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힙합이 탄생한지도 어느덧 20년...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과거가 현재와 연결되있다는 것, 과거의 일들이 현재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일 겁니다. 20년을 갓 넘긴 국내힙합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해왔죠. 그 중에 몇몇은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이제 음악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구요. 그 짧지만은 않은 국힙의 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획을 그었던 집단들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레이블이 될 수도 있고, 크루가 될 수도 있고, 어떤 프로젝트 팀이 될 수도 있겠죠. 아니면 옛 PC통신 시절 동호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구요. 콰이엇이 국힙상담소에서 레이블을 크루처럼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는데 아직 국힙리스너들은 그러한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힙합은 크루문화가 발달해 있고 그 크루가 레이블이 되기도 하죠. 그렇게 한 집단 안에 속한 아티스트들을 어떤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무리로 묶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국힙씬이 레이블 중심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현상을 비판하기보다 이 짧지 않은 국힙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음악적 정체성과 스타일을 가진 무리들이 있었고 그들이 어떤 음악을 했었는지 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가 힙합을 들은지 햇수로 15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참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음악들이 있었죠. 거창한 뭔가를 말하려는 건 아니고 단순히 좋은 음악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한 명의 국힙 팬으로서. 혹시 힙합을 들으신지 얼마 안 되는 분이 있다면 이런 음악들도 있었구나 하고 좋게 들어주시면 그걸로 감사한 일이죠.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처음으로 제가 꼽은 집단은 SNP입니다. 예전 PC통신 시절 나우누리에서 활동하던 동호회였죠. 멤버로는 버벌진트, 피타입, 4wd, 비솝, 스테디비, 크릭, 휘성, 정인 등이 있었습니다. Show and Prove(보여주고 증명하라)라는 자신감 넘치는 이름을 사용하던 동호회로, 학구적인 성격이 강했죠. 우리가 수학문제를 풀때 공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알아야 응용문제를 풀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한국어로 된 한국어랩의 틀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강조됐던 게 바로 라임이었죠. 랩에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 라임 말입니다. VJ의 1219 Epipany의 가사처럼 ( '학교! 종교! 육교! 거리던 이들이 차츰 머릴 쓰기 시작해') 그들은 단순히 뒷말만 맞추는 라임을 벗어나 다음절 라임이라는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그 시도의 정수를 보여주는 게 버벌진트의 모던라임즈 ep고, 이 앨범이 국힙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죠. 발군의 실력을 갖춘 몇몇 멤버들(버벌진트, 데프콘, 피타입)을 주축으로 한 이 집단은 이미 랩이나 프로듀싱에서나 국힙의 다른 뮤지션들과는 다른 독보적인 색깔을 갖고 있었고 그들만의 철학을 가지고 씬을 선도해나가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VJ가 SNP의 몇몇 멤버들과 이후에 만든 오버클래스에서도 이어집니다. 물론 지금처럼 스킬적으로 화려하지는 못할지라도 기본을 확실히 지키면서 나름의 색깔을 가진 좋은 음악들을 많이 만들어냈고 1세대 국힙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즐겨 듣는 곡도 많구요. 그 중에 제가 좋아하는 곡을 몇 곡 뽑아보겠습니다.
1. Defconn - No Joke(feat. Verbal Jint) (2001)
SNP가 낳은 환상의 단짝, 데프콘과 VJ가 같이 만든 마스터플랜 디스곡입니다. 이 곡 발표 후 데프콘은 MP 소속 아티스트가 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VJ 또한 MP의 많은 아티스트와 작업하죠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Do what I do가 들어있는 앨범이 2004년에 나왔던 MP 컴필레이션 음반 'Change the Game'입니다 : TMI) 뭐 당시엔 이런 일이 흔했죠 조PD 디스하고 스타덤이랑 계약한 DJ UZI처럼요 ㅋㅋ 이 곡도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노자에 뒤지지 않는 걸출한 디스곡이라 생각합니다.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볼 수 있는 데프콘의 짜임새 있는 비트위에 펼쳐지는, 당시 이미 완성형이었던 VJ의 랩. 얄미운 랩은 정말 1인자인거 같아요 ㅎㅎ
2. Krucifix Kricc - Movin It (feat.Verbal Jint, B-Soap, Westylez, Lucy) (2002)
얼마 전까지도 mp3에 있었던 곡입니다. 프로듀서 크릭의 1집의 마지막 트랙으로 지펑크의 시도를 꽤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노자의 hook으로 유명한 lucy의 청량감 넘치는 보컬과 중간의 Westylez의 주고받는 랩 부분을 좋아합니다. 언제 들어도 기분좋게 들을 수 있는 곡.
3. 4wd - 학교(feat. 휘성)
역대급 재능충이라고나 할까요? 노자가 처음 쓴 랩이니 말 다했죠. 디스곡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노자 대신 이 곡을 가져와봤습니다. 라임을 중요시하는 SNP 멤버들 중에서도 4wd는 랩에서 라임이 없는 부분을 찾는 게 더 힘들만큼 빽빽한 라임으로 유명했죠. 인터넷에 유출된 이 곡에서는 가사적으로도 수준급의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Verse1에서는 학생을 Verse2에서는 선생님을 각각 비판하고 있습니다. 후렴으로는 휘성이 목소리를 더해주었고 비트는 무려 본인이(!) 만들었습니다. 정말 짧은 전성기 동안 명곡 몇 곡을 내고 사라진 역대급 재능의 소유자 4wd의 곡, 학교입니다.
4. Tafka Buddah - 남행열차(feat. Verbal Jint) (2003)
마지막으로 소개드릴 곡은 프로듀서 타프카 부다의 곡입니다. SNP시절 대표 프로듀서 중 하나로 'Tragic Temple'이라는 프로젝트 팀을 이끌기도 했었죠. (비솝의 시트콤 중 '아무튼 Back 컴백 아닌 컴백 이건 내게 tragic 뭐 대신의 선택 더블티 털북숭이 잠수 아저씨 같이 만들던 앨범은 엿 바꿔 먹었니'에 나온 털복숭이 잠수 아저씨가 이 사람입니다 : TMI) 이 분의 1집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제 음악리스너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때 중 하나입니다. 놀랍다라는 느낌을 떠나 신비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거 같아요. 음악에 있어서 사운드라는 것의 힘을 그 때 처음 느꼈던 거 같습니다. 힙합이라기 보단 트립합의 느낌이 강한 1집은 정말 명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1집 중에서 버벌진트가 참여한 남행열차를 꼽았습니다. 약간 새벽녘 동틀때 첫차를 타고 들어오는 느낌이랄까요. 다가올 미래의 설렘 같은 게 느껴지는 곡입니다. 예전에 곡만 올라와 있던 게 없어져서 부득이하게 앨범 전체가 올라온 영상을 올리게 되었네요. 24분 14초 부분입니다.
아무쪼록 즐겁게 들어주셨으면 좋겠고 앞으로 가끔씩이라도 써 볼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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