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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나쁜 글, 이상한 글

title: Frank Ocean (2024)NikesFM2025.04.19 15:58조회 수 1159추천수 22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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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나라의 국민에게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지극히 당연한 경제체제이자 하나의 진리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성으로 제어되던 열기가 자연스레 과열될 정도로 인기 있던 토론 주제, 공산주의라는 이 뇌관과도 같은 단어는 극소수의 다섯 국가를 제하면 호그와트의 볼드모트 신세가 된 듯하다. 이는 사실상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의 압도적인 수 차이에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나이 또래보다 비교적 개방적인 대학교 새내기를 모아다 공산당 선언을 읽히고 독후감을 써내라 한다면, 볼드모트의 흉측하고 시체 같은 몰골은 잠시 손으로 가리고서 톰 리들이 사실은 얼마나 잘생겼는지 아냐는 소수의 해리포터 팬처럼, 공산당 선언의, 아니 마르크스의 주장에 매료되는 친구가 분명 있을 것이다(안타깝게도 난 아니지만). 글은 때로 상당한 파괴력을 갖는다. 직관적인 거부감으로 이미 방향을 돌려버린 코끼리가 있다면, 잘 쓴 글, 매력적인 글은 노련한 기수가 되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방향을 돌려놓는다.

 

명목상 음악을 다루는 글쟁이를 표방하고 있으니 이제 음악 얘기를 좀 해보자. 나에게 음악은 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단순히 함께하는 상보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럴싸한 글이 없다면 아예 듣지도 않는 꽤 까다로운 메커니즘으로 엮여 있다. 순서는 이렇다. 음악을 듣고, 글을 읽는 것. 만약 감상에 실패하는 경우 글을 먼저 읽고 음악을 듣는다. 지금껏 거의 모든 새로운 음악 감상이 이런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갔다. 물론 그럴싸한 글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음악이 적어도 누군가에겐 괜찮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내용물을 갖고 있다는 방증이기에 후자의 방식으로 감상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실패할 때도, 성공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 맞는 상당히 매력적인 방법론을 제시했구나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바로 데브 하인즈의 "Freetown Sound"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말 그대로 '그냥' 싫어하는 음악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 "Freetown Sound"를 듣자마자 이 음악은 곧장 내 블랙리스트로 올라갔다. 목소리도 듣기 싫은데 창법까지 환상적이니 메커니즘이고 나발이고 듣기가 싫은 거다. 아마 이 앨범에 대한 글이 그저 형식적인 NME 식 리뷰였다면 어노잉 오렌지가 되어 폐기처분될 운명이었을 텐데 하필 글의 주제가 '마음의 앨범'이라니. 다행히도 그 글은 미약한 불씨를 살려내 주황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만들어냈다. 이 노련한 기수는 부드러운 방식으로 처음으로 돌아가 음악의 재생 버튼을 누르게 하고, 비음에 가까운 듣기 싫었던 목소리는 개성 강한 원료 중 하나로, 보컬 덕에 가식적인 예술로 누명을 썼던 다채로운 형식과 디테일들은 르네상스 시기의 혁신적이며 호기심 많은 음악가의 예술적 고민에 대한 발로로, 불만을 걷어내니 분명하게 들리는 단출하지만 매력적인 질감의 드럼까지 드러내며 코끼리의 방향을 바꾼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글이 형식적으로 커뮤니티의 다른 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상한 글'을 맡을 주인공으로 택해도 좋은 이 글에서 내가 본 것은 그저 더 깊은 애정이다. 남들이 보여주는 유별난 애정이 나에게 미치는 힘은 그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일게 한다는 것이다. 이 호기심은 내 감상에 어거지로 씌워진 망가진 필터를 걷어내준다. 이제 그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글'들을 스크랩해두는 것이야말로 내 감상의 두 번째 재미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최고의 앨범이 되어준 "Since I Left You", 또 다른 이의 마음의 앨범 "Illmatic", 정성 어린 글들이 한데 모인 w/HOM 등. 내가 써갈긴 글의 90%는 '나쁜 글' 다이어그램에 있는데, 적어도 DJ Shadow의 "Endtroducing....." 만큼은 적당히 '이상한 글'로 소매넣기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그저 좋기만 한 글보다 이상한 글이 더 좋다. 내가 본 재미있는 영상, 혹은 장면을 남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고대하며 유튜브에 "OO reaction"을 검색하는 마음처럼, 누군가 첫 감상의 오두방정과 고조된 감정을 적당히 추스르고 설레는 마음 가득 써내린 글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하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정말 많은 글에서 본인의 문체가 남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는 모습을 본다. 누군가는 피치포크스러운 냄새가 나고, 누구는 번역체 같은, 또 누구는 심지어 GPT 같은 느낌이, 누군가는 니체스러운 느낌이 나기도 한다. 결국 쓰다 보면 내가 지향하는, 혹은 애정하는 작가 혹은 블로거의 형식을 적당히 가미하며 내 본래의 성향과 그의 흔적을 절반씩 섞는 것으로 귀결되곤 하는데, 글쓰기에 있어 이 과정만큼 재미있는 순간도 없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한때 내가 쓴 글은 어쩌면 뒤틀린 욕망을 과하게 따른 결과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역사와 인문학을 즐겨 읽지만,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그들의 맛깔나는 대사, 관계가 매력적인 위쳐 시리즈의 작가, 한국 판타지의 효시와도 같은 이영도,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문학을 즐겨 읽은 누군가를 흉내 내려 한다면 그 결과물은 헤밍웨이와 하이데거가 재즈에 대해 즉석에서 진행한 토론을 속기한 꼬라지가 될 거다. 

