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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8 디깅일지

GeordieGreep2025.03.28 18:48조회 수 293추천수 3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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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hiem Supreme - Snake & Crane Secret


얼핏 보기에 이 앨범은 형식부터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거칠게 그려진 용과 뱀이 휘감긴 커버, 무협에서 차용한 제목(1978년 홍콩 무협 영화 「사조비급 - 뱀형두학비급 (Snake and Crane Arts of Shaolin)」에서 따온), 그리고 샘플링의 질감은 이 앨범이 장르의 외피를 빌려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막상 재생 버튼을 누른 순간부터, 이 앨범은 그 외피를 스스로 해체하기 시작한다. 내가 기대하게 되는 익숙한 무언의 코드들(권선징악, 대결 구조, 고조되는 서사)은 단 하나도 충족되지 않는다. 대신 사운드는 중심축을 피하듯 비켜 흐르고, 랩은 그 위에서 마치 균형을 고의로 흐트러뜨리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걸어간다.


Wino Willy의 프로덕션은 그 자체로 굉장히 납작하고 절제된 톤을 유지한다. 공간감은 억제되고, 비트는 둔중하게 깔리되 전면으로 튀어나오는 일 없이 후퇴한 채로 남아 있다. 재즈와 소울 샘플들이 분명히 활용되고 있지만, 그 감정선을 적극적으로 부풀리기보다는 한두 겹 덜어낸 채 미세하게 흔들리는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이로 인해 트랙들은 서서히 증발하는 무드 속에서 느슨하게 이어지고, 이는 단지 무심한 편곡이 아니라 의도된 질감 조절로 읽힌다.


Rahiem Supreme의 랩은 그 위에서 일관되게 감정을 삼킨다.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지대에 머물며, 드라마를 끌어내기보다 오히려 감각을 눌러 담으려는 듯하다. 내용적으로도 개인사나 직접적인 고백은 등장하지 않고, 추상적이거나 은폐된 단어들로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다. 마치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처럼. 이 거리감은 종종 혼잣말처럼 들리고, 때로는 나의 해석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친절함이라기보다는, 이 아티스트가 어떤 고정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상황과 감정의 ‘기류’를 남기고자 한다는 느낌에 가깝다.


무협이라는 테마가 전면에 있지만, 실은 그 테마조차 앨범 전체의 상징성 속에 묻혀 있다. 실제로 무협의 극적인 긴장감이나 영웅 서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무술 수련 중 침묵하고 명상하는 시간, 그 느슨하고 반복적인 일상의 질감에 더 가깝다. 트랙 간의 연결도 그렇다. 기승전결을 요구하면 앨범은 금세 무너진다. 그냥 앉아서 오래된 필름을 틀어놓듯 감상해야 한다.


쉽지 않은 앨범이고, 그렇다고 무조건 깊은 앨범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무렇게나 만든 건 아니라는 점이다. 소리가 간결하고 랩이 건조하다는 이유만으로 이걸 미니멀하다고 부르기엔, 그 안에 은근히 숨어 있는 감정들이 너무 많다. 어떤 때엔 이 감정들이 잘 안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오히려 다시 듣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점수는 Decent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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