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감상이 취미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하게도 제 도출한 해답은 이미 취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제대로 된 감상이나 다양한 음악을 찾아 들은 것이 얼마 되지 않은 점이 부끄럽다면 부끄럽다. 게다가 최근에 들어서는 음악을 듣는 것도 버거워져 음악 감상에 투자하는 시간도 줄이는 중이라, 이에 관련한 글을 쓰는 것이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제 취미 중에서 나름의 시간을 함께하고서는, 사적인 감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글을 쓰는 것도 이것이 처음이니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실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감상한다는 행위 자체도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다른 말이 아니라, 나름의 제 기준을 가지고 제대로 된 감상을 가져본 이후의 기록이 몇 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지금에 와서도 제가 세운 기준은 여전히 아리송하고, 이를 구분 짓는 일조차 별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그럼에도 나름의 구분을 짓고자 하는 이유는 모종의 ‘순수함’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치부하고 싶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20대가 되기 전, 허영심으로 가득 찬 고등학생 시절의 내게 있어 음악은 일종의 귀를 막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일종의 ‘백색 소음’, ‘안과 바깥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 정도의 취급이랄까? 혹은 남들이 듣지 않는 음악을 들으면서 자뻑에 빠지는, 소위 ‘힙스터’스러운 마인드를 장착하고는 이상한 노름에 빠지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 상태가 무작정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나, 지금의 제가 지향하는 무언가와는 명백히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계기가 있다면 정의조차 하기 힘든 모호한 기준을 똑바로 세우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마치 도돌이표 같은 일관된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마음을 잠시 잊고 있던 하나의 ‘순수함’으로 정의 내리기로 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거나 찾을 때의 기쁨이나 설렘과 같은 것들을 되찾기 위함으로써.
사실 내 ‘순수함’의 첫 경험을 따져보자면, 시대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서는 중학생 시절에 도달하게 된다. 당시의 음악을 들을 경로라고는 인터넷으로 막 퍼지기 시작한 스트리밍 사이트나 유튜브, 통용되던 MP3 플레이어가 전부였다. 재수가 좋게도 중학생이었던 나는 집과 회사를 자차로 오고 가며 자주 음악을 즐겨듣던 자칭 '음악 마니아'인 삼촌의 MP3 플레이어를 빌릴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그 MP3 속에 담긴 앨범 몇 가지를 반복하여 듣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걔 중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앨범이 바로 래퍼 50 Cent의 <Get Rich or Die Tryin'>이다. 나이 지긋하신 우리 삼촌이 유난히 흥얼거리던 곡도 바로 "In Da Club"이었으니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내 미숙한 영어 실력으로는 그 곡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된 해석도 못했지만, 운동을 하면서 "In Da Club"을 즐겨 듣는 삼촌의 모습과 50 Cent가 거꾸로 매달린 뮤직비디오 영상과 포개지며, 나지막한 웃음을 지었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이 외에도 음악 감상에 있어서 유난히 그에게 빚진 것이 많은데, 당시로는 접근하기 힘들었던 고전 팝송부터 당시 클럽에서 유행할 법한 힙합 음악까지 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Michael Jackson의 퍼포먼스에 대한 예찬이나, 아무로 나미에, Usher, Britney Spears, Lady Gaga, Nelly같이 90~00년대 팝송으로 대변되는 이들의 모습들이 한 시절의 MP3와 삼촌과의 대담 속에 어렴풋하게 녹아있었다. Michael Jackson의 공연을 유튜브를 통해 연속으로 재생하며 극찬하기 바빴던 삼촌의 모습과 다양한 해외 가수의 뮤비를 내게 틀어주며 흥얼거리던 모습 등…아마 그 무렵부터 알게 모르게 내 취향과 감상의 지양분이 천천히 쌓여갔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환경과 타인의 영향은 쉬이 간과할 수 없다.
