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강감찬의 귀주 대첩, 그리고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한국사를 읽을 때면, 국수주의자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역사들을 종종 마주친다. 특히 이 나라의 역사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애국심과 자부심을 고양시키는, 어쩌면 설교나 교훈을 위해 인위적으로 제작했다 믿을 법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위의 세 대첩은 한국 전쟁사의 3대 대첩으로 각각 612년, 1019년, 그리고 1592년의 일이다. 그런데, 한국사를 입시를 위해, 혹은 자격을 위해 공부한 우리들은 자연스레 도식적인 이 설명에서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한산도 대첩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업적인 것에 이견은 없는데, 그게 언제 벌어진 일인지를 왜 알아야 하냐는 거다. 대부분의 역사 시험은 네 개, 혹은 다섯 개의 선지, 그중 하나의 가장 이상적인 답변과 나머지 읽는 이에게 어떻게든 혼란을 주려는 오답들로 고르게 채워져 있다. 자국의 역사에 대한 앎이 너무도 당연한 전제라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저 자본주의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 21세기 인간들의 본성을 생각했을 때 역사를 공부하고 시험을 보는 것이 정말이지 더럽게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자국의 역사를 기록한 한 줄 한 줄이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의 역사만큼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나처럼 역사의 쓸모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한 둘이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난 역사의 변명을 듣기 위해 역사 그 자체를 다룬 여러 책을 한 번에 주문하고는 한 권 한 권 읽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섯 권이 넘는 책에서도 난 이 질문에 대해 납득이 가는 명쾌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 특히 한국사 교사가 쓴 책은 역으로 역사의 무쓸모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역사 속 교훈, 그러니까 선례를 통해 내 앞에 놓인 선택의 기로에서 더 당당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며 역사의 쓸모를 주장하고, 또 누군가는 인터넷을 탐험하다 길을 잃는 우리 모두에게 비판적인 사고를 더하는데 그 쓸모를, 혹은 보다 넓고 길게 볼 수 있는 성숙하고 균형 잡힌 관점을 갖기 위해 역사가 필요하다 주장한다. 한두 지면을 넘어 한 챕터, 한 권 분량을 할애하여 주장하는 이 내용들이, 그저 "재밌어서" 역사를 본다는 아주 명료하고 경쾌한 네 글자보다 더 공감하기 힘든 것을 보면, 내게 역사의 효용성을 납득시키는 건 꽤나 답답한 시간이 될 것만 같다. 그런데, 이들의 의견 중 특히 흥미로웠던 몇 문장이 한국사나 세계사가 아니라 음악사에서 그 쓸모를 찾아보도록 종용했다. [Jazz It Up!]과 [PAINT IT ROCK], 혹은 [아메리칸힙합]과 같은 장르사 서적을 읽었던 내 기억을 되살려 보는 순간, 생각보다 복잡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과거 '고전의 쓸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헛소리를 늘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고전을 나름 재미있게 듣던 내 모습에 취해가는 일종의 부산물이었다면, 이 글은 어쩌면 취기가 말끔히 가시고 난 뒤 음주의 무익함에 대해 곱씹어 보며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 뒷수습을 하는 과정이 될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판적인 태도를 글의 시작을 위한 동력으로 삼았으니, 이전보다는 그럴싸한 헛소리가 되길 기대해 본다.
178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 유럽사의 단골 주제를 넘어 "역사"라는 키워드 자체를 상징하는 듯하다. 일반적인 경우 우리는 1789라는 숫자,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이름, 발발 과정과 그 결과를 마치 영단어 외우듯 머리에 각인시킨다. 그렇게 각인된 파편적인 지식은 우리에게 아리까리한 선지들을 좀 더 빠르게 지워낼 능력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식이 대체 왜 필요한가? 한 달은커녕 일주일만 지나도 까먹을 숫자 네 자리와, 프렌치 하우스 앨범을 리뷰했던 어떤 블로그에서 봤었나 가물가물할 법한 장 자크 루소라는 이름, 비전공자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연보식 사실 나열. 본질로 위장한 이 지엽적인 지식들을 달달 외우고 시험을 보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이 책의 저자들은 입을 모아 주장한다. 그들은 말한다. 1789라는 숫자가 아니라 1789년의 프랑스의 모습과 배경을, 국민들의 공통된 욕구를, 의식을,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발로가 정말 프랑스 혁명이었는지를, 장 자크 루소의 인적 사항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이 그의 철학을 왜 필요로 했는지를, 그러니까 판단이 아니라 이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거시적이고 보다 넓은 관점으로 "사건"들을 바라보는 것이 역사적 사고라는 것이다. 꽤나 그럴싸한, 그 어떤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이 설명을 읽은 뒤에도 나는 역사의 쓸모가 여전히 의심스러웠지만, 이 역사적 사고라는 것이 음악을 들음에 있어서는 생각보다 유효할 것 같음을 직감했다. 그저 이곳에서는 대서양 헌장이 <Discovery>가 될 뿐이고, 루스벨트와 처칠은 방갈테르와 기마뉘엘이 될 뿐이다.
