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3
칸예 같은 아웃라이어를 제외하면, 지난 10년간 힙합 사운드의 변천을 주도했던 이들로 렉스 루거와 메트로 부민, 데스 그립스와 릴 어글리 메인이 떠오른다. 그리고 5년 전 이맘때쯤 이에 비견될만한 사건 하나가 일어났는데, 얼 스웨트셔츠의 <Some Rap Songs>가 발매된 것이다. 이 번뜩이는 괴작은 백우즈 스튜디오, 그리젤다 레코드, sLUms 등 로파이 뉴욕 신을 세간에 소개하며 우리가 힙합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창을 마련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수혜를 입은 sLUms는 미니멀하면서 서정성 강한 비트, 조야한 믹싱, 자기성찰의 가사, 풍부한 음색과 음조를 통해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그런데 이들의 음악과 스타일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음악을 대하는 태도였다. 동시대 스타인 스캇과 카티만 하더라도 저마다의 콘셉트는 유지할지언정 음악을 사명처럼 여기는 태도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마이크 같은 sLUms의 젊은 래퍼들은 마치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만드는 것처럼 음악을 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느낌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음악을 사명처럼 여기는 태도'에 늘 깊은 감명을 받고 그것을 다각도에서 분석하기 위해 힘써왔다. 하지만 음악인으로서의 성공과 개인으로서의 성장, 그 이면에 자리한 복잡한 감정과 충동을 탐구해온 마이크는 말한다. "거창하고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아요."
문학도에게 마크 트웨인이 있고 영화학도에게 히치콕이 있듯 앱스트랙 힙합에는 매드립과 둠이 있다. 여러 인터뷰에서 마이크는 매드립과 둠처럼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싶다고 밝혔다. (올해 마이크는 DJ 블랙파워라는 예명으로 <Dr. Grabba>라는 일렉트로닉 앨범을 발표했다) 인트로에서 내레이션을 맡은 클라인은 "코믹한 반전이 가미된 어두운 로맨틱 호러 사운드트랙"이라고 앨범을 소개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Burning Desire>는 마이크의 어떤 앨범보다 기믹에 충실하다. 이 공포 영화는 서아프리카 단 부족의 가면 조각가가 그저 그런 작품으로 조롱을 받던 와중에 집에 자신이 만든 것보다 더 예쁜 가면이 신비롭게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처럼 아프리카 미학은 미국 문화의 상상력에서 아프리카 예술과 영성이 차지하는 복잡한 위치를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의식용 가면이라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미국 문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핼러윈 살인마와 결합해, 앨범 전체에 걸쳐 매혹적인 서스펜스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앨범은 마이크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추상성이 약하고 지나칠 정도로 각이 살아있다. 또한 앞서 쿨한 발언이 무색할 만큼 거창하고 철학적인 의미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모순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 제이펙마피아 역시 테크닉과 관점이 원숙해짐에 따라 <LP!>와 <Scaring The Hoes>같은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DISCO!>를 기점으로 마이크의 샘플 운용은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샘플링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아이디어를 가져와 뼈대를 갖추는 과정이므로 앨범 규모로 발전시키기가 만만치 않고 그렇다고 디테일에만 치중하다 보면 조잡해지기 십상이다. 한데 Zap!에서 경적처럼 울리는 브라스 샘플이 잔물결치는 키보드와 부딪혀 스스로 리듬을 만들어낼 때, Golden Hour에서 하이 피치 보컬 위로 교태스러운 신스가 꿈틀거릴 때, 나는 래퍼가 아님에도 래퀀이 Ice Cream 비트를 처음 들었을 때 느꼈다던, 그러니까 저 비트 위에 꼭 나의 벌스를 얹고야 말겠다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 마이크의 아이덴티티인 소울 찹과 로파이 샘플은 갑자기 속도가 바뀌고, 짐작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끊어졌다가, 더듬거리고 비약하며 한층 더 연마됐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Mussel Beach의 침침하고 명상에 가까운 그루브 위에서 엘 쿠스토와 니옹테이의 가볍고 날렵한 래핑은 마이크의 무뚝뚝한 톤과 맞물려 유독 거침없이 들리는데, 쿠스토는 "내가 말하는 방식이 바로 이거야. 내가 하는 일을 믿게 만드는 거야."라고 내뱉으며 마이크를 대신해 그의 방식을 설파한다.
