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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jon - Baby를 듣고

TomBoy6시간 전조회 수 374추천수 12댓글 5

19 Dijon Baby.jpg

2025/08/15

 

 

 

 

 

디존 두에냐스의 목소리를 잊어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 목소리는 한껏 멋을 부리다가 돌연 담백해지고, 애달프게 울부짖다가 천진난만해지며, 그지없이 섹시하면서도 초현실적이다. 그런데 솔직히 디존의 목소리가 그가 데뷔했던 8년 전에 비해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가장 탐스러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생각했던 린든 데이비드 홀 또한 '러브 액추얼리'에서 All You Need Is Love를 커버한 가수로만 기억되며 자연스레 잊혔다. 당장 유튜브 커버 영상만 보더라도 제2 제3의 디존과 린든이 도처에 즐비하다. 우리는 왜 8년이 지나서야 그 호소력을 알아보게 된 걸까? 대체 어떤 요소가 누구를 성공 가도로 또 누구를 망각의 늪으로 인도하는 걸까? 크리스토퍼 에드윈 브로의 데모를 인터넷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지만 Novacane의 드럼 라인이 울려 퍼지기 전까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제아무리 신이 내린 목소리일지라도 음악과의 페어링이 중요하다. 디존의 초기작을 들어보면 맥북 한 대와 기타 한 대를 들고 장르의 분계선에 서 있는 프랭크 오션의 추종자 같은 인상을 준다. 거기에는 로파이 미학과 DIY 정신이 듬뿍 깃들어 있었으나 매력이 없는 게 아니라 넘치는 나머지 너무 많은 복제자를 양산해 낸 게 문제였다. 오션이 브릿팝과 힙합 문화를 차용해 오렌지와 블론드를 빚어냈듯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야 했다. 모방을 할 게 아니라 모방을 낳을 때가 온 것이다.

 

    <Baby>는 빈틈없이 짜인 곡 구조가 느슨하고 자유로운 잼보다 더 월등한 음악을 만든다는, 즉 완벽한 구성미가 음악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전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디존은 흡사 다프트 펑크처럼 집 안의 빈 방에서 이 프로젝트의 대부분을 썼다. 다프트 펑크와의 차이점이라면 디존의 빈 방은 친구들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현재 투어나 SNL 라이브에서의 시끌벅적하고 쾌활한 무대 콘셉트는 소리치듯 대화를 나누고, 화음을 맞추고, 맥주와 함께 밤을 지새우던 그 빈 방으로부터 시작됐다. 특히 <Two Star & the Dream Police>를 통해 한발 앞서 컬트 스타가 된 맥기, 앤드류 사를로, 헨리 콰피스, BJ 버튼 같은 동료들의 조력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바퀴를 발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왜 모두가 우리만큼 치열하게 몰두하지 않는지 의문이었죠. 그러다 서로에게 말했습니다. 서로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한 번 해보자고요." 맥기와의 만남을 회상하는 디존의 말이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창작의 본질이기도 하다. 아무리 우수한 창작자라고 해도 완전히 혼자서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정도로 우수할 수는 없다. 비범한 개인과 문화는 히트곡 모음 음반처럼 모으는 자이자 전유하는 존재이다. 자기만의 것을 꼭 자기 혼자서 만들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고 있을 때, 밑에서는 회반죽을 바르고 물감을 배합하던 조력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예나 지금이나 나의 왓슨을 알아보는 눈은 천지창조를 그려낼 수 있는 능력만큼이나 값지다.

 

    디존과 동료들은 전작 <Absolutely>에서 채택했던 아날로그 감성과 자유분방한 접근법을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확장시킨다. 그 주인공은 프로덕션으로서, 이 앨범에서는 실제로 연주된 악기와 샘플 그리고 가공되지 않은 원음과 효과음을 구분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좀 더 거친 프린스라는 평가를 받았던 디존의 보컬에는 먹음직스러운 에코와 리버브가 첨가되어 있고 악기 연주는 왜곡되거나 역재생되고 드럼은 홀연히 사라졌다가 귓전을 때리듯 나타난다. 짧은 무조성 크레셴도의 IDM 사운드와 복음 아카펠라가 대비를 이루는 Fire!가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현재 디존의 음악에 따라붙는 수식어들, 예를 들어 얼터 알앤비, 포스트 팝, 안티 아메리카나, 누 정글 같은 장르명에는 언어유희 이상의 효과는 없을 테지만, 나름 조금씩 진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말했듯 이 곡들을 하나하나 해체해서 분석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바로 그 불가능과 무의미가 <Baby>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온갖 소리와 효과음은 거의 동시에 울려대거나 망가뜨려지고, 타이밍은 번번이 빗나가고, 사이키델릭하며 선명하다는 불가사의한 등식이 성립한다. 어떤 예술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신비롭고 또 어떤 예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마음 깊이 흠모하게 된다.