인터넷이 등장하며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있는가'보다 '얼마나 빨리 지식을 찾아낼 수 있는지'의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혜택을 누렸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마주하고 제대로 규정한 순간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각종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의 등장으로 그마저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인간 스스로 우리의 한계를 당겨온 것인지, 또 다른 세계로의 전이 과정인지는 미래의 우리만이 알겠지만, 불과 한 세기도 걸리지 않은 이 시간 동안 역사는 두 번이나 그 쓸모를 다시 증명하게 되었다. 대중음악의 평론가들은 비교해 보라. 불과 5년 전의 본인과 지금 본인의 모습을. 청개구리 심보로 AI에 저항하는 최후의 인류 코스프레 중인 나조차 음악적 사건이나 사실들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자연스레 GPT를 찾게 된다. 그저 이 골방에 5년 넘게 박혀있던 나 같은 사람이야 글을 쓰기 위해 흑인 음악의 역사, 록의 역사, 전자 음악의 역사를 읽고 들었었지만, 이젠 그런 역사를 전혀 모르는 이도 만약 글 속에서 힙합의 역사를 언급해야 할 일이 있다면 GPT에게 '단 한 줄로 간결히 답변할 것'을 강조하며 "힙합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물어보면 그만이다. 작성자는 결국 그 역사에 대한 소위 "맥락적" 이해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해당 글에서 필요한 역사적 사실의 공백은 말끔히 채워 넣을 수 있다. "아프리카계 리듬 전통 → 블루스·재즈 → 펑크(Funk)·소울 → 레게·사운드 시스템 문화 → 브롱크스 DJ 문화 → 힙합"이라는 이 도식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읽는 것, 그리고 그걸 암기까지 하는 행위의 가치를 숫자로 환원하면 그 수치는 말 그대로 수직낙하 중이다. 한때 미국은 자국민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비극으로 여기고 미국사의 교육에 천문학적인 돈을 썼지만, 반세기가 지난 아직까지도 미국의 국민들은 자국의 역사를 우리만큼이나 모른다. 그럼에도 미국은, 오히려 더 압도적인 존재가 되었다. 과거 나는 고전을 듣고 장르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그 장르를 향한 더 깊은 애정과 연결, 교감 따위의 키워드를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앞뒤가 바뀐 허파에 바람만 찬 생각이었다. 역사를 알아야 애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 있어야 역사를 알고 싶은 거다. 그럼 정말로 장르의 과거를, 그들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일이 무익한 걸까. 다행히도 음악의 과거는 그 특수성에 빚을 져 생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음악보다 '계승', '재해석 혹은 재구성', 그리고 '존중'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문화 예술을 본 적이 없다. 이 음악가라는 집단은 아직도 20세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그들의 정신을 윤색하며 그들의 작품을 채색한다. 그 방식이 가장 새롭고 효과적이라거나 21세기 키즈들의 태생적인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장르를 사랑했던 고전 애호가이기 때문이다. 완전무결한 새로움을, 과거의 그림자를 지우려 발악하는 이조차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결국 그가 음악을 만들게 된 계기 또한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망에 있으니까.
