는 케미스트리는 이들의 늦은 하입을 싹 잊게하는 기대감을 우리에게 채워준다. 앨범의 호스트가 베테랑 중의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앨범이 뚜렷한 열기를 지니고 있는 데는 게스트들의 젊은 혈기가 한몫하는 셈이다.
유독 2023년 들어 쏟아지는 듯한 여러 장르적인 앨범들 가운데서도 <Dry Season>의 위치는 특별하다. 한국 힙합 최고의 노장이 최신의 장르를 깊이 연구하고 이해하여 설득력 있는 세련미를 구축하였고, 그 위로 베테랑인 딥플로우의 견고함과 젊은 아티스트들의 혈기방장함이 교차하며 <Dry Season>만의 뜨거운 건조함을 형성하였다. 더해서, '건조함'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욕망에 대한 갈구와 매서운 상승 욕구, 그리고 메마르고 뜨거운 질감을 통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앨범의 소프트웨어가 장르적인 측면을 보다 더 증폭시켜냈다. 한마디로, 이현도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마이너하고 장르적인 시도는 딥플로우라는 제대로 된 구현자를 만나 가뭄이 온 듯한 장르 씬의 또 다른 단비가 되어주는 듯하다. 베테랑 아티스트들이 다시금 마각을 드러내는 요즘, 여기에 추가되는 딥플로우와 이현도의 거친 열기가 더더욱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다.
Best Track: Cactus (feat. dsel, OHIORABBIT), Dry Alert (feat. A-Chess, Yonge Jaundice), Supplement (feat. Khundi Panda)
https://drive.google.com/file/d/10F7OfNc1SY5e00CF20WWs6l8HOuygTH2/view?usp=sharing
이 리뷰는 HOM#4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제 첫 메인 리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아하는 앨범 리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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