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 오렌지에 대한 잡다한 생각들.
언제 그리고 어떻게
2012년에 발매된 많은 앨범들을 10년이 지나 되짚어보면 결국 최후의 승자는 두 장의 앨범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한 장은 켄드릭 라마의 <good kid mad city> 다른 한 장은 프랭크 오션의 channel orange다.
하지만 이 두 앨범이 승리자가 된 방법은 사뭇 다르다. 예컨데 전자의 방법론은 1994년의 나스가 제시한 것과 유사하다.최고의 비트와 최고의 라임과 최고의 래핑이 결합하면 최고의 앨범이 된다는 사실. 거기다가 작가 특유의 시선을 중심으로 결합된다면 클래식이 되는다는 간단한 진리에 입각한 앨범이였다. 클래식 앞에 유행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후자의 앨범은 무엇인가. 우리가 프랭크 오션을 이야기할 때 늘 따라나오는 단어가 있다. 얼터너티브 알앤비라는 장르명이다. 디지털가공과 오토튠 우울한 신스음과 드럼, 어떤 측면서 일렉트로니카 음악처럼 느껴지는 알앤비. 이 장르가 개화하게된 계기는 단연코 칸예 웨스트가 상식적인 인간인 것처럼 보였던 마지막 앨범인 808이다.(이후로 칸예는 비상식적인 기행과 악행을 자행하는 동시에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의 음악적경지에 도달했다.)그리고 뒤따라 발매된 토론토의 아역배우 출신 래퍼의 믹스테잎과 앨범들이 이 장르의 모태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이 장르의 결실은 결국 이 남자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한다. 후에 이 앨범이 미친 영향력은 지금 당장 빌보드를 들어도 혹은 피치포크 베스트 뉴 뮤직을 뒤적거리면 알 수 있다. 전자음과 보컬의 결합, 고통과 외로움의 솔직한 토로, 음울한 멜로디와 신스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앨범의유전자를 읽는다.
앨범을 발매하기 전 프랭크 오션은 커밍아웃을 한다. 이 것은 하나의 사건이였다. 지금까지의 흑인음악, 과장해서 말하자면 흑인사회와 미국이 성소수자를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앨범을 대할 때 정형화된 남녀간의 사랑을 벗어난 다른 층위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선언의 의도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낼 수 있다. 하지만 내게 의미있는 것은 의도가 아니라 그가 직접 말했다는 사실이고 그로 인해 이 앨범은 또다른 층을 더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랭크 오션은 누구인가
그가 커밍아웃을 했다는 사실? 혹은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 폴 버호벤의 무시무시한 걸작 엘르는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단어들이 사실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신경하며 무의미한 동시에 틀렸는 지 증명했다.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 미셸을 바라보았을 때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인종,성정체성 그 무엇이든 프랭크 오션을 규정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그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에이미 와인하우스에 대해서 얼마나 특별한 삶을 살고 어떤 사랑을 해야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지 궁금하다 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에이미의 삶과 사랑은 유달리 특별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다. 다른 것은 관점이다. 예술가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자가 아니다. 경험을 특별하게 여기는 자다. 우리가 진정 그들에게 매혹되는 지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축복받은 소수는 마치 그들과 대화하는 듯한, 그들의관점과 나의 관점에 교집합을 만들어내거나 완전히 새로운 각도를 추가한다. 프랭크 오션은 그 소수다. 흑인이니 성소수자니 하는 정체성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앨범을 듣고나서의 얘기다. 프랭크 오션은 지금 자신만의 관점으로 곡을 만들어낸 예술가다. 그것이 (그를 규정하는 수많은 정체성들 중)우선시되어야할 정체성이다.
무엇을.
프랭크 오션은 무엇에 관해 쓰는가.
오션의 채널 오렌지는 중독적인 루프, 미묘한 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블론드가 시고 good kid mad city가 영화라면 채널 오렌지는 산문이다. 프라이는 산문을 소설, 로망스, 아나토미, 고백으로 분류했다. 이 앨범은 진위여부를 떠나 고백에 가깝다. 예컨데 파노라마처럼 오션이라는 청년이 세상을 경험하며 느낀 것들을 펼친다. 주제가 사랑이라는 테마로 엮일 수 있다고 한들 핵심은 정서이다.
이 앨범의 주된 감성은 고독이다. 오션은 여기서 길을 잃거나 남아있거나 고민한다.
thinking bout you라는 매혹적인 시작은 나와 상대 사이의 간극을 암시하고 이는 forrest gump로 갈무리된다. 홀로 남아있는 오션의 이미지는 이 앨범을 함축한다.
왜
채널 오렌지는 이제 음악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들어야하는 앨범이 되었고 시대의 목소리로 인정받았다. 무엇이 이 앨범을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는가. 오션의 재능을 이야기하는 게 편하지만 결국에는 행운의 여신이 그의 어깨에 앉았다는 말로 마무리해야 한다.
이제 우리 세대는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는 목소리를 획득했다. 보위와 프린스가 그랬듯.
동성애자로서 오션의 존재는 뭐랄까.
너 여기 있어도 괜찮아 라고 말하는 느낌입니다.
이 우주에 너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시절 저에게 오션의 음악은 항우울제처럼 기능합니다.
사랑받는 다는 것은 살아있어도 된다는 말과 동의어죠.
오션은 그걸 아는 목소리입니다.
잘 읽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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