안타깝지만 역사적 사실만을 머리에 축적하는 건 아직까지는 쓸모없다. 앞서 언급했던 역사적 사고가 - 사실 갖다 붙이면 어떤 단어로도, 단순히 넓게 바라보기로도 바꿀 수 있는 - 이 특수성과 함께라면 그제야 그 쓸모를 조심스레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다. <Enter the Wu-Tang>의 갱스터스럽고 하드코어한 느낌은 그리젤다로도 충분하지만, 굳이 <Enter the Wu-Tang>을 듣고 그 시대의 시류를 알면 좋은 이유 말이다. 좀 웃긴 예시를 하나 들어보려 한다. <Yeezus>를 역사를 위한 예시로 들기에는 이제 막 10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그리고 20세기의 음악들을 함께 돌아보니 <Yeezus>는 특별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 급진적인 전자음도 그렇지만, "급진성" 그 자체가 성공한 경우, 그리고 듣는 이들에게 말 그대로 "급진적"으로 다가온 경우가 생각보다 없기 때문이다. 데스 그립스의 음악이, 클리핑의 음악이, 인저리 리저브의 음악이 급진적인 성향을 띠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 음악들이 <Yeezus>만큼 충격적이었냐 묻는다면 적어도 난 아니다. <Yeezus>만큼 정신없으면서 그 포인트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음악이 있었나, <Yeezus>만큼 불편하지만 중독적인 음악이 있었나, <Yeezus>만큼 뜬금없는 커리어가 있었나, 그러니까 <Yeezus>만큼 충격적인 순간이 있었나. 칸예가 칸예일 수 있는 건,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를 발매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3년 뒤 <Yeezus>라는 앨범을 발매했기 때문이다 - 라고 나는 생각한다. 트래비스 스캇의 <UTOPIA>는 그래서 <Yeezus>의 왜곡된 전자음을 바라본 게 아니라, <Yeezus>가 내뿜는 왜곡된 아우라를 바라본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Yeezus>를 떠올릴 때면 곧장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이 생각난다. 두 작품 모두 이것이 난잡한 건지, 다채로운 건지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빠져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당시 힙합의 면면이 돈다발로 꽉 묶여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단 1년 만에 이런 급진적인 선회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스캇은 <Yeezus>를 만들던 칸예와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를 만들던 척 디만이 교감할 수 있는 그 감정을 느끼고 싶었던 게 아닐까. <Yeezus> 스튜디오의 공기를, 그 냄새를, 그리고 그 분위기를 생생하게 포착하려던 게 아닐까, <Yeezus>가 아니라 칸예와 릭 루빈이 대화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닐까. <Yeezus>의 트랙을 하나하나 <UTOPIA>와 대보고 있던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만약 지금 내가 그 글을 쓸 당시로 돌아간다면, <Yeezus>는 치워버리고 <Days Before Rodeo>를 가져와 <Yeezus>의 스튜디오에서 스캇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미래를 구상했을지에 대해 더 깊게 고민했을 것이다 - 물론 <UTOPIA>가 <Yeezus>가 못 된 이유는 단순히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긴 한다. 이 두 앨범만큼, 아니 더 파격적인 앨범이 있었는데, [Jazz It Up!]을 읽는 내내 "이게 감상을 위한 음악일까, 연주를 위한 음악일까"라는 고민을 떨치지 못하다 한 방에 터뜨려준 <Bitches Brew>가 그렇다. 데이비스는 재즈의 역사 내내 장르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며 그 경계선을 조금씩 넓혀왔다. 그러나 <Bitches Brew>는 <In a Silent Way>에서의 부드러운 노크를 넘어 급발진과 그로 인한 교통사고에 가까웠고, 포크 록 <Bringing It All Back Home>을 발매하며 밥 딜런이 장르의 오랜 팬들을 분노케 한 사건이 불과 5년 전의 일이라는 것과 그 전철을 그대로 밟으려는 듯한 모습에 재즈 마니아들은 상당한 불만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히피 문화의 정점을 달렸던 1960년대, 그것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전설을 써내린 바로 다음 주에 <Bitches Brew>의 녹음이 시작되었다. 데이비스는 사운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본격적으로 전기 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퓨전의 향연을 시작한다. 재즈와 록이 극단적인 반대 이미지를 띄었다는 점, 우드스톡의 전기 기타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만큼 견고한 차음벽을 이 장르만의 매력으로 자랑하던 사람들, 섬세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이유로 재즈를 사랑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데이비스는 재즈 팬들에게 장르를 견인해온 성부에서 재즈의 불순분자로 그 인식이 바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당시 재즈는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전형적인 마니아만을 위한 음악으로 전락하기 직전이었다는 것과, 그 퓨전의 대상으로 록만큼 적합했던 장르가 없었기에 데이비스가 헨드릭스의 음악에 어느 정도 열려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Bitches Brew>는 유독 거부감이 강하다. 