 

    <Baby>를 위켄드와 오션에 의해 시작된 얼터 알앤비 흐름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기름이라고 해서 참기름과 올리브오일이 같지 않듯 둘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조금 투박하게 표현해서 위켄드와 오션의 음악을 블랙 뮤지션이 만든 화이트 뮤직이라고 해도 큰 비약은 아닐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칸예 웨스트가 그랬듯이) 둘은 블랙으로서의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았다. 죽어가던 알앤비를 살리는 대신 죽도록 내버려두고 자신들의 것을 만들었다. 그들의 생존법은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는 게 아니라 그 전통에서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House of Balloons>과 <Blonde>는 '알앤비'가 아니지만 두 앨범을 만들고 부른 이들의 피부색이 검기 때문에 알앤비로 분류된다. 흑인의 팝에는 알앤비 그리고 백인의 블루스에는 블루 아이드라는 라벨을 붙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식 체계의 명백한 맹점이자 무의식 층위에서의 인종적 편견이다.

 

    반면 <Baby>는 지난 사반세기의 어느 시점에 발매됐어도, 별종 취급을 받았을지언정 많은 알앤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알앤비로 장르 음악에 입문한 나부터가 그렇다. 어떤 음악을 알앤비로 분류할 것인가? 가장 확실하고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잣대는 '섹스'이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섹스를 할 수 있는가? 모든 알앤비가 섹스를 위해 쓰인 건 아닐지 모르나 섹스를 할 때는 대부분 알앤비를 틀어놓는다. 이런 맥락에서 이성과의 교감이 필요할 때 <Blonde>를 틀어놓고 싶지는 않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모니터의 불빛만이 나를 비추고 있을 때 그럴 때 Seigfried를 재생할 것이다. 그렇다면 디존과 <Baby>는 어떨까? 수십 년간 알앤비의 명맥을 유지해 준 건 섹스 잼으로서의 면모였다. 이 베이비 메이킹 뮤직 계보에서 Another Baby! 같은 곡은 그 어떤 경쟁자보다 독특한 위치에 있는 듯하다. 이 프린스의 야성미와 제이 딜라 식의 해체주의가 뒤섞인 절묘한 그루브가 침실에서 흘러나온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은 이성을 유혹해야 할지 춤을 춰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Baby>에는 AI가 쉽게 복제하지 못할 식탁 위에서의 대화 같은 생동감이 흩뿌려져 있다. 가정생활의 풍경은 감격스럽고 때로는 격렬하게 그려진다. 디존은 자신의 아이에게 엄마 조니를 어떻게 만났는지, 성스러운 임신과 고된 진통의 과정을 어떻게 헤쳐왔는지, 부드러운 어휘와 벨벳 같은 리듬을 통해 설명해 준다. 여기서 그는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성공을 목전에 둔 뮤지션으로서의 소감을 적절히 버무려 지나온 삶을 반추한다. 이 앨범은 사랑에 빠지고 섹스를 하고, 그 사랑과 섹스의 결실인 아이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되는 일과 현대의 남성성에 대해 고민하고, 별빛 아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문하는 이가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빚어낸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의의가 있다. Automatic에서는 올 더티 바스터드의 익살맞은 추임새, 소음, 라디오 녹음본 등이 20년 전 칸예와 팀보가 함께 찍은 듯한 비트 위에 녹아내린다. 그 힘찬 박동 위에서 디존은 조데시의 케이시를 떠오르게 하는 강렬한 스크래치를 통해 프린스의 영혼을 불러낸다. 이렇듯 <Baby>를 듣고 있으면 괜히 얼터너티브의 현재 위치를 가늠해 보게 된다. 비요크에서 FKA 트위그스로, 케이트 부시에서 스펠링으로, 프린스에서 디 안젤로로, 프랭크 오션과 제임스 블레이크에서 디존으로. 가늠좌는 늘 변화해 왔고, 지금 이 순간의 가늠좌는 디존이다.

 

 

 

 

 

---

 

원래는 발매 즈음해서 써둔 글인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올리게 됐네요.

 

올해의 앨범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올해를 대표하는 앨범 '중 하나'로는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을사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아직 못다 한 근심은 새해로 미뤄두고
좋은 음악과 함께 따스한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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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6시간 전

    좋은 글이군요. 디존이 얼터네티브의 가늠좌라..본 이베어는 얼터네티브라기엔 결이 많이 다른가

  • 5시간 전

    너무 잘 읽고 갑니다

  • 5시간 전

    잘 앍었습니다

    Absolutely나 Two Star을 들었을 땐 느슨한 구조 자체가 핵심이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결핍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는데 Baby에서는 그 느슨함 속에서 불꽃 튀는 순간을 잘 포착해낸 것 같아요

  • title: Santa Bearyi
    2시간 전

    나중에 다시 들어봐야겠다

  • 1시간 전

    정독하고 앨범도 다시 제대로 들아봐야겠네요

     

    항상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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