 

내 글을 읽어보면 알 테지만 여전히 태도의 변화는 없다. 이제는 이 날개 달린 고양이 같은 뒤틀린 그리핀의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이다. 그저 위의 재미있는 과정에서 변화한 것은 약간의 기술적인 교정,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이영도와 사프콥스키의 잔영을 조금 밀어내며 비율을 조정한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음악 글쓰기에 있어 좋은 글은 끝끝내 이상한 글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글 속에 전개되는 논리로 소모적인 논쟁을 펼칠 필요가 없고(그렇다고 없어도 안되지만), 중세의 봉건주의와 종교가 가진 권력이 얼마나 원대했는지가 아닌 그 속에서 살아가는 농노와 귀족들의 대비되는 감정을 쓰며, 음률과 가사에 담긴 예술가의 정신 분석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껴지는 직관적인 감정을, 기수의 기술이 아니라 코끼리의 행동을 서술한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감성적인 글이 누군가의 호기심을 자극할 이성을 깨우는 것을 본다. 이만큼 이상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https://blog.naver.com/nikesfm/223839739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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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 title: Daft PunkPushedashBest베스트
    3 4.19 16:55

    글을 읽는 입장에서, 읽는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나쁜" 게 아니라면, "좋은", 즉 잘 쓴 글보다 애정이 마구 묻어나는 "이상한 글"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논리나 문체 등은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해요. 다만 또 쓰는 입장에서는 애정을 잘 전달하기 위해 그런 요소들을 고심하게 되기도 하네요. 좋아하니까 더더욱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제게는 NikesFM님의 글들이 그런 "이상한 글"로 다가온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언급하신 Endtroducing......은 제가 '그냥' 싫어하는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지만요) 앨범에 속할텐데, NikesFM님의 글을 켜놓고 들으니 또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Beloved! Paradise! Jazz!?나 What's Going On에 대한 글도 저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여러 차례 읽은 글들이고요.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만큼, 저도 누군가에게 호기심과 애정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잘 읽고 있어요!

  • 4.19 16:0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공산주의 좋아합니다.

  • 4.19 16:55
    @현명한철학자

  • 4.19 16:07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 4.19 16:13

    추천 두번 누르는 기능 도입 필요

  • 3 4.19 16:55

    글을 읽는 입장에서, 읽는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나쁜" 게 아니라면, "좋은", 즉 잘 쓴 글보다 애정이 마구 묻어나는 "이상한 글"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논리나 문체 등은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해요. 다만 또 쓰는 입장에서는 애정을 잘 전달하기 위해 그런 요소들을 고심하게 되기도 하네요. 좋아하니까 더더욱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제게는 NikesFM님의 글들이 그런 "이상한 글"로 다가온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언급하신 Endtroducing......은 제가 '그냥' 싫어하는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지만요) 앨범에 속할텐데, NikesFM님의 글을 켜놓고 들으니 또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Beloved! Paradise! Jazz!?나 What's Going On에 대한 글도 저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여러 차례 읽은 글들이고요.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만큼, 저도 누군가에게 호기심과 애정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잘 읽고 있어요!

  • 4.19 17:02

    데브하인스 얘기 엄청 공감 되네요

    뭐 저는 처음부터 그리 싫었던건 아니지만

    실제로 관점을 달리하고서 들으니 어느새 인생 앨범이 되어있던..

  • 4.19 17:16

    글 글 글

  • 4.19 18:24

    글이 술술 읽히네요, 아주 잘 읽었습니다

  • 22시간 전

    감흥이 없을때 리뷰를 읽고 앨범을 다시 들어보는거 실천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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