그의 다른 변곡점만큼 자연스럽고 부드럽기보다 변화를 위해 변화를 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어찌 보면 <UTOPIA>와 <Yeezus>의 스캇과 칸예 또한 다름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혔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들의 주된 영감은 어떤 순수한 내면적 욕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래서 난 <UTOPIA>를 일면적으로 <Yeezus>의 아류작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다. "MODERN JAM"에서의 기마누엘과, 그 앨범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CIRCUS MAXIMUS"는 <Yeezus>라는 우상을 향한 적절한 존경으로 볼 여지가 있고, "MY EYES"는 적어도 <Yeezus>와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를 만들던 둘의 아우라에 그 누구보다 근접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전부 헛소리일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저 자연스레 <UTOPIA>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져 나 스스로에게 질문에 질문을 던지던 사고 흐름을 두서없고 팩트 체크도 없이 나열했기 때문이다. 난 <UTOPIA>가 발매되기 전부터 스캇을 그 어떤 래퍼보다도 좋아했다. 그가 칸예의 잔영을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블록버스터를 발매하던 칸예를 향한 기대감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그 만족감을 어느 정도 채워줬기 때문이다. <UTOPIA>는 내게 특별하다. 이 헛소리들로 <UTOPIA>에는 - 내 과거의 헛소리를 빌리자면 - 깊고 끈끈한 애정이 부가됐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역사가 무슨 쓸모가 있는지 성문화하기 어렵다. 그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갔던 내 사고의 흐름을 예시로 드는 게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이것이 과연 내가 앞서 언급했던 "역사적 사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까지 읽은 책의 저자들에게 답답함을 느낀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그저 곱씹어 보면, 이런 식의 망상에도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 그 재료를 통해 파생되는 재미있는 질문들이 어떤 작품을 더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것, 청각의 교감을 넘어 정신적 교감을 - 일방적일 수도 있지만 - 함으로써 감상에 풍부한 의미가 더해진다는 것쯤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런 과정을 위해 역사적 사실을 - [Jazz It Up!]과 [PAINT IT ROCK]처럼 - 알게 되는 건 충분히 의미가 있다. 역사를 모른다면 현재에 갇히게 되고, 고전은 그저 먼지 더미의 희미하고 다 부서져 가는 골동품이 될 뿐이다. 역사를 보는 것은 우리가 현재에 통용되는 소리와 의미, 그 가치가 과거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며 단단히 얼어있는 고정관념을 부수게 한다. 1988년의 힙합이 어땠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처럼 촌스러운 음악을 <Yeezus>와 동일선상에 둘 수 있을까. 그 점에서도 역사는 의미 있다.
한창 글을 쓰는 데 취해있을 적 옛날 음악을 듣다가 말 그대로 취해버린 건지, 이 비슷한 주제로 헛소리를 장황하게 써내린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이 글도 한 세기 이전의 힙합 앨범을 주구장창 돌리다 갑작스레 쓰게 되긴 했지만, 그때는 제 자신에게 취해있었다면 지금은 그 기억이 부끄러워 최대한 수습하려는 노력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주제는 저처럼 겉만 핥아대는 리스너가 다룰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이 질문에 대한 유명한 참고서가 적다고 느껴져 어떻게든 한 줄 보태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댓글을 통해, 혹은 제 글에 답답함을 느껴 글을 쓰게 된 다른 분을 통해 완성될 수 있겠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게 본래 의도이기도 하고요. 생각보다 우리 힙합이 너무 조용합니다. 거물들의 연달은 실패는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긴 하지만, 만약 라키까지 죽을 쒀버린다면 진지하게 장르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여러 글이 또 올라오지 않을까 하네요. 덕분에 제 감상 의지도 많이 줄어들었기에, 적어도 이제 막 음악 욕구를 불태우는 사람이 있다면 심심풀이로 읽을 만한 글 하나 올리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다들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길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nikesfm/224126708642




흥미로운.
잘 읽었습니다.
역사라는게 참 중요하면서도 배우기에는 정말 방대하고 귀찮죠...
에미넴이 아니라 힙합에 입문한지는 반년차인 저는 갈 길이 참 멀었네요 ㅋㅋ
이런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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