그렇게 중학생 때의 비슷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인 이후,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제 나름대로 유튜브나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좋아하거나 유명한 앨범들을 찾아가 보려 했다. 특히 어쩌다 내 손에 잡힌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내 입안을 오르내리는데, Kendrick Lamar, Daft Punk, Amy Winehouse, A Tribe Called Quest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고등학생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들도 그들의 작품이다. 특히나 Kendrick은 또 다른 아티스트들의 길로 향하는 데에 많은 빚을 진 터라, 아직까지도 각별한 아티스트로 남아있다. 일례로 우연히 <good kid, m.A.A.d city>를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작금에도 유효한 것처럼 말이다. 어찌 힙합이라는 장르를 지금 정도로 애정하게 된 것 역시도 그 처음의 청취가 시발점이지 않았나. 하나의 신선한 충격 덕분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나는 귀신이라도 씐 듯이 여러 힙합 앨범들을 직접 찾아 듣고자 했다. 그렇게 물망에 오른 작품들이 <illmatic>, <MMLP>, <Madvillainy>, <36 chambers>, <MBDTF> 등이다. 아마 그즈음부터 나름 해외 힙합을 좋아한다고 자부할 정도로 다양한 힙합 앨범들을 찾아 들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성장한 싹수는, ‘이런 앨범들을 듣지 않으면 제대로 된 힙합을 모르는 거야’ 같은 편협한 사고였으니, 어찌 웃프다면 웃픈 이야기다. 게다가 당시의 고등학교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쇼미더머니’가 한창 유행인 터라, 내게 있어 소위 ‘쇼미더머니 음악’은 해외 힙합을 따라 한 저열한 것으로 구분 짓곤 했다. 정말 부끄럽지만 그랬다. 한데 더 웃긴 이야기는 <good kid, m.A.A.d city>으로 향했던 여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창 유행이던 ‘쇼미더머니’와 ‘무브먼트 크루’의 음악들과 연결된 알고리즘 덕택에 Kendrick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와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않으나, 한 국내 래퍼가 해외 래퍼에게 영감을 받았던 기사를 보고는 자연스레 해외 힙합에도 입문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이런 두루뭉술한 생각들은 지금에 와서야 생각나는 것이고, 남들이 보기에 당시의 모습은 흔히 남들의 취향을 우습게 보는 '힙찔이'와 같은 인간 군상이 맞을 것이다. 혹 뭇 장르의 노래들을 경시하고, 배다른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있어 보이기 위해서, 장르를 방벽으로 내세운, 그런 허영심에 가득 찬 모습으로 말이다. 그때는 그게 멋있는 줄 알았다.
다만 이런 파렴치한 사고도 크나큰 변화를 맞이한 몇 계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언젠가 집에 턴테이블을 들일 기회가 생겼는데, 아버지께서 수년째 보관 중인 <들국화 1집>을 꺼내신 일이다. 한때, 아버지께서 거실에 있는 턴테이블 위에 <들국화 1집>을 재생시켜놓고서는 가만히 감상에 빠지셨는데, 워낙에 몰입하신 터라 따로 크게 방해할 수 없었다. 그냥 전곡을 천천히 듣고만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째 정말 행복해 보였고, 나중에 물어보길 '그냥 좋다'는 감상이 전부였다. 아버지의 음악 세월을 전부 느낄 수는 없겠지만, 찰나의 그 모습이 당시 염세가 가득한 제 모습과 비교되고는, 그제야 스스로가 참으로 한심해 보였다. 때문에 제 감상 태도 역시 허영심에 가득 찬 무언가로 보이기 시작했으니 과연 안타까운 일이다. '저리 순수하게 음악을 좋아했던 적이 있는가?', '질감의 호오를 차치하고서, 내가 정말로 하나를 열렬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국, 진실되게 좋아해 본 적 없는 작자의 말로는 스스로가 만든 구렁텅이 속에 빠지는 법이다. 순수하고, 열렬하게, 진실되게 좋아하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를 이리 멀리 돌아갔으니 결국에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외에도 몇 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지나가고, 나름의 계기로 배운 교훈이 있다면, 그냥 순수하게 좋아하면 된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다. 