마이크의 느긋하고 대화하듯 이어지는 가사는 일상을 되돌아보는 친구와의 담소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음악이 제아무리 빼어난들 특유의 톤 때문에 호오가 심한 대니 브라운 같은 래퍼를 생각해 보면, 이런 친근함은 그의 푸근한 체형이 주는 선물과도 같다. 그뿐만 아니라 몇 마디 단어에도 생생한 감정을 담으려는 마이크의 세밀한 성격은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화 속 정서에도 공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내러티브에 입체감 있는 실체를 부여한다. 마이크 작사법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피처링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곡에 두 번째 구절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인생과 주변 세계에 대한 가벼운 성찰이든, 상실과 자기 의심에 대한 내밀한 고찰이든, 아니면 우스꽝스럽고 키치한 농담 따먹기든 간에, 마이크 세계사는 언제나 16마디로 정리된다. 누군가는 이처럼 오롯이 컨셔스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량한 스웩도 아닌 무미건조한 가사에 어떤 매력이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거창하고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즉 밀도 높게 쓰되 단상으로 이루어진 텍스트야말로 힙합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켄드릭과 카티만 있는 세상이 과연 재미있을까?
DJ 블랙파워, 즉 프로듀서로서 마이크는 2곡을 제외한 앨범의 모든 곡을 스스로 제작했다. RZA와 칸예의 주특기였던 하이 피치 보컬 샘플, 제이 딜라에 버금가는 디깅 감각, 힙합 역사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둔탁한 붐 뱁 드럼까지. <Burning Desire>는 섬세한 포스트 앱스트랙 레코드이며,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루프 위에서 마이크는 기교와 사색으로 가득하지만 결코 우쭐대지 않는 랩을 들려준다. 이 앨범에서 뉴욕 MZ 래퍼들의 쿨한 태도보다 놀라웠던 것은 지나칠 정도로 살아있는 각이었다. <Burning Desire>은 단지 완성도 높은 음악을 듣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맛깔난 음식과 근사한 대접이 어우러진 저녁식사처럼 모든 과정에 독창성과 노고가 깃들어있는 듯한 풍미를 준다. 앨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U Think Maybe?에서는 리브의 야릇한 보컬 하모니와 환각적인 호른 샘플이 트라우마에 대해 반추하는 마이크의 랩과 뒤섞여 풍성한 사운드스케이프를 빚어내는데, 이 곡은 <Madvillainy>에도 수록될만하고 켄드릭의 하드디스크에서 간택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소견에 직감 이상의 근거는 없지만, 마이크는 둠과 매드립이 작당모의를 하고, 제이펙마피아가 힙스터 문화에서 에미넴과 칸예를 대체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접어든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맥도날드일지도 모르지만, 개중에 최고의 맥도날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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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이 딱 열흘 남았군요.
올해 힙합에서 좋은 앨범이 많이 나왔는데,
저는 그중에서 마이크 앨범이 가장 좋았습니다.
기믹이나 샘플 다루는 솜씨와 가사나 랩 등
전성기에 들어선 래퍼 그 자체랄까요.
그런데 이 앨범을 안 들어본 사람들이 더러 보이더라고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이렇게나마 소개해 봅니다. ㅎㅎ
또 겨울 날씨에 잘 어울리는 앨범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날이 정말 춥네요.
감기 조심하시길!
2023년 올해의 힙합 앨범 세 장을 뽑으라고 해도 충분히 들어갈 것 같아요
올해 좋은 힙합 앨범이 정말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
캬 정말 명반이죠
뉴욕에는 명반제조기들이 참 많네요 ㅎㅎ
크리스마스 선물인 기분으로 읽겠습니다ㅎㅎ
진짜 얼어 죽을 것만 같은 날씨입니다 따뜻하게 지내시길 바래요
이제 곧 성탄절이로군요. 감기 조심하시길!
잘 읽고 갑니다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
전작들보다 샘플링이 너무 탁월해서 감탄했습니다. 담담한 마이크의 래핑이 감흥을 배가 되게 하는 것 같았네요
맞습니다. 샘플링으로는 경지에 오른 것 같아요. 담담한 랩 스타일도 너무 매력적이고요
최고... 최고에요...
감사합니다!
최고다... 더 주목받아야 하는 앨범
올해가 가기 전에 다들 꼭 한 번씩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샘플링 위로 본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돋보였던 앨범...
멋집니다
저도 정말 정말 잘 들은 앨범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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