멀리 돌아갈 필요 없이 순수한 동기 하나면 족하다는 생각이 중요하지 않았나. 그렇게 20대 초에 들어서면서, 제 감상 태도 역시도 성장했는지, 호기심과 탐구욕 역시 월등하게 증가한 상태가 되었다. 이것이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나의 음악적 자부심이라면 자부심이다. 꼭 힙합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장르를 탐구하고 제가 제대로 좋아하는 음악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으니…특히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나눌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었다. 일례로 우연히 사귄 아프리카계 미국인 펜팔 친구 덕분에 R&B/소울에 관해서 남몰랐던 시선을 제공받고는 70~80년대의 소울 음악을 본격적으로 감상할 기회가 생겼다거나, 대학교 첫 연애 덕분에 The Beatles라는 커다란 세계관을 마주할 수 있던 일 등은 그야말로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수소문하는 것만 아니라, 원하는 정보를 직접 찾아보는 시간도 더욱 길어지게 되었다. 생전 몰랐던 재즈나 록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 학교 도서관의 서적이나 인터넷 위키를 뒤졌고, 도통 구분하기 어려운 몇 음악의 장르를 커뮤니티에 물어보는 일도 있었다. 예와 다르게 클릭 한 번으로 수많은 자료를 찾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과거보다 더 많은 음악적 접근법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내가 스스로 하겠다는 마음가짐이나 욕구 그 자체에 있지 않았을까. 물론 고등학교 때와는 다른 애정가짐(?)으로써.
애정. 현대의 내가 삼촌이 그토록 좋아하던 Michael Jackson의 발자취를 직접 찾고, <Thriller> 바이닐을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일 등은, 10년 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언젠가 제 나름의 음악 감상법을 정하고, 꾸준히 실행하는 것을 나름의 철칙으로 둔 적도 있다. 예를 들어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는 새로 나오는 신보들을 쭈욱 체크하면서 감상하는 시간을 가진다거나, 각종 평론 매체 혹은 미디어에서 주목할 만한 앨범들을 점검하는 일들 말이다. 비록 최근에는 그마저도 벅차다는 핑계 혹은 게으름으로 띄엄띄엄해졌지만, 대개 주목할 만한 앨범들을 되새기고 각종 글을 쓰는 일은 현재진행형이니 이대로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여태껏 쓴 여러 글 역시도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잘 쓴 글은 아니지만, 제 감상이 들어가고 의도를 공유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충분히 만족스러우리라 믿는다. 게다가 제 취미를 꼭 억지로 진행할 필요만은 없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삼촌이 내게 열렬히 Jackson의 우수함에 대해 열렬히 토로했던 이유와 제 친구들이 노래방에서 그토록 열창하던 음악들이 이해되는 순간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것 또한 '순수함'이라고 칭하고 싶다. 나는 아직까지도 Prince의 "Purple Rain"을 들으면 괜스레 마음이 철렁한다. 이에 관해 글을 두서없이 적은 적이 있는데, 그냥 아름답다거나 좋다는 표현으로 어영부영 갈무리하기에는 여전히 아쉽지만, '그냥 좋다'라는 말로 귀결해서 문장을 마쳤던 걸 보면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좋다'는 말이 여러 군데서 모여 하나의 커다란 감상이 되면 언젠가 납득 가능한 세계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비단 "Purple Rain"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다른 여러 음악들도 마찬가지인 이야기다. 감상이 단순해서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좋다'는 표현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골몰하는 과정이 즐거울 뿐이다. 당연하게도 애정과 가장 개인적인 감상, 그리고 마지막의 순수함까지 챙기고서 말이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길!
잘 읽었습니다~
1년 전 이맘때 즈음에 제가 적었던 글이 떠오르면서 즐겁게 읽어나간 것 같네